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탈리아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에디터H다. 지금도 생각한다. 시칠리아 한 달살기를 준비하던 지난 여름, 에어비앤비 웹사이트에서 이 아름다운 이층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올리브 나무와 석류 나무가 드리운 유럽식 정원을 보고 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린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팔레르모 시내에 숙소를 잡았겠지.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 더 윤택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슈퍼마켓 한 번 가겠다고 30분씩 걸어야 할 일도 없고, 아침마다 같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저녁 마다 정원에 있는 기다란 식탁에 모여 앉을 일도 없었겠지. 도시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겠지만, 이 동네에선 해가 저물면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해가 저물면 각자의 일과를 마친 7명이 모여 무엇을 먹을지 의논하고, 의식처럼 함께 식사를 준비한다. 완전 이탈리안 스타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된 한식도 아니다. 그저께는 토마토 소스 파스타, 어제는 삼겹살을 구워 와인을 마셨다.
해변과 태양 말고는 모든 것이 먼 몬델로에서 열흘을 살았더니 만감이 교차한다. 첫 일주일은 이 평화가 더없이 좋았다. 에디터B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 밖을 나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조바심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았다. 서울에선 늘 초조했다. 을지로가 뜨고 성수동이 뜨고, 어디에 팝업 스토어가 생겼다는데 전부 따라갈 수 없었다. 새로운 것을 동경하면서도 피로했다. 몬델로, 이 작은 바닷가 도시는 우리를 초조하게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여유롭고 호기로우며, 우리가 가봄직한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하루종일 정원에 앉아 일만 하는 날에도 바깥 세상이 그립지 않았다. 일행이 일곱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외로울 일도 없었다. 밤마다 와인을 마시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시칠리아는 마피아의 섬이라며 마피아 게임도 했다.
그러다 휴가가 생겼다. 각자 자신만의 자유 시간을 계획했다. 수영복을 사서 집앞 바닷가로 떠나는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해수욕을 즐기고 정원에 있는 흔들 의자에 앉아 낮잠을 청했다. 아마 황홀한 휴가였겠지. 나는? 뭘 택했냐고? 결국 조바심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대로 바닷가에 갇혀있을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팔레르모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지난 번엔 40분 동안 오지 않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멀다고 생각했던 도시는 금방이었다. 짠내 나는 바닷가에서 고작 20분을 달렸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니 다시 프라다와 구찌 매장 앞에 서 있었다.
토요일의 팔레르모는 평일과는 또 달랐다. 햇빛 사이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날 만큼 사람이 많았다. 공기가 계속 반짝거리고 있었다. 쭉 뻗은 상점 거리엔 주말을 즐기러 나온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길가에 펼쳐진 파라솔 마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전형적인 관광지였다. 서울로 치자면 딱 명동. 길거리엔 1유로짜리 자석이나 싸구려 장신구, 기묘한 문양의 스카프 따위를 팔고 있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곰인형 처럼 조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배를 까뒤집어 보면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써있겠지. 틀림없이.
사람들 사이를 해치며 그 길을 계속 걸었다. 심드렁한 척 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꽤 즐거웠다. 도시의 북적임 자체가 좋았다. 평생을 서울에 살아 당연했던 것들이 열흘 사이에 멀어져 있었으니까. 다른 유럽 도시와 비교하면 투박하다고 표현했지만, 그래서 더 매력있는 도시였다. 낡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재미있었다. 골목 골목 들여다보며 끝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진발이 잘 받는 도시였다. 빈티지샵에 들어가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식전주 문화라는 ‘아페리티보(Aperitivo)’도 즐겼다.
늦은 식사가 시작되기 전 간단한 안주와 칵테일, 와인을 마시는 시간을 말한다. 짜디짠 안주에 프로세코를 두 잔 마셨다. 우리는 식전 안주 만으로도 배가 부르더라. 그래서 또 걸었다.
해가 지고 나니 온 도시가 오렌지빛 조명으로 물들었다. 나는 이 유럽스러운 조명과 밤거리를 참 좋아한다. 구글맵을 덮어두고 아무 골목이나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지나고. 결국 길을 잃었다. 걸어왔던 방향을 다시 되짚어 보려는데 이 길이 아니다. 그러다 더 근사한 곳이 나타났다.
이 느낌을 아시는지. 조용한 골목 안에 그 가게에만 조명이 비추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보이는 그런 거. 이 집이 그랬다. 녹색 간판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우와”하고 외쳤다. 급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빌려쓰며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 도시를 스치듯 방문한 뜨내기들의 밤이 아니었다. 나도 저기에 앉고 싶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투박한 도시에 내 취향의 가게가 숨어있었다니. 그 때부터 숨가쁜 조바심이 몰려왔다. 궁금하다. 밤의 팔레르모가 궁금하다. 이 도시 깊숙한 곳에 숨어있을 나한테 딱 맞는 이야기를 찾고 싶다. 하루 이틀 들러서는 알 수 없는, 은밀하고 근사하게 숨어있는 비밀 이야기 같은 거. 그걸 놓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될까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아, 갈대같은 도시 사람의 마음. 몬델로의 평화를 사랑하면서도 도시의 혼잡함과 오렌지색 불빛을 동경한다. 내일도 버스를 타고 팔레르모로 가야지. 평생을 서울을 사랑한 그 마음으로. 절반 쯤 남은 일정 속에 나만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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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