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파트 키즈 출신 무주택자 객원 필자 에리카팕이다. 아파트 키즈 시절에는 아파트라는 곳에 누구나 살(live) 수 있고, 때가 되면 나도 살(buy)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아파트라는 곳은 생각보다 닿기 어려운 평범함이라는 사실을. 그래도 아파트 키즈들은 기억한다. 수풀처럼 무성한 녹음이 우거진 단지 안에 참기름 냄새와 쾌쾌한 지하 냄새가 고여 있는 아파트 상가, 그리고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올망졸망 모여 앉아 입에 욱여넣던 매콤 달콤한 떡볶이.
비록 아파트를 살 수는 없으나 남들 일하는 시간에 맛있는 곳들을 찾아 먹으러 다니는 ‘요리먹구가’로 자란 어른으로서 유년기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 그리고 아파트와 함께 나이도 들어가고, 맛도 들어간 떡볶이집 네 곳을 다녀왔다.
[1]
압구정 현대아파트
신사상가 떡볶이집 쌍둥이네
압구정역 1번 출구를 따라 곧게 걸어가면 그 길의 양 옆으로 즐비한 건물이 모두 현대아파트다. 강남 아파트의 대명사인 만큼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그 단지의 규모만도 엄청난데 레고처럼 늘어선 건물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외관에서부터 오랜 세월의 포스를 자랑하는 신사상가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일까 입구를 찾지 못했다면 부루마불의 호텔 피규어를 떠올리면 된다. 신사상가는 건물 가장 정중앙에 입구가 있다. ‘어디서 꼬수운 냄새가 나는거지?’ 라면서 후각을 따라 걷다 보면 정중앙에 문이 보인다. 바로 1층 직진해서 보이는 방앗간 좌측에 바로 ‘쌍둥이네’라고 큰 간판이 있다.
점심시간에 가니 평일에도 줄이 있었다. 원격 줄 서기 따위는 없다. 줄 선다고 이름을 적는 판도 없다. 바로 그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줄을 선 사람들은 단출한 메뉴판 안에서 어떤 조합으로 오늘의 식사를 조합할지 기대에 부풀어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떡볶이가 윤기 나게 볶이고 있는데 줄 좀 선다고 다른 메뉴로 갈아탈쏘냐!
매장 내부는 작지만 생각보다 많은 손님을 수용한다. 벽면에 걸린 사인을 보면 왜인지 연예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연예인의 연예인이라 불릴만한 배우의 사인, 강남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연예인의 진심 어린 사인이 그득하다. 나는 배우 장동건의 사인 아래에 앉아 떡볶이를 먹었다.
떡볶이와 김말이를 시켰는데 만두 하나를 서비스로 넣어주셨다. 맛을 보니 맵지 않고 달큰한 밀떡 떡볶이였다. 그저 달기만 한 맛이 아니라 어린 시절, 그 시절 입맛을 지켜주는 맛이랄까. 왜 그 많은 사인들이 예전 그 맛 그대로라고 하는지 알 것 같은 맛이다. 단순한 맛인데 몇 시간이 지나 자꾸 생각나는 맛이다. 오늘 소개하는 네 곳의 떡볶이집 중 개인적으로 가장 내 취향이었지만 좀처럼 평일 직장인이 맛보기 좋은 운영시간은 아니라 소개하면서도 멋쩍다. 평일, 토요일 17시에 딱 닫아버리는 워라밸 좋은 집이기 때문. 지난번 만두집 아티클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집은 한 번쯤 연차를 내고 평일 점심에 와보는 것도 좋은 문화 탐방이자 현대인의 로망이 될 것 같은 그런 집이다. 떡볶이를 먹고 난 후 신사상가의 오래된 방앗간과 그리고 그 시절 미제, 일제 수입품을 들여오던 오랜 가게들을 둘러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라 장담한다.
- 주소 :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29길 72-1 신사상가
- 운영시간 : 10:00~17:00 (매주 일요일 정기 휴무)
[2]
충정아파트
철길 떡볶이
충정로를 지나는 버스를 탈 때면 늘 궁금했다. 저 낡다 못해 늙어가는 초록색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관심을 갖고 찾아보니 1931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이자 한국 근대 역사와 궤를 같이 한 상징적인 아파트라고. 한때는 미군들을 상대로 한 호텔이었고, 한국 화가 중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을 그린 김환기 작가님도 한때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충정아파트의 아파트 상가는 아니지만 지근거리에 오래된 떡볶이집이 있다. 바로 철길 떡볶이다.
식객 허영만 선생님도 이미 다녀간 곳으로 이미 오래된 맛집으로 정평이 난 곳이지만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에 나온 떡볶이 집으로 더 유명세를 탄 곳이다. 길복순 역의 전도연 배우와 그의 상사로 나오는 설경구 배우가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 함께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한 장면이다.
메뉴판을 보고 쪽지에 메뉴와 수량을 적어 내는 비대면 방식 주문이다. 아무래도 코로나 시절보다도 훨씬 이전 사장님 혼자서 수많은 손님을 응대한 짬에서 나오는 시스템이리라. 주문을 하고 바깥 테라스로 나가면 정말 바로 옆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옆에 테이블이 있다.
떡볶이 1인분, 못난이 튀김 1, 꼬마김밥 1, 오뎅 1을 시켰다. 이렇게 욕심껏 플렉스해도 도합 만원이 안된다는 것이 분식집의 호사 아니겠는가.
출렁일 정도로 기다란 밀떡과 사장님이 직접 담근 고추장이 만나 합을 이루는 떡볶이다. 앞서 소개한 쌍둥이네는 달큰한 맛이 가장 강한 악센트로 다가왔다면, 이 집의 떡볶이는 여전히 모든 세대가 아우를 수 있는 달큰한 맛이 베이스가 되지만 맵싸한 맛에 더 악센트가 있는 떡볶이다. 소스 맛의 지분을 대략적인 백분율로 말하자면 매콤함 70% 달콤함 30%으로 이뤄졌다고나 할까? (당연히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함께 주문한 못난이 튀김의 매력이 상당했는데, 이게 못났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부드러운 튀김옷 안에 당면이 소복하게 들어있는데 쪼개어 떡볶이 국물과 찍어먹으면 매콤 달콤한 포근함을 입에 들이는 맛이다. 철길떡볶이에 간다면 많은 메뉴 사이에서 떡볶이와 못난이튀김은 꼭 주문하기를 권한다.
-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5-6
- 운영시간 : 평일, 일요일 11:00 ~ 20:00 (토요일, 공휴일 휴무)
[3]
구일 주공아파트
낙원 떡볶이
구로 1동에 사는 사람들은 구로구가 아니라 구일섬에 산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안양천 위로 다리 형태로 늘어진 구일역을 지나 덩그러니 섬처럼 떨어진 주거단지가 바로 구로1동 구일섬이다. 일반 기업이 지은 아파트와 한국주택공사가 지은 주공 아파트들이 다채롭게 들어서 있지만 구일섬에는 특이한 이름의 아파트가 있다. ‘현대 연예인아파트’. ‘연예인협회 조합’에서 만들어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고. 물론 지금까지도 연예인들이 사는지는 모르겠다. 구로 현대 연예인아파트와 구로 주공 2차 아파트 사이 신영상가에는 낙원 떡볶이라는 곳이 있다. 이 동네 사람들 말로는 숨은 인생 맛집이라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장소이자 또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유년기가 왕성하게 진행되는 무대라는 생각이 단박에 드는 장소다. 학원, 문방구, 교회 등 아파트 상가 특유 요소들이 다정하게 오밀조밀 가득 차 있는 상가 건물 측면에 특유의 얄궂은 폰트와 작게 쓰인 상단의 ‘우리들의…’ 멘트가 벌써부터 아련하게 추억으로 이끄는 듯하다.
그나저나 왜 떡집이나 떡과 관련된 이름의 상호는 ‘낙원’이 많을까? 꽤나 뼈아픈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일합방 시절, 수라간에서 쫓겨난 나인, 궁녀들이 근처에 있는 낙원동에 모여서 궁중떡을 만들어 팔며 ‘낙원떡집’이 많아졌다고 한다. 상호에 ‘낙원’을 달으셨겠다라…그럼 쌀떡을 쓰시겠군? 기대는 적중했다.
이 집 떡볶이 떡은 독특한 컷팅 방식이 눈에 띄는데, 가래떡이 가로로 썰려 있다. 소스는 역시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맛인데 한쪽을 고르자면 맵칼한 맛이 더 인상을 주는 맛이다. 존재감 있게 들어가 있는 고춧가루가 칼칼한 맛으로 밥을 부른다. 그래서 김밥과 필시 궁합이 좋을 소스의 맛이다. 이 집 떡볶이는 어묵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다른 떡볶이에 들어가는 얇은 판 어묵이 아니라 두툼한 별 모양의 품질 좋은 어묵을 사용한다.
가게에 들어서면 떡볶이도 떡볶이지만 참기름 냄새가 너무 고소해서 김밥을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별 것 없는 일반적인 야채 김밥인데 입에 넣으면 무언가 가득하다. 밥이 가득한 것이다. 속을 그득하게 채워 평수를 늘리는 요새 김밥과는 달리 이 집의 김밥은 밥! 쌀이 주인공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난스럽고 알록달록한 메뉴판에서 국내산 표기만큼은 궁서체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은 아담한 가게 곳곳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커피 관련 기물들이 틈틈이 보였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데, 사장님의 커피 사랑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곳들 중 가장 분위기가 묘하고도 즐거웠는데, 재즈에 맞춰 나른하게 나풀거리는 쿠바국기를 바라보며 떡볶이와 김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한 번쯤 사람들이 많은 힙한 곳이 질릴 때, 그 어떤 독특한 나들이의 행보를 꿈꿀 때 도심 속의 섬으로 떠나보자. 하와이도 아니고 제주도도 아닌 구일섬의 낙원으로.
- 주소 : 서울 구로구 구일로4길 30 1층
- 운영시간 : 평일 12:00~ 21:30 / 주말 12:00 ~ 19:00
[4]
장미아파트
장미상가
새로운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설 때, 분양 카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문구는 ‘단군 이래 최대 단지’라는 말이다. 장미 아파트는 3402세대로 1979년 준공 당시, 단군 이래 최대 단지였으리라. 그 많은 세대수만큼 그 많은 세대를 채우는 다양한 세대들의 식도락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장미상가는 가장 복잡하고 가장 다채로운 가게들로 꾸려진 상가를 자랑한다. 그 크기도 상당해서 A동, B동, C 동 3개의 상가로 이뤄져 있어 주민뿐 아니라 인근 직장인들의 점심, 저녁, 회식 장소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맛집들이 그득하다.
장미상가 B동 지하에는 분식의 길이 있다. 모두 유명해서 어느 집을 소개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두 곳을 소개한다.
[만남분식]
만남분식은 분식집들이 있는 복도에서 판 떡볶이를 널어놓고 유혹하는 집이다. 운 좋게 교복을 입고 얼굴에 어여쁜 열꽃이 핀 학생들이 삼삼오오 들러 컵볶이를 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아직 현역들이 활동하는 곳이라니! 여기는 먹어봐야 한다.
모듬 떡볶이를 시켰더니 떡볶이와 순대, 야끼만두, 삶은 계란이 그득한 한 접시를 받았다. “순대도 드려?”라고 사장님이 물으시는 것으로 봐서는 기호에 따라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눈치였다. 순대는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했다. 맛집만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이런 공장 순대는 오히려 오랜만이고 반가웠다. 떡볶이도 역시나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맛. 아 원래 밀 떡볶이는 이런 것이지 싶은 심심하고 달큰한 맛이다.
꽝꽝 얼린 물이 있고, 6시 내 고향이 본방 사수되는 집. 월급만 안 오르는 줄 알았더니 이 집의 떡볶이 가격도 안 올라서 어쩐지 고맙고 어쩐지 미안한 그런 집이다.
- 주소 :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12 장미 B상가 50호 지하 1층
- 운영시간 : 평일, 토요일 10:00 ~ 20:00 (일요일 휴무)
[환희분식]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장미상가 분식집들의 히트 메뉴는 ‘쫄라’라는 메뉴다. 모두 쫄라를 팔지만 가장 유명한 집은 장미상가 B동 지하 1층 가장 안쪽에 위치한 환희분식이다. 최근 쯔양이 다녀가서 더 유명해졌다고.
쫄라의 맛은 떡볶이 소스에 쫄면 면이 곁들여진 라볶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그런데 이게 또 다 아는 것들이 모였는데 색다른 맛이랄까. 당연하게도 쫄면의 식감은 라면의 식감과 다르다. 탄성이 강한 쫄면과 꼬들거리는 라면이 같은 부드러움으로 얽히고설켜 다른 식감, 같은 맛을 자랑한다. 아마도 쫄라는 혼분식 장려 시대가 낳은 최대의 혼합체가 아닐까?
가능한 이 집에서는 볶음밥을 꼭 시켜주셨으면 한다. 이 볶음밥의 이름은 환희볶음밥. 환희가 일어나는 맛이다. 김치가 들어간 듯 하지만 과연 김치만 주인공은 아닌 볶음밥. 콩나물과 소복한 김가루, 그리고 치즈가 한데 이루어 환희의 신비를 이룬다. 너무 먹음직스럽다고 입에 성급하게 넣었다가 크게 화를 당할 수 있으니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한 입 하시기를.
- 주소 :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12 장미 B상가 45호 지하 1층
- 운영시간 : 평일 10:00 ~ 21:00 (주말 휴무)
한국인에게 떡볶이는 한철 인기가 있다 사라지는 메뉴가 아니라 하나의 카테고리다. 궁중 떡볶이를 시작으로 기름 떡볶이, 신당동 떡볶이, 즉석 떡볶이, 추억이 떠오르는 옛날 떡볶이, 쌀 떡볶이, 밀 떡볶이, 떡볶이 코트(?), 비교적 요새 데뷔한 신인 로제 떡볶이까지. 시대와 지역, 또 각 가정에 따라 많고 다른 얼굴의 떡볶이들이 각자의 자리를 꼿꼿하게 지키고 있다.
오늘은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들만큼 오래된 역사를 함께한 추억의 떡볶이 집들을 소개해 봤다. 혹, “서울에 이 많은 아파트 중에 내가 살 수 있는 아파트는 왜 한 칸이 없냐!”라고 푸념을 하고 싶어 진다면 “아파트가 이렇게 많으니 그만큼 맛 좋은 떡볶이집도 많겠구나. 좋다! 지화자!”라고 생각하며 떡볶이 투어를 떠나도 좋겠다. 혹은 아파트 임장을 다닌다고 생각하며 다녀보는 방법도 추천한다. 팔짱을 끼고 이렇게 말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맛 좋은 떡볶이 집이 있다니… 아주 터가 좋은 아파트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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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팕
요리연구가 라고 스스로 소개할 자신은 없으나 요리를 먹고 가게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서 '요리먹구가'라고 소개한다. 음식 얘기를 하다 보면 자꾸 말이 길어져서 요리 박찬호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