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나는 오늘도 몬델로 해변을 걷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니까

2019. 10. 07

안녕, 디에디트 에디터B다. 오늘은 걷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전 여자친구, 그러니까 가장 최근까지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처음 생긴 습관은 걷는 거였다. 내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진 것이거늘, 이상하게도 다른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어른의 삶이란 게 그렇잖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몹시 지겨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1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되면 걸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처음 걸었던 곳은 흑석동에서 이어진 한강이었다. 이름이 따로 없는 길이었다. 흑석역 부근에서 이어진 한강 가는 길 정도? 그로부터 3주 뒤 남가좌동으로 이사를 갔기에, 그곳은 내게 ‘태초에 김석준이 걸었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목이 ‘몬델로 해변을 걷는다’인데 흑석동이 나오니 당황스럽겠지만 조금만 더 읽어보자. 이제 남가좌동이 나오고, 그 다음엔 몬델로가 나온다.

걷기 활동 중 가장 큰 점유율을 차지한 장소는 지금 살고 있는 남가좌동이다. 남가좌동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가좌동을 북쪽과 남쪽으로 나눈 후 그 아랫 동네를 부르는 명칭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가 그 동네에 있어서 어찌어찌 살게 된 것이지만, 우연치고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내천이 있어서 걷기 좋은 곳이었거든.

가좌동의 이름은 원래 가재울이었다. 가재가 많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가재울 양쪽으로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있고, 두 내천은 거리를 서서히 좁히며 한강 부근에서 하나로 모인다. 나는 홍제천에서 6년 가까이 산책을 했다. 대부분은 밤산책이었다. 밤엔 사람들이 없었고, 산책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조용히 걷기만 했으며, 떠들지 않았다. 아마도 외로운 사람들이었을 거다. 그때의 나처럼.

나는 종교가 없다. 무언가를 강하게 믿는 사람이 아니며, 그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산책을 믿는다. 산책을 믿는다니, <저수지의 개들>에서 미스터 핑크가 팁을 내지 않겠다며 “나는 팁을 믿지 않아”라고 하는 대사처럼 의문스러운 말이다. 산책이 종교도 아니고 산책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 말에 대한 설명은 내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산책하게 될 몬델로 해변에 대해 말한 뒤에 덧붙여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그래. 오래 기다렸다. 이제야 몬델로 해변에 대해 이야기한다.

몬델로 해변은 디에디트 숙소로부터 5분 거리에 떨어진 작은 해변이다. 해변의 정확한 길이를 알 수는 없으나 대략 2km 정도다. 처음 도착했을 땐 이곳이 집 근처에 있는 그저 그런 해변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유명한 휴양지인 듯했다. 구글맵에는 1,000개가 넘는 리뷰가 등록되었고, 주말이 되니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백인이 몰렸다. BMI 수치가 몇이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벼운 수영복을 입고 몸을 펼쳤다. 당당하고 자연스러워보였다.

그들은 아침 8시부터 해변에 자리를 잡고 햇살을 맞는다. 나는 그 옆으로 있는 산책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을 뿐이다. 한 가지 비밀이 있다면 그 산책길을 이미 한국인이 점령해버렸다는 거다. 하경화, 이혜민, 석은원, 김지원이라는 한국인은 몬델로 해변을 매일 같이 걷고 있어서, 아침마다 인사를 하게 된다. 챠오 대신 안녕이라는 인사를 하며.

내겐 산책만큼 성실한 세계가 없다. 딱 노력한 만큼만 보상을 얻는다. 30분을 걸으면 1.5km, 그리고 그 정도의 칼로리 소모, 그 정도의 생각 정리.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걷기의 효능이란 콘텐츠 기획의 초안을 짜기에 이것만큼 좋은 환경이 없다는 거다. 난 대부분의 콘텐츠 기획, 스케줄 관리를 산책할 때 한다. 걷기 시작하는 단계에는 ‘다음 주 콘텐츠를 기획해야 한다’는 문장만 있을 뿐 아무런 디테일이 없는데 산책을 하며, 한 발짝 발짝 걷다 보면 신기하게도 1만보에서 2만보 사이에는 킬링 포인트로 넣을 표현, 제목, 글의 분위기, 이야기의 흐름이 몽글몽글 떠오르기 시작한다. 쿠폰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난 걷기가 반복되는 가벼운 육체적 운동과 멍때리기의 복합 작용을 일으켜 창의력을 증진시킨다고 믿는다(이 무슨 ‘걷기란 무엇인가’의 서문에 적혀있을 것 같은 말인지?) 와이파이도 느리고, 만날 친구도 없는 이 몬델로 해변 덕분에 나의 많은 루틴이 사라졌다. 주말에는 CGV를 갈 수도 없고, 금요일 밤에 을지로에 가지도 못한다. 하지만 걷기는 어딜 가든 매일 할 수 있다.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새파란 파란, 웅장한 돌산 등 몬델로 해변에는 장점이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뭘 사 먹게 된다는 거다. 해변 옆 산책길을 따라 군데군데 자리잡은 젤라또 가게, 카페는 걷는 나를 유혹한다. 그리고 매번 유혹당한다. “우노 젤라또, 페르 파보레(젤라또 하나 주세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와 빵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 에스프레소 혹은 카푸치노를 한 잔 후루룩 마시는데, 산책을 하며 그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해보는 중이다. 문제는 카푸치노가 허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브리오슈에 젤라또를 넣어 먹기도 하면서 아침이 점점 과해진다는 거다. 젤라또가 어울리는 시간대란 없다. 항상 맛있다.

두 번째 단점은 해변에 연인이 많다는 거다. 나이대도 다양하다. 젊은 커플은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의 허리를 꺾으며 포옹을 했던 것처럼 격정적인 키스를 한다. 뭐, 상관없다. “우리 집에서 파스타 먹고 갈래?”라고 했던 커플도 언젠가는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거니까. 진짜 부러운 건 나란히 벤치에 앉아 뜨는 태양을 바라보는 노부부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매일 진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몬델로 해변을 걷는다. 혼자 걷는다. 시칠리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큰 도시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적막한 몬델로가 좋다. 여기서는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유롭고, 소란하지 않으며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삶에 쉼표 혹은 마침표를 찍고 몬델로에 온 것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한 산책자 중의 한 명으로 한 달을 살아갈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말하겠지. 나는 이탈리아가 아닌 몬델로의 조용한 해변을 다녀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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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