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나는 여행자입니까

저는 에디터B입니다
저는 에디터B입니다

2019. 10. 07

나는 떠내려가듯 살고 있다. 마치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목적 없이 산책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비소설에서 자기계발 코너로, 베스트셀러에서 스테디셀러로. 아버지는 일찌감치 나의 성향을 알아채고 이런 말을 했다. “석준아, 목적이 있으면 항해고, 목적이 없으면 표류다” 어떤 것에도 호기심을 보이는 내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였던 걸까. 무엇을 하든 목표를 정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나는 지금 시칠리아에 있다. 누구보다 도시의 세속적인 삶을 사랑하는 내가 바다와 하늘과 파스타밖에 없는 이곳에 있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아침 7시, 혼자 해변을 걸으며 아버지의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석준아, 목적이 있으면 항해고, 목적이 없으면 표류다” 아버지의 기준에 따르자면 나는 지금 표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뚜렷한 목적 없이 시칠리아에 왔으니까. 아니, 흘러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말에 반문하고 싶어진다. 목적 없는 삶은 잘못된 겁니까.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디에디트에 흘러들어온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소개가 늦었다. 나는 디에디트에서 에디터B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김석준이다. 주된 업무는 콘텐츠 기획과 콘텐츠 제작이다. 콘텐츠라고 포괄적으로 표현했지만, 대부분은 글이다. 글 말고는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계속 글을 써왔다. 잘 쓰든 못 쓰든 계속 써왔다. 유희를 위해 소설을 썼고, 자아실현을 위해 에세이를 썼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 기사를 썼다. 오랫동안 글을 썼다면 꽤 잘 쓸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오래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처음엔 이랬다. 마음 속에 글자가 쌓이면 키보드에 앉아 그것들을 토해냈다. 정말 그건 토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몸 속에 축적되는 글자를 가만히 품고 있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몇년이 흐르자 에디터가 되었고 이 매체 저 매체를 다니며 기사를 썼다. 그때의 꿈은 88년생 중에 가장 유명한 에디터가 되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는 선배에게 연락을 받았다. “석준아, 혜민이랑 같이 저녁 먹자” 첫 직장 선배, 경화 선배의 연락이었다. 그는 H라고도 불린다. 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는 디에디트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딘가에 속해서 글을 쓰는 건 디에디트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여러 매체를 다니며 텍스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팅에서 만나는 홍보대행사, 인터뷰하는 배우, 동료 기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유튜브의 영향력에 대해 말했다. 아무도 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멸종 위기 동물종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니 글쟁이로서는 디에디트가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한다. 몇년 뒤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펜을 놓고, 대신 카메라 앞에 서겠지.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사진 기자가 텍스트 기자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고, 비디오가 라디오를 변방으로 몬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 나는 변방에 있고 싶지 않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고 싶지도 않고, 멸종되고 싶지도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시칠리아로 한 달 살기를 떠나자” 뜨거운 바람이 부는 8월 어느 날, 시칠리아라는 낯선 단어를 듣자 나는 내 삶이 참 버라이어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표류하는 중일까, 항해하는 중일까. 사실 중요한 순간이면 그 질문을 떠올리지만, 매번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항해하는 중이다. 처음 글을 썼던 순간부터 모든 것은 항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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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