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시칠리아에서 에디터H다. 정신을 차리니 이탈리아 남쪽의 섬, 시칠리아였다. 그래 맞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유럽의 낯선 도시로 사무실을 옮겨 한 달 동안 살아볼 작정이다. 함께 떠나온 일행은 모두 일곱 명. 예민한 나와 화가 많은 에디터M, 묵묵히 일하는 에디터B, 걱정이 많은 권PD, 갑자기 휩쓸려 따라온 박PD. 그리고 한 달 동안 시칠리아 인턴으로 자원한 잭과 에이미까지. 사람이 북적이지만 주로 목소리를 높이는 건 나와 에디터M이다. 입이 많아서 채워도 채워도 냉장고가 금세 비어버리고, 들어도 들어도 할 이야기가 넘쳐난다.
우리가 있는 시칠리아 섬은 이탈리아 본토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문화를 가진 곳이다. 그 중에서도 팔레르모 외곽의 바닷가 마을인 몬델로에 집을 구했다. 제주도로 따지면 협재 해수욕장이랄까? 도심에선 꽤 떨어진 곳이라 변변한 마트 하나 없고, 가진 건 오로지 아름다운 바다 풍경 뿐이다. 벌써 10월이건만 바닷가엔 수영복을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따끈하게 구워진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 중에서 내 피부는 유독 희다. 희여멀건한 동양인이 지나가는 것 만으로도 동네가 술렁일 만큼 조용한 곳이다. 이 심심한 시골 생활이 즐거운 건 일곱 명의 검은 머리 동료들 덕분. 아 정확히 말하자면 여섯 명의 검은 머리와 한 명의 노랑 머리겠다.
작년에 포르투로 사무실을 옮겨 훌쩍 떠날 때만 해도 서울을 떠나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익숙하고 지긋지긋한 것에게 등을 돌리고 작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때만해도 고작 세 사람이었다. 떠나기로 결정하는 것도 훨씬 쉬웠다. 나, 에디터M, 에디터 기은. 오붓하지만 고단했다.
두 번째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처음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다. 다시 시칠리아로 떠나서 일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년에 했던 콘텐츠의 반복이 아닐까. 우리 글을 읽는 사람들이 지겨워하면 어쩌지. 어쩌면 그냥 내 욕심이 아닐까.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선택하고 나서 줄곧 가슴 속을 떠나본 적이 없는 불안이 점점 커졌다. 작년에 포르투에서 만든 <어차피 일할 거라면> 첫 번째 영상 콘텐츠를 다시 플레이해봤다. 수 백개의 댓글을 하나 하나 다시 읽었다.
한 번도 댓글을 단 적이 없는데 처음 달아봐요.
유튜브 구독자 댓글 중
작은 용기를 얻고 갑니다.
저도 다 때려치우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없어서 대리만족 합니다.
누구나 비슷하게 힘들어하고 사는 구나 싶어서 위로받고 갑니다.
다시 가슴 설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겠어? 모르는 사람이랑 한 집에 사는 거 쉽지 않아.”
나의 예민함을 아는 사람들은 우려를 표했다. 그러게, 나도 걱정이 많았다. 먼 타지까지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 떠나는 게 두렵기도 했다. 어떤 사람일지, 어떤 변수가 있을지 하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는 기대도 컸다. 인턴을 뽑자, 라고 결정한 뒤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사실은 컨셉에 가깝다. 정말로 함께 일 할 사람을 찾는다기 보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이탈리아의 낭만도 동경하지만, 현실적인 고단함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디에디트의 글을 읽고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고민을 함께 풀어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인턴을 뽑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로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무려 400여 명의 사람들이 지원했다.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고, 모두 근사하고 캐릭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을 만나보는 과정도 즐거웠다. 우리 보다 스무살 쯤 많은 ‘꽃중년’ 언니와의 대화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인턴으로 함께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며 밝게 웃는 쾌활함. 모두 영상에 담아두었다. 후후.
그리고 힘들게, 힘들게 두 명의 인턴을 뽑았다. 20대 후반, 비슷한 또래의 잭과 에이미. 짹짹거려서 ‘잭’이라는 가볍고도 진중한 남자와 하루종일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며 백수가 체질이라고 배시시 웃는 에이미.
잘하는 건 많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내게 잘 맞는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물음표를 간직한 두 사람. 처음 만나는 순간 이 사람들과 떠나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일주일째, 우리는 괜찮은 하우스 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라면 한 봉지를 두고 다투며 깔깔대고 웃기도 하고, 치열하게 일하기도 하고,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부디 디에디트의 두 번째 <어차피 일할 거라면>을 다정한 눈으로 지켜봐주시길. 그리고 마음 속으로 동참해주시길.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간직한 일곱 명의 반짝이는 사람들이 몬델로 해변의 이층집에 모여 즐겁게 고민하고 있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좀 더 근사하게 살 순 없을까. 이 짧고 뜨거운 한 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