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봄에 아이가 태어나 여름부터 6개월짜리 육아휴직 중이다.
가을인가 싶더니 겨울이다. 춥다. 이럴 땐 따순 집에서 배 깔고 엎드려 책 읽는 게 최고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서 한국의 2023년을 잘 보여주는 책 다섯 권을 골랐다.
[1]
<베테랑의 몸>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이다.”
수년간 내 주요 업무는 노트북 앞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손가락을 놀리는 일이었다. 육아휴직 중인 요즘은 주로 몸을 쓴다. 한결 더 굽은 등과 어깨, 삐걱이는 무릎과 발목, 뻑뻑해진 손가락 마디마디. 3개월 육아도 몸에 흔적을 남기는데, 30년을 한 가지 일에 바친 이들은 오죽할까. 귀금속을 다루는 세공사, 줄 하나에 의지해 건물 벽에 매달리는 로프공, 밥을 짓는 조리사의 몸은 모두 제각각이다.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해온 저자가 이번엔 베테랑 12인의 몸에 남은 흔적을 기록했다.
흔적은 이야기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 종사해온 베테랑의 몸에는 단기간에 뚝딱 만들 수 없는 드라마가 있다. 안마사 최금숙 님의 이야기가 끝나면 마필관리사 성상현 님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 다음 세신사 조윤주 님이 궁금해진다. 한 사람 한 사람 끊어 읽기 좋은 책이지만, 끊어 읽기 어려웠던 이유다. 본문에 삽입된 생생한 일터 사진도 방구석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글에서 ‘김연아 그냥’을 검색하면 유명한 짤이 하나 나온다. 피겨고수 김연아처럼 이 책의 인터뷰이들 또한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냥 하는 거죠.” 그 뒤에 비슷한 말이 하나 더 붙는다. “하다 보면 알게 돼요.”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한두 번 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그래도 한 번 더 ‘그냥’ 하다 보면 시간이 쌓이고 쌓인 시간은 성실함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이게 되네?’ (육아도 하다 보면 알게 될까요?)
- <베테랑의 몸> | 희정 | 한겨레출판 | 2만 원
[2]
<루나의 전세역전>
“인간에게 속았지만 계속 인간을 믿을 거야. 사기꾼 따위가 내 세계관을 바꿀 순 없어.”
때는 2020년 여름. 살고 있던 투룸 계약이 6개월 남아 집을 보러 다녔다. 치솟던 전세금을 감당하기에 우리의 예산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다 한 부동산에서 널찍한 신축 빌라를 보여줬다. 지하철역에서 가깝고 테라스도 마음에 들었다. 반색하는 우릴 보고 중개사는 말을 보탰다. “둘이 살기 딱이죠? 이 건물 전부 신혼부부 입주 예정이래.”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위험한 집이었다. 주변 시세에 비해 보증금이 비쌌다. 빌라 주소를 검색해보니 전세가와 매매가가 똑같았다. 하지만 이 부동산도 저 부동산도 우릴 그 신축 빌라로 데려갔다. “좋은 집이 있다”면서. 결국 우린 새 신혼집 구하기를 포기하고, 살고 있던 투룸 계약을 연장했다. 좁고 춥고 어두운 그 집에서 2년을 더 사는 동안 ‘깡통 빌라’는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좁고 춥고 어두운 방에서 우린 안도했다.
올해 초 이사를 나올 때도 보증금을 돌려 받기는 쉽지 않았다. 좋게 말해 합의지, 나쁘게 말해 수모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보증금이 입금된 순간 한 번 더 안도했다. 화도 났다. ‘내 돈 다시 돌려받는 건데 이렇게 가슴 졸일 일이야?’ 집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이젠 집을 나오기도 어렵다.
<루나의 전세역전>은 세입자의 고난을 그린 만화다. 갑자기 집주인이 바뀌고,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어쩔 수 없이 공매에 참여해 집을 사고, 다시 팔고 이사 나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2가지다. 첫째, 학습용. 전세사기는 두렵지만 맘먹고 공부할 엄두가 안 난다면 이 책으로 시작하시길. 둘째, 저자에 대한 리스펙. 다른 세입자들을 위해 떠올리기도 싫을 순간들을 다시 되짚어가며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의지에 존경을 보낸다.
- <루나의 전세역전> | 홍인혜 | 세미콜론 | 1만 8,000원
[3]
<아무튼, 당근마켓>
“부지런히 당근을 심는다// 그 밭에는/ 사람들이 두고 간 시간이 자란다//”
하나에 푹 빠진 사람을 보면 덩달아 흐뭇해진다. 그래서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무튼, 클래식>, <아무튼, 노래>를 디에디트에 소개한 적도 있다. 가끔 내가 저자라면 뭘로 쓰면 좋을까 공상해본다. 낱말퍼즐? 이소라? 땅콩? 아무리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쓴다 해도 한 가지 주제로 책 한 권을 꽉 채우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쓰게 될 날을 대비할 겸 아무튼 시리즈를 한 권 더 읽어두기로 한다. 이번엔 ‘당근마켓’이다.
내 폰에도 당근마켓 앱이 깔려 있다. ‘당신의 근처’라는 속뜻처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과 연결해주는 중고 거래 서비스다. 저자 이훤과 같이 물건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에게, 헐값에 다양한 물건을 들여올 수 있는 당근마켓은 신세계다. 얘깃거리도 새 물건보다 헌 물건에 더 많다. 저자는 커피잔, 옷, 화병 등 당근으로 만난 물건에서 글감을 캔다.
당근해본 사람은 안다. 당근마켓에선 사람 냄새가 난다. 항상 사기꾼을 경계해야 했던 이전까지의 중고거래와 다른 점이다. 동네 인증이나 매너온도 같은 안전장치 덕분일까. 당근마켓과 관련된 훈내나는 에피소드를 읽다 보니, 며칠 전 당근했던 날이 떠올랐다. 내가 원한 물건은 판매자의 손녀가 타던 빨간색 유모차였다. 접고 펴고 씌우는 법에 대해 한창 자세히 설명을 듣고 송금 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서려 할 때, 작은 종이가방을 건네받았다. 손녀가 입던 외출용 바디수트와 아기용 간식 ‘쌀떡뻥’이었다. 당근은 이런 거구나… 바디수트 잘 입히고 있어요! 좀 더 크면 쌀떡뻥도 잘 먹일게요!
- <아무튼, 당근마켓> | 이훤 | 위고 | 1만 2,000원
[4]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앞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하거나 숙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없애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송길영 저자가 2년 전 펴낸 책 <그냥 하지 말라>를 재밌게 읽었다. 이직을 앞두고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던 때라 그런지, 빅데이터 전문가의 트렌드 예측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육아휴직 6개월 중 절반이 지나, 복직 후 어떤 마인드로 일해야 할지 슬슬 고민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또 한 번 송길영 저자의 지혜를 빌려본다.
이번엔 아예 제목에 ‘시대예보’라 못박고, ‘핵개인’을 메인 키워드로 내세웠다. 교과서에 등장하던 ‘최신 트렌드’로서의 핵가족은 이제 옛날 얘기다. 1인가구가 늘어난 만큼 핵가족이 줄기도 했고, 기존 핵가족의 집안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이 책의 네 번째 챕터 제목이 ‘효도의 종말, 나이듦의 미래’다. 종말의 이유는 ‘받은 것과 드릴 것 사이의 불균형’이다. 죄책감밖에 드릴 게 없는 이들을 두고 저자는 ‘미정산 세대’라 부른다.
불균형은 회사에도 있다. 회사는 신입 대신 경력을 뽑는다. 선발 기준은 미래에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당장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다. 그러니 선배를 보는 눈도 날카롭다. 과거에 아무리 잘했던 선배라 해도 지금 못하면 존경하기 어렵다.
”핵개인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진 성인입니다.” 결정권을 가졌다니 좋아 보이지만, 그만큼 남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차가운 시대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정반대로 이런 생각도 든다. 모두가 홀로서기를 요구받는 시대일수록 더욱더 중요해지는 건 ‘다른 개인’과 함께하는 능력 아닐까.
-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 송길영 | 교보문고 | 2만 1,000원
[5]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내 지겨운 스무 살, 사과받지 않고도 살아갈 자신 있냐고.”
’월급사실주의 2023’이라는 이름으로 11명의 소설가가 모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더 만들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동의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샀다.
작가들은 몇 개의 원칙을 정했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쓸 것.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쓸 것. 판타지는 배제할 것. 월급 받는 회사원 얘기로 국한하지 말고 자영업,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는 물론 가사, 구직, 학습도 ‘먹고사는 문제’에 포함할 것. 나름 빡빡한 원칙하에 11편의 소설이 완성됐다.
특히 기억에 남은 세 편을 소개한다. 이서수의 <광합성 런치>는 법인카드 식대 상한선을 두고 대표와 직원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벌여야 하는 재무팀장 차진혜의 이야기다. 하루 식대가 만 원이라 갈비탕 대신 육개장을 주문해 본 사람이라면, 좀 더 몰입이 쉬울 것이다. 주원규의 <카스트 에이지>는 배달과 택배 상하차를 병행하며 집 없이 지하철에서 밀린 잠을 해결하는 스무 살 청년 태양이 주인공이다. 서유미의 <밤의 벤치>에서 학부모 경진은 딸 은솔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학습지 교사를 보며 예전 일을 회상한다.
그 외에도 입사하자마자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여행사 신입사원, 군대 내 사건 사고에 휘말린 군무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삼각김밥을 만드는 알바생 등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 있다. 판타지를 배제한 2023년 한국의 먹고사는 문제들이다. 내년에 출간될 ‘월급사실주의 2024’를 기다린다.
-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김의경 외 | 문학동네 | 1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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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