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봄에 아이가 태어나 여름부터 6개월짜리 육아휴직 중이다.
육아휴직을 쓰기 전까지 나는 주로 출퇴근길에 책을 읽었다. 최소한의 내 공간이 보장되고 적당한 생활 소음이 있으며 멀미도 안 나는 지하철은 은근히 책 읽기 좋은 곳이다. 나의 독서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곳에서, 출퇴근길에 읽기 좋은 책을 다섯 권 골랐다.
[1]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
“누구도 내 부고를 나보다 잘 쓸 수 없다.”
난 요즘 ‘내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까먹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고,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정리하고 싶고, 인스타 피드로만 나를 판단할 사람들에게 ‘그렇지는 않아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근데 쉽지가 않다. 자기검열 때문이다. “내 주제에? 누가 궁금해할까? 관종처럼 보이겠지?” 고민만 많아져서 온갖 방법을 모색 중이다. “일단 나만 보는 블로그에 마구잡이로 끄적여 볼까? 내 얘기가 아닌 척 소설로 써볼까? 글이 부담스러우면 유튜브를 해볼까?” 며칠 전엔 유튜버 이연 님의 조언대로 난생처음 인스타 라이브도 켜봤다. 30초 만에 꺼버렸지만…
책도 몇 권 샀다.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 저자는 45년간 글쓰기 워크샵을 운영해 왔단다. <상황과 이야기>는 부제가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다. 가장 먼저 읽은 건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20년 넘게 부고 전문기자로 활동한 저자의 이력 때문이다. 그에게 부고 기사란,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수단이다.
남의 인생도 이야기로 만드는데, 내 인생은 왜 못해? 실제로 저자는 남의 부고를 쓰는 틈틈이 자기 부고를 쓰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가능한 한 빨리 기록을 시작해서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글을 써보자.”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사람인데, 내 부고를 남이 대충 쓴 글로 남기고 싶진 않으니까. 생각나는 대로 내 이야기를 스마트폰에 아무렇게나 녹음하기 시작했다. 내 부고를 쓴다는 마음으로. 회사 일에 내 이야기가 흐려지고 있다면, 출퇴근길에 이 책을 읽어보시라. 마음이 아주 조급해진다.
-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 | 제임스 R. 해거티 | 인플루엔셜 | 1만 8,000원
[2]
<궁금한 건 당신>
“전 듣기만 한 걸요. 선생님 안에 다 있던 이야기예요.”
예전부터 유재석은 의자 두 개 놓고 마주 앉아 떠드는 노상 토크쇼를 하고 싶어했다. 보도블럭 위에서 만난 시민들과 퀴즈를 푸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오래 이어가긴 힘든 컨셉이었다. 모두가 성공한 사람의 말과 행동에 목마른 시대에, 길 가던 아무개와 나눈 몇 마디로 예능 한 편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초창기 컨셉을 과감히 포기한 후로 유퀴즈는 승승장구 중이다.
유재석은 아쉬울까? 나는 조금 아쉽다. 성공한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깨닫는 거 물론 좋지만… 대화는 꼭 유명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거기서 더 신선한 재미와 감동이 나올 거라 믿으니까. 설마 하는 사람에게 이 책 <궁금한 건 당신>을 내민다. “이 사람은 해냈어요! 유재석도 못 한 걸 이 사람은 해냈다고요!”
책에는 택시 기사, 공인중개사, 세탁소 사장, 포장이사 고수, 청소 전문가, 소개팅남까지, 어쩌다 스쳐 지나갈 법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담겨 있다. 인터뷰가 아니라 대화다. 좋은 인터뷰어가 좋은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묻는다면, 좋은 대화 상대는 그냥 궁금해서 묻는다. 그러다 속으로 실망도 하고, 티 나게 놀라기도 하고, 자기 얘기도 슬쩍(대놓고) 꺼낸다. 대개 인터뷰어가 자기 얘길 많이 하면 거슬리기 마련인데 이 책에선 아니다. 대화라서 그런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안다. 말을 건네준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대답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안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감동했다. 인생이 잘 안 풀릴 때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거기에 힌트가 있을 것 같다. 유재석도 tvN도 못 한 걸 진짜 이 사람이 해냈다.
- <궁금한 건 당신> | 정성은 | 안온북스 | 1만 6,000원
[3]
<명탐정의 제물>
“정의감에 취하기 전에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게 좋아.”
회사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당신에게 출퇴근길 독서를 권한다. 출근길에 책을 읽으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도 전에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성급한 일 욕심을 차단할 수 있다. 퇴근길에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고단했던 업무의 잔상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다.
일 관련 책만 아니라면 뭐든 다 괜찮지만, 아무래도 몰입하기 쉬운 소설이 좋다. 인물이 극한 상황에 처할수록 효과가 배가된다. ‘사이비 교주와 광신도들이 살고 있는 고립된 마을에서 누군가를 구해내야 한다면? 도착하자마자 같이 간 친구가 눈앞에서 총 맞아 죽고 나 홀로 남겨진다면?’ <명탐정의 제물>처럼 살 떨리는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정글 같던 회사가 아늑하게 느껴질지도.
‘그알 레전드’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배경 설정뿐 아니라,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탐정 오토야와 조수 리리코의 관계도 재밌다. 오토야가 헛짚으면 리리코가 바로잡고, 오토야가 좌절하면 리리코가 위로하고. 선배 격인 오토야 입장에선 면이 안 서는 일이지만, 사실 뭐 요즘 회사에도 후배보다 일 잘하는 선배 몇 없잖아?
자꾸 틀리는 데다 조수에게 열등감까지 느끼는 탐정 캐릭터가 신선하다고 느낄 즈음… 이야기가 한 번 꺾이고, 또 한 번 꺾이고, 이제 끝나는가 싶은 순간에 또 한 번 꺾인다. 내가 뭘 읽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추리소설에 기대하는 게 정의나 멋이라면, 이 책은 비추다. 하지만 난장판 속에서 피어나는 고자극 재미를 원한다면, 이 책이 입맛에 맞을 것이다. 회사 스트레스 해소용 책을 찾고 있다면 더더욱.
- <명탐정의 제물> | 시라이 도모유키 | 내친구의서재 | 1만 8,800원
[4]
<오독의 즐거움>
“기술과 천재에 대한 환상은 항상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결혼을 해서인지 주식이 떨어져서인지 경제에 관심이 생겼다. 늘 읽던 에세이나 소설 대신 경제 책을 읽고 싶은데 무슨 책이 좋을지 모르겠다. 무작정 사들인 책을 출퇴근길에 펼치니 도착할 때까지 읽는 시간보다 조는 시간이 더 많다. 꾸역꾸역 책에 적힌 글자를 다 읽어도 덮고 나면 내가 뭘 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반복됐다.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러다 운 좋게 페이스북에서 ‘남궁민’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읽게 됐다. 책 소개 글이 갖춰야 할 2가지를 갖춘, 보기 드문 글이었다. 첫째, 책을 안 읽은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글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읽고 싶어진다. 읽고 싶으나 엄두도 못 냈던 경제 책, 읽었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던 경제 책,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경제 책 이야기가 그의 계정에 가득했다. 며칠에 걸쳐 게시물을 싹 다 읽었다. 길잡이를 찾았다.
<오독의 즐거움>이 다루는 책은 총 46권. 책에 갇히지 않고 멀리 뻗어나갔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는 묘기를 마흔여섯 번 보여준다. 참고로 그는 MBC 라디오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의 단골 출연자다. 쉽고 재밌게 경제 알려주기로 유명한 진행자 이진우는 나의 또 다른 길잡이인데, 그가 보증한다. “사실은 책보다 남궁민 님의 서평이 더 재밌을 때가 많다.” 나처럼 경제 책을 읽고 싶은데 ‘재밌는 경제 책’을 도무지 못 찾겠다면, 일단 <오독의 즐거움>부터 읽어보길 권한다.
- <오독의 즐거움> | 남궁민 | 어바웃어북 | 1만 8,000원
[5]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 2>
“아, 골치 아파. 책이나 읽자.”
뭔가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좀 과하다. 옆에서 보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난 신지도 않을 운동화를 집안 가득 모아두는 사람도, 임영웅을 보겠다고 LA까지 날아가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다. 상관없다. 운동화 커뮤니티나 팬카페 ‘영웅시대’에 모인 사람들끼리 각자의 ‘과한 마음’을 나누면 된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역시 과하다. 옆에서 보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평생 다 읽지도 못할 책을 방 안 가득 모아두고도 하루에 몇 번씩 알라딘에 들어가 새로 살 책을 장바구니에 넣는 나는, 이해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도 내가 과하다는 걸 알고, 나처럼 과한 사람을 보면 반갑다. 이 만화도 반가웠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책에 대한 ‘과한 마음’을 나누는 독서 클럽 멤버들의 이야기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 커뮤니티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에서 제목을 따온 듯한데, 이들은 독서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 따윈 없어 보인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책을 사랑한다. 때론 자기계발서만 읽어온 회원을 하루 만에 추방할 정도로 편협하기까지 하다. 뭔가를 좋아하다 보면 원래 우스꽝스럽고 편협해지는 법. 그 과한 마음이 이 만화의 개그 코드다. 책벌레라고 해서 드립을 모르겠는가. 독서 중독자라고 해서 개그 욕심이 없겠는가.
웹툰 포털에 연재됐던 만화를 묶어 2018년 1권이 출간됐고, 5년 만에 2권이 나왔다. 지나치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그 과한 마음을 나눌 곳이 여기에 또 하나 만들어졌다. 그것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책의 형태로.
- <익명의 도서 중독자들> 1~2권 세트 | 이창현/유희 | 사계절 | 36,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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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