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시칠리아 사람들

까만 머리의 우리가 궁금해요?
까만 머리의 우리가 궁금해요?

2019. 10. 07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섬. Sicilia. 이탈리아어는 잘 모르지만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발음으로 ‘씨실리아!’하고 외칠 수 있다. 사실 시칠리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채, 아름다운 섬이라는 것만 알고 떠나왔다. 이 이국적인 발음만큼이나 한국인에게는 낯선 섬이다. 이 먼 곳을 무턱대고 떠난 내가 이상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확신이 들었다.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시칠리아는 좀 특별하다. 유럽 같지만 아프리카의 문화가 묻어나고, 복합적이다. 이탈리아 반도 아래 위치한 지중해의 가장 큰 섬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수많은 문화권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냥 이탈리아 남부의 섬이라고 표현하는 건 부족하다. 시칠리아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게 옳겠다. 흔히 생각하는 이탈리아 본토의 세련된 이미지와는 판이할 정도다. 

바다도 아름답고 팔레르모 시내의 오래된 건물도 아름답지만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해 경탄이 나올 정도는 아니다. 시칠리아의 진짜 매력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 시칠리안이다. 

오기 전에 이탈리아에서의 한 달을 함께 보낼 인턴을 모집했는데, 그 중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교수님이 있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으시대길 좋아하며, 순박하고, 호기심이 많다더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모두가 우리를 궁금해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러 가면 모든 사람이 쳐다보는 통에 모니카 벨루치가 된듯한 느낌을 받는다. 후후. 그래, 주책이다.

할머니는 계속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시칠리아에서의 첫 날. 에어비앤비 숙소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장을 보러 나섰다. 버스 정류장부터 시칠리안들의 살가운 오지랖은 시작된다. 에디터M의 탈색머리와 비슷한 색의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건다. 영어는 못하신다. 하지만 간절하게 뭔가를 알려주려는 바디 랭귀지가 계속된다. 에디터M은 생전 처음 듣는 이탈리아어 사이에서 눈치껏 필요한 단어를 캐치해낸다. 할머니가 알려준 정보는 이러하다. 우리가 구글맵으로 보여드린 슈퍼마켓은 ‘꽁까 도-르’라는 쇼핑몰 안에 위치해있고, 614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되는데 이 버스는 순환 버스라는 것이다. 에디터M이 순환 버스를 표현하기 위해 양손을 뱅글뱅글 돌리니 할머니가 외친다. Si! 그라찌에, 처음 만난 할머니. 

시내에 나가니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흘겨보는 느낌은 아니고, 궁금해서 죽겠다는 눈빛이다. 말이라도 한 마디 걸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이 까만 머리들은 대체 무슨 일로 이 동네에 장을 보러 왔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노부부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 “
“우린 한국에서 왔어.”
“북쪽? 남쪽?”
“싸우스 코리아야.”
“휴가야?”
“뭐, 일종의? “
(사무실 옮겨서 한 달살기라고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니네는 왜 몬델로에 왔니? “
“여기온 이유는… 바다가 아름다우니까?”
“혹시 니네 시칠리아 음식 먹어봤니? 시칠리아 음식은 세계 최고야.”

1분 남짓의 짧은 대화에서도 그들의 진한 국뽕 맛을 엿볼 수 있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드론을 날리고 있으려니 장신의 시칠리아 남자가 다가온다. 흠칫 놀랐지만 말투가 상냥하다. 잘생긴 건 덤이다. 이 동네가 고향이지만 캐나다에서 오래 거주해 영어도 유창하다. 우리가 한 달이나 머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뭐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란다. 제일 가까운 식료품점은 어딘지, 맛있다는 이탈리아식 제스처는 무엇인지,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집은 어딘지. 순식간에 현지인을 만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고급 정보를 획득했다. 그는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메시지를 보내라고 인스타그램까지 알려주고 떠났다. 

이런 일은 계속됐다. 하루에 두 번 씩 찾는 단골 카페에서는 풍채 좋은 직원 아저씨의 오지랖이 발휘된다. 아란치니를 주문해 먹는 우리를 보더니 슬며시 다가와 손사레를 친다. 아란치니는 포크나 나이프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손에 들고 먹어야 맛있다고 먹는 시늉까지 해보인다. 다른 곳에서는 아란치니라고 부르지만, 오직 시칠리아에서는 ‘아란치나’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배웠다. 시칠리아 전통 디저트의 이름을 읊으며 이게 모두 이 땅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모습이 싫지 않다. 기분 좋은 참견이다.

단골 카페의 페드로

매일 같이 찾아오는 동양인 손님이 신기했는지 너넨 무슨 일을 해? 하고 묻는다.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있다고 했더니 영상을 보여달란다. 노트북을 열어 몬델로 해변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박수를 짝, 친다. 그리곤 “내일 또 보자”라면서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이 사람들한테는 이런 살가움이 자연스럽게 스며있다. 흔히 말하는 시골 사람스러운 정서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낯선 사람을 궁금해하는 방식도 솔직하고 투박하다. 눈을 마주치며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왜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묻고, 자랑스럽게 시칠리아에 대해 떠들어댄다.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다. 무례하지만 귀엽고, 당황스럽지만 즐겁다. 서울에서도 한참 떨어진 낯선 땅에서 괜히 환영받는 기분.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아침 산책 길에 ‘본조르노’를 주고받는 일상. 평생 화려한 것들과 도시를 동경하며 살아왔는데, 지금 나는 몬델로 해변의 한적한 시골 생활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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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