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아침의 해변에서 혼자

짐승 같은 사랑을 할 걸 그랬나
짐승 같은 사랑을 할 걸 그랬나

2019. 11. 12

에디터H가 적어놓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방에서 혼자 읽었다. 해가 지는 해변, 파도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글을 쓰는 그 기분은 어땠을까. 나도 해변에서 글쓰기를 시도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쓰는 건 이미 H가 했으니 나는 아침의 해변에서 혼자 쓰기로 했다. 처음 1분 동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무의미한 단어를 늘어놓았다. ‘아아아아아 뭐지, 뭐쓰지’ ‘델로델로 몬델로몬델로몬델로’ ‘이름이 뭐예요 전화번호 뭐예요 왓츄어네임 왓왓츄어네임’ 정말 아무말이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다. 미꾸라지가 지나간 듯 흐려진 머리 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비로소 글쓰기 모드에 진입할 수 있었다. 나의 글쓰기는 보통 이렇게 헛소리로 시작된다.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일기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질투, 허무함 그리고 안락함을 한 방울씩 넣은 그런 글. 몬델로 해변에는 아침부터 산책하는 연인들이 꽤 보였고, 그게 잔잔한 마음을 건드렸으니까.

여행은 거울 같아서 어디를 가도 내가 보인다. 개를 산책시키는 여인의 경쾌한 걸음에서도, 카페 테라스에서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신사의 모습에서도 내가 보인다.

여행을 다룬 영화도 그렇지 않나. 4,0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가는 영화 <와일드>에서 주인공 셰릴(리즈 위더스푼)은 자기가 떠나온 곳, 엄마에게 했던 말을 자꾸만 떠올린다. 반성하고 후회한다. 물집 잡힌 발을 보다가 헤어진 남자친구를 떠올린다. 또 한 번 왜 그랬을까 자책하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며 후회, 자책, 다짐을 반복한다.

나도 셰릴과 비슷했다. 몬델로의 연인들을 보며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반성이나 후회는 아니었다. 아침부터 손잡고 산책하는 이탈리아노를 보며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나는 왜 이렇게 사랑에 무관심해졌을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왜 이럴까’가 아니라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표현한 이유는 나는 애초에, 원래, 본투비 사랑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한때 그러했듯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이십대는 사랑으로 충만했다. 그것이 쌍방의 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썸이든 말이다.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아마도 그렇다). 그런 내가 지금은 모든 종류의 사랑에 무관심하다. 이유는 아마도 내가 했던 어떤 연애 때문일 거다.

2년 이상을 만났다. 그는 내게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이유없이 헤어짐을 택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생각해보니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내 성향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감히 연애를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다 거기서 거기 같다는 생각만 든다.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하나만 오래하는 법이 없었다. 메이플스토리는 레벨 10 언저리에서 접어버렸고, 리니지는 레벨 15에서 접었으며, 디아블로는 40에서 접었다.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이라고는 ‘쉽게 흥미를 잃는 것’ 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연애를 하지 않냐”는 질문에 내가 이런 답을 하면 지인들은 “그건 네가 사랑을 많이 못해봐서 그런거야. 그러니 그냥 제발 아무나 만나”는 조언을 한다. 나도 그러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 잘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해변에 앉아 조금 더 생각해보니 30대의 불안함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곧 그 말은 변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30대에만 불안했던 게 아니라 항상 불안했으니까. 차라리 20대의 정해지지 않은 삶이 지금보다 더 불안했지. 그냥 나의 문제인 걸로 해야겠다.

“그래서 네가 지금 걱정하는 게 뭐야,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해답이 나오는 거지?”라며 기대를 한 사람이 있다면 미리 사과를 해야겠다. 여긴 인생을 관통하는 혜민스님의 인사이트 같은 건 없다. 이 글은 질문도 아니고, 분석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그냥 넋두리다. 불안정한 삶 때문에 모험을 두려워하는 30대가 많다는 넋두리, 나와 내 주변의 친구들처럼.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사랑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더 급하니까. 로맨스까지 챙기기엔 갈 길이 멀다. 예전에 성시경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애를 오락에 비유를 하자면, 20대에는 신나게 동전을 막 쓰며 오락을 했는데 30대에는 그 동전이 몇개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러니까 신중해 지는 거 아닐까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로맨스 영화를 봐도 설레지 않는다. 아이슬란드의 이름 모를 화산이 폭발했다는 뉴스를 접한 것처럼 마음엔 아무런 동요가 없다. 어차피 인생이란 솔로로 태어나 싱글로 가는 것인데 지나친 커플지상주의처럼 느껴진다. 패션지에 적힌 섹스칼럼을 봐도 감흥이 없다. 저 먼 우주에서 탐사선이 서로 도킹하는 것처럼 나와는 무관한 것만 같다. 지들이 도킹하든 말든.

아침의 해변에 혼자 있으니, 정답은 없고 질문만 늘어난다. 돗자리도 깔지 않고 해변에 앉으니 엉덩이가 금새 축축해졌다. 그만 들어가야겠다. 그런데 다 써놓고 보니 이런 글이 시칠리아 사이트에 올라갈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개인소장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