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하트시그널과 전원일기 사이

드라마 같은 로맨스는 없을지도 몰라
드라마 같은 로맨스는 없을지도 몰라

2019. 11. 01

H가 물었다. “시칠리아 한 달 살기에서 가장 걱정되는 건 뭐야?”

내가 답했다. “음… 딱히 걱정되는 건 없어요. 같이 산다는 거 말고는.”

그 대답을 들은 H와 M은 겨우 그게 고민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정말 겨우 그게 고민이었다.

안녕, 디에디트의 에디터B다. 지금 디에디트는 두 개의 집을 빌려 한 숙소에서는 남자 네 명이, 다른 숙소에서는 여자 네 명이 살고 있다. 집이 두 채이기는 하지만, 남자 숙소는 거의 잠만 자는 하숙집에 가깝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자 숙소로 출근해 야외 테이블에서 일을 하고, 함께 점심과 저녁을 먹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퇴근한다. 그러니 잠자는 시간만 빼면 계속 같이 붙어있는 셈이다. 혹시 이게 낭만적으로 보이나?

이제서야 말하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공동 생활을 하는 것, 두 번째는 개인 공간이 없는 것, 세 번째는 누군가가 집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프로젝트는 나와 전혀 맞지 않다.

대부분의 독자는 남녀가 공동생활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 낭만이나 로맨틱 같은 단어를 떠올릴 거다. 그건 아마 미디어의 잘못일 거다. 멀게는 <남자셋 여자셋>부터 가깝게는 <하트시그널>까지 공동생활을 다룬 작품은 아름답게 그려지니까. <하트시그널>만 봐도 꼭 이런 장면이 나온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남자가 테이블에서 아침부터 스크렘블 에그를 먹고 커피를 한 잔 내린다. 때마침 일어난 여자는 그 앞에 앉고 남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묻는다. “지현 씨도 커피 마실래요?” 약간은 어색한 사이지만 뭔가 찌릿찌릿한 분위기. 남자는 부엌으로 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려온다. 대충 이런 거 있잖아.

현실은 다르다. 따뜻한 햇살은 있지만, 그거 빼곤 <하트시그널>과 닮은 게 단 하나도 없다. 여긴 일 하러 온 사람들뿐이다. 썸 같이 달달한 건 이곳에 없다. 아니면… 혹시 나만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좀 씁쓸하겠다.

몬델로 생활은 <하트시그널>이 아니라 <전원일기>에 가깝다. “아이고, 일어나셨습니까, 오늘은 어디로 나가셔?”로 하루 인사를 시작해 각자의 업무를 시작한다. 누구는 편집을 하고, 누구는 기획을 하고, 누구는 취재를 나간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면 새참을 후다닥 먹고 다 먹으면 또 일을 하고, 일손이 부족하면 서로 도와주다가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되면 밥을 느긋하게 먹으며 약주를 마시며 하루가 끝난다. 그럼 밤 11시가 된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인턴 잭과 에이미가 도착했다. 그날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잭과 나는 마늘을 깠다. 그 이후에도 마늘을 몇 차례 깠기 때문에 그때 어떤 음식을 위해 마늘을 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부엌에서는 요리를 하는 H와 M이 분주하고 움직이고, 야외 테이블에서는 영상을 편집하는 PD 둘, 나는 마늘을 까면서 잭과 어색한 사이의 사람들이 할 법한 대화를 했는데, 불편할 분위기가 이상하게 편했다. ‘이 느낌 뭐지? 난 공동생활 같은 거 안 좋아하는데?’

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좋았을까? 나조차도 궁금했던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결국 사람 때문인 것 같다. 저녁 식사 시간에 H가 물었다. “나중에 시칠리아가 그리울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시칠리아가 아니라, 시칠리아에서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그리울 것 같다고. 그건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그리움일 것 같다고. 한 테이블에 모여 와인을 마시고 밥을 먹는 저녁 시간은 꼭 시칠리아가 아니고, 포르투였어도 즐거웠을 거니까. 하나 남은 짜파게티를 몇 주차에 먹을 건지 30분 동안 얘기하고, 짜파게티를 먹기 위한 규칙을 정하느라 30분을 더 얘기하는 사람들이 디에디트의 사람들이다. 그런 소란은 서울에서 7년 넘게 자취를 할 때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나에게 밖은 시끄러운 곳, 집 안은 조용한 곳이었다. 집에서는 괜히 혼잣말만 늘었고, 약속이 없을 땐 주말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시끌벅적함이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과 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시칠리아 한 달 살기는 내게 큰 선물이다.

마냥 훈훈하게 끝나는 건 싫어서 굳이 몇 마디 덧붙이고 싶다. 만약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동안 같이 살아야 하는 거라면 상황은 달랐을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복잡한 도시였다면 또 달랐을 수도 있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서 사실 이 글에서 ‘좋다 좋다’ 했지만, 좋은 것들에게는 항상 유효시간이라는 게 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좋다는 생각뿐이다. 이곳이 몬델로든, 팔레르모든 상관없었을 거다. 분위기는 언제나 공간을 초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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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