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어차피 일할 거라면

낯선 사람과 떠나기로 했다
낯선 사람과 떠나기로 했다

2019. 10. 07

안녕, 시칠리아에서 에디터H다. 정신을 차리니 이탈리아 남쪽의 섬, 시칠리아였다. 그래 맞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유럽의 낯선 도시로 사무실을 옮겨 한 달 동안 살아볼 작정이다. 함께 떠나온 일행은 모두 일곱 명. 예민한 나와 화가 많은 에디터M, 묵묵히 일하는 에디터B, 걱정이 많은 권PD, 갑자기 휩쓸려 따라온 박PD. 그리고 한 달 동안 시칠리아 인턴으로 자원한 잭과 에이미까지. 사람이 북적이지만 주로 목소리를 높이는 건 나와 에디터M이다. 입이 많아서 채워도 채워도 냉장고가 금세 비어버리고, 들어도 들어도 할 이야기가 넘쳐난다. 

우리가 있는 시칠리아 섬은 이탈리아 본토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문화를 가진 곳이다. 그 중에서도 팔레르모 외곽의 바닷가 마을인 몬델로에 집을 구했다. 제주도로 따지면 협재 해수욕장이랄까? 도심에선 꽤 떨어진 곳이라 변변한 마트 하나 없고, 가진 건 오로지 아름다운 바다 풍경 뿐이다. 벌써 10월이건만 바닷가엔 수영복을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따끈하게 구워진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 중에서 내 피부는 유독 희다. 희여멀건한 동양인이 지나가는 것 만으로도 동네가 술렁일 만큼 조용한 곳이다. 이 심심한 시골 생활이 즐거운 건 일곱 명의 검은 머리 동료들 덕분. 아 정확히 말하자면 여섯 명의 검은 머리와 한 명의 노랑 머리겠다. 

작년에 포르투로 사무실을 옮겨 훌쩍 떠날 때만 해도 서울을 떠나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익숙하고 지긋지긋한 것에게 등을 돌리고 작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때만해도 고작 세 사람이었다. 떠나기로 결정하는 것도 훨씬 쉬웠다. 나, 에디터M, 에디터 기은. 오붓하지만 고단했다. 

두 번째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처음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다. 다시 시칠리아로 떠나서 일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년에 했던 콘텐츠의 반복이 아닐까. 우리 글을 읽는 사람들이 지겨워하면 어쩌지. 어쩌면 그냥 내 욕심이 아닐까.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선택하고 나서 줄곧 가슴 속을 떠나본 적이 없는 불안이 점점 커졌다. 작년에 포르투에서 만든 <어차피 일할 거라면> 첫 번째 영상 콘텐츠를 다시 플레이해봤다. 수 백개의 댓글을 하나 하나 다시 읽었다.

한 번도 댓글을 단 적이 없는데 처음 달아봐요.
작은 용기를 얻고 갑니다.
저도 다 때려치우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없어서 대리만족 합니다.
누구나 비슷하게 힘들어하고 사는 구나 싶어서 위로받고 갑니다.
다시 가슴 설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튜브 구독자 댓글 중

“괜찮겠어? 모르는 사람이랑 한 집에 사는 거 쉽지 않아.”

나의 예민함을 아는 사람들은 우려를 표했다. 그러게, 나도 걱정이 많았다. 먼 타지까지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 떠나는 게 두렵기도 했다. 어떤 사람일지, 어떤 변수가 있을지 하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는 기대도 컸다. 인턴을 뽑자, 라고 결정한 뒤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사실은 컨셉에 가깝다. 정말로 함께 일 할 사람을 찾는다기 보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이탈리아의 낭만도 동경하지만, 현실적인 고단함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디에디트의 글을 읽고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고민을 함께 풀어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인턴을 뽑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로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무려 400여 명의 사람들이 지원했다.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고, 모두 근사하고 캐릭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을 만나보는 과정도 즐거웠다. 우리 보다 스무살 쯤 많은 ‘꽃중년’ 언니와의 대화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인턴으로 함께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며 밝게 웃는 쾌활함. 모두 영상에 담아두었다. 후후.

그리고 힘들게, 힘들게 두 명의 인턴을 뽑았다. 20대 후반, 비슷한 또래의 잭과 에이미. 짹짹거려서 ‘잭’이라는 가볍고도 진중한 남자와 하루종일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며 백수가 체질이라고 배시시 웃는 에이미.

잘하는 건 많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내게 잘 맞는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물음표를 간직한 두 사람. 처음 만나는 순간 이 사람들과 떠나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일주일째, 우리는 괜찮은 하우스 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라면 한 봉지를 두고 다투며 깔깔대고 웃기도 하고, 치열하게 일하기도 하고,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부디 디에디트의 두 번째 <어차피 일할 거라면>을 다정한 눈으로 지켜봐주시길. 그리고 마음 속으로 동참해주시길.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간직한 일곱 명의 반짝이는 사람들이 몬델로 해변의 이층집에 모여 즐겁게 고민하고 있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좀 더 근사하게 살 순 없을까. 이 짧고 뜨거운 한 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