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따듯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면,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딱지를 붙이고 수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떤 계절보다 유독 봄에 한정판이 많이 나오는 건, 아마도 짧게 스치듯 지나가는 속성 때문이겠지.
내가 호가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내사랑 호가든이 체리맛을 선보였다. 맞다. 역시 한정판이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작인 호가든 유자는 구렸다. 이미 오렌지 껍질과 고수로 맛과 향이 북적이는 호가든에게 유자맛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번잡한 맛이었다. 미안, 내가 다 지나간 일로 너무 질척거렸지? 이제 호가든 체리에 집중하자.
일단 디자인은 합격. 레드와 핑크 중간쯤하는 쨍한 컬러가 마음에 든다. 종류는 두 가지 500ml 캔과 330ml 병.
호가든 체리는 따라봐야 그 진가가 나타난다. 잔에 따르고 보니 기분이 확 좋아졌다. 굉장히 예쁜 핑크다. 호가든 로제와 비슷한 것 같아도 엄연히 다르다. 로제가 장미처럼 붉은빛을 띠는 분홍이었다면, 이건 뭐랄까… 발갛게 달아오른 봄처녀의 두 뺨같은 청초한 분홍빛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속살을 가진 맥주를 병이나 캔으로 마시는 건 범죄다. 철컹철컹. 반드시 컵에 따라서 보고, 맡고, 맛봐야 한다.
아쉽게도 거품이 풍성한 편은 아니다. 보글보글 올라왔다가 이내 꺼져버린다. 사진 촬영을 하느라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다하면, 얄팍한 거품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색이 너무 예쁘니까 그냥 로제 와인, 혹은 샴페인이라고 생각하고 즐겨도 좋겠지.
안 달다. 체리맛이고 굉장히 달콤할 것 같은 색인데 전혀 달지 않다. 어떤 음식을 보는 순간 나의 뇌는 그동안 먹었던 수많은 음식들을 조합해 일종의 맛 시물레이션을 하기시작한다. 체리와 핑크. 내 예상은 ‘달콤함’이었다. 그런데 별로 안 달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맛이다. 이런 반전은 언제나 짜릿하다. 더 이상한 건, 혀는 달지 않다고 하는데 코와 머리가 달콤하다고 말한다. 혼란스러우니까 일단 한 모금 더. 그리고 또 한모금. 이거 꽤 중독성 있다. 체리과즙의 달콤한 향 때문에 달지 않은데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호가든은 아래 깔리는 쿰쿰한 맛과, 가볍게 도는 시트러스향을 함께 즐기는 맥주다. 그 간격을 즐기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싫어한다. 호가든 체리는 체리의 맛이 중간에 비어있는 맛을 꽉 채워준다. 호가든 맛에 3D 입체감이 생겼다.
결론적으로 호가든 체리는 꽤 맛있는 맥주다. 솔직히 이 맥주를 일 년 내내 찾을 거라고는 못 하겠다. 하지만 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짧기 때문이다. 호가든 체리도 봄도 지금이 아니면 즐길 수 없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이 봄을 그리고 봄의 맛을 즐기자.
호가든 체리
Point – 즐겨요, 봄은 짧으니까
With – 벚꽃
Nation – 벨기에에서 한국으로 이민
Style – 밀맥주(Witbier)
ABV – 4.9%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