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M이다. 머나먼 시칠리아에서 이 글을 띄운다. 이곳의 시간은 서울과 다르게 흐른다. 하루는 길지만 한 달은 짧다. 30일 중 남은 날을 거꾸로 세며 초조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우리가 한달 동안 지낼 이 공간을 소개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임무처럼 느껴졌다.
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남자 셋 여자 넷, 왕년에 유행했던 시트콤 제목이랑 같기도 한 이 많은 사람들이 한 달 동안 살만한 집을 찾아야 한다니. 직원들이 퇴근한 야심한 밤마다 에디터H와 나는 나란히 앉아 에어비앤비에 sicilia와 sicily를 교차로 검색하며 꼬박 이주 동안을 끙끙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을 찾았다. 초록색과 노랑색이 물감처럼 진하게 섞여 있는 곳. 집보다는 별장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이곳을 보고 우리 둘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이곳이 좋겠다고.
아름다운 이 집은 몬델로 해변 가장 끝에 위치해있다. 양쪽에 돌산을 끼고 일자로 곧게 뻗은 해안가. 어디에서도 보이는 돌산을 보며 에디터H는 맥OS 엘 캐피탄같다면서 깔깔댔지만, 그 농담에 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다를 등지고 느린 걸음으로 3분 정도 조용한 마을 골목을 걸으면 우리집의 초록색 대문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곳에서 두 개의 집을 구했다. 한 달 동안 사무실이자 본부가 되어줄 우리 집 그리고 남자들이 머물고 있는 두 번째 집. 편의상 여자집과 남자집으로 부르고 있다. 이 둘은 허구한 날 사납게 짖어대는 개가 살고 있는 집 하나를 두고 떨어져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딱 2분 정도가 걸리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거기서 거주하고 있는 에디터B가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초록색의 대문에는 서울에서부터 챙겨온 명패를 달았다. ‘THE EDIT IN SICILIA’ 여기가 오늘부터 우리 집이란 걸 알리고 싶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대문을 열고 나오는 앞집 아저씨와 눈을 마주친다. 움찔. 잔뜩 경계하는 표정, 노란 얼굴에 노란 머리 게다가 카메라까지 든 낯선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차오(Ciao!)” 어떨결에 나도 인사를 하고 말았다. 일주일 쯤 지나고 우리는 이층 집에서도 서로 눈인사를 건네는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끼이이익 요란스러운 소리에 비해 대문이 열리는 속도는 참 느리다. 성격이 급한 나와 에디터H는 문이 열리는 틈새 사이로 몸을 모로 세워 집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돌담길과 그네가 보인다.
사실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바로 나무들이다. 정원의 중앙엔 숲의 정령이라도 깃들어 있을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올리브 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이국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한 나무들이 한가득이다.
네모 반듯한 아파트에서 삼십 한 평생을 산 나는 나는 나무란 것이 이토록 빠르게 무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여기서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올리브 나무는 하루에도 10개씩 올리브 열매를 돌바닥 위로 떨구고.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온 가지와 잎을 흔들어댄다. 그늘에 앉아 이 나무들은 보면 ‘아 나는 정말 멀리도 떠나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짜잔! 이곳이 우리의 사무실이다. 나도 지금 사진 속에서 보이는 테이블 위에서 키보드를 뚱땅대며 글을 쓴다. 10명도 더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이다. 여기는 끼니 때면 식탁이, 아침엔 회의실이 그리고 저녁이면 술과 음식이 있는 술집이 된다. 마치 이탈리아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8시에 늦은 저녁을 먹지만, 메뉴만큼은 한국 양념으로 맛을 낸 메이드인 이태리 한식. 어느 날은 스테이크에 고추장을 또 다른 날은 양파 베이컨 간장 덮밥. 다채로운 메뉴만큼이나 대화나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지나간 연애사나 전 직장 이야기를 나누고 어제는 영화 초성퀴즈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도 궁금한 것도 많은 사이다.
근방에서 가장 큰 마트에서 산 멀티탭을 연결해 다 각각 노트북에 전기를 수혈받고 있다. 충전은 숨쉬는 것처럼! 각종 장비를 대형 캐리어 한 가득 챙겨온 디에디트의 사내 표어다. 산모기 보다 더 독한게 바다 모기더라. 한 번 물리면 엄지 손가락 만큼 부풀어오르는 모기를 잡기 위해 전기모기 퇴치기도 있다. 매일 밤이면 타닥대며 모닥불 소리를 낸다. 아, 이곳은 낭만과 현실이 공존하는 시칠리아.
테이블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이곳은 디에디트 공식 포토 스팟이기도 하다. 빛이 좋고, 야트막한 계단이 있어서 다리가 길어보이는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다. “나 오늘 사진 찍어줘” 이 한 마디면 일사 분란하게 6개의 스마트폰 카메라가 움직인다. 누가 이중 똥손이고 누가 금손인지 서로 찍은 사진을 비교하며 깔깔댄다.
가끔 나타나는 손님도 있다. 도마뱀이다. 워낙 작아서 무섭다기보다는 참 하찮아 보이고 귀엽기까지 하다. 누군가 “도마뱀이다!”라고 외치면 다들 모여들어 도마뱀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수한다. 에디터B는 도마뱀을 키울 수 있도록 유리병을 사달라고 하고, 권PD는 도마뱀이 나타나면 망원 렌즈를 들이댄다. 참 이상한 녀석들이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이 공간이 실내에서는 거의 유일한 거실이요. 공용공간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중문을 활짝 열어 바깥의 공기를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평소 이 식탁엔 각종 촬영 장비나 먹거리가 쌓여있다.
거실과 바로 연결된 주방에는 촌스럽지만 귀여운 유럽 주방이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이곳에서는 7명이 분주하게 들락날락 거리며 음식을 만들거나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다.
한식부터 전통 이탈리아 요리까지 이곳에서 모든 마법이 이루어진다. 도착한지 이틀만에 장만 70만원을 넘게 봤다. 마트에 가면 새롭고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이라 식욕이 돋고 탐욕스러워진다. 이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탐하고 가고 싶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짧고 투박한 와인 잔이다. 지난 번 포르투 숙소에서는 온갖 와인잔이 모두 있었는데, 이곳엔 짧고 투박하게 생긴 와인잔이 딱 8개 있다. 아니, 여섯개. 사실 두 개는 벌써 깨먹었다.
우리 집엔 총 네 개의 방이 있다. 디에디트에서 최고령자이자 무릎이 좋지 않은 에디터H가 일층에 있는 방을 찜했다. 초록색 창을 열면 정원의 나무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언제봐도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방 한켠에 피아노가 있는데, 야무진 에디터H는 이 피아노를 옷장 혹은 액세서리장으로쓰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높고 험난한 계단을 오르면 있는 2층에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내방이다. 높은 나무 천장과 샹들리에가 멋지다. 크기는 작아도 큰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멋진 방은 인턴 에이미의 방이다. 긴 복도부터 성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싶더라니, 방 안쪽엔 십자가와 성모상까지 있다. 멋스러운 장식의 침대가 퍽 사치스럽다. 이 방의 백미는 바로 발코니다. 매일 아침 창 사이로 쏟아져들오는 햇볕과 파란 하늘. 산과 바다.
우리 집은 7명으로 북적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 먼 곳에서 살게 되다니, 내 인생은 정말 비현실적이구나. 지금 이 순간, 에디터H와 내일 나갈 기사와 영상 콘텐츠를 기획하느라 몸도 마음도 건조하게 메말라가는 시간에도 열발자국 떨어진 부엌에서는 박PD와 인턴 에이미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샐러드용 야채를 헹구는 물소리, 나무 도마 위를 통통 튀는 움직이는 칼소리. 무언가가 구워지고 볶아지는 냄새. 아, 이곳은 나의 집이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포르투의 집이 눈앞에 그려진다. 어둡고 가파른 계단 그 위로 동그란 모양으로 해를 내리쬐던 창, 옆집 할머니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흘러나오던 테라스, 오래된 집에서 느껴지는 향기. 한 달 동안 머물게 될 이 집도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겠지. 우리는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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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