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OTT 구독을 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객원 에디터 임현경이다. 온갖 문화 콘텐츠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정주행’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 긴 이야기에 오랜 시간 몰입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체력과 맑은 정신, 집중할 수 있는 안락한 환경 등 여러 조건이 갖춰져야 하니까. 다가올 연휴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추석 전날부터 개천절까지, 아껴온 연차를 쓴다면 한글날까지도 쉴 수 있으니 ‘각 잡고’ 정주행하기에 딱 좋은 때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영영 미루다 잊어버리기엔 아까운 작품 8편을 소개한다.
[1]
웨이브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
‘박하경 여행기’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박하경이 떠나는 여행이자, 박하경에게로 떠나는 여행 이야기.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하경(이나영)은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여행을 떠난다. 해남, 군산, 부산, 속초, 대전, 서울, 제주, 경주… 마실 나가듯 가벼운 차림으로 훌쩍 떠나온 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별별 사람을 만나고 별별 일을 겪는다. 옛 제자를 만나 잊었던 과거의 마음을 되찾기도 하고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하경은 여행이 ‘쓸데없는 일’이라 말한다. 그래서 즐겁다고.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걸까,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 하경이 어디론가 향하는 기차에서 ‘미치광이 여행자’를 생각하며 남긴 의문이 답이 되어 돌아오는 순간이다. 여행자는 정말로 사라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라지고 싶지 않아서 떠난다. 어딘가에 쓰이지 않아도 되는 오롯한 나를 만나러. 그러다 ‘간혹 어떤 순간들을 실감’하러. 하경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얼른 나만의 여행기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 연출 | 이종필
- 각본 | 손미
- 출연 | 이나영, 구교환, 길해연, 박세완, 선우정아, 신현지 외
- 총 8부작
[2]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바쁜 워킹맘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늘 딸에게 죄책감을 갖는 에이미(앨리 웡), 장남의 책임감과 의무감에 짓눌린 어깨로 벼랑 끝에 선 대니(스티븐 연). 두 사람은 어쩌다 ‘로드 레이지(Road Rage)’를 벌이고, 이후 일상 중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상대방에게 화풀이를 한다. 차에 낙서하거나 나쁜 리뷰를 남기던 두 사람의 유치한 복수는 갈수록 폭력적이고 잔인한 범죄로 번진다. 에이미와 대니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나락에 빠지고 나서야 너무도 닮은 서로를 마주하며 ‘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지’를 생각한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 이민 2세대, 그러니까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외모 때문에 외국인이라 오해받고, 부모가 가진 다른 문화와 언어에 영향을 받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야기다. 사회에서 근면성실하게 ‘아메리칸 드림’을 증빙하는 존재여야만 하는 이들은 분노를 삼키고 삼킨다. 또 그렇게 세상에 분노를 쌓아가면서도 결국은 ‘미운 정’을 붙이고 만다. 이토록 복합적인 이야기의 정체성은 아주 특수한 동시에 보편적이다. 죽고 싶지만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정 붙일 구석을 찾는 누구나를 닮았으니까. 그러니 온 우주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을 때, 뭐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을 때는 <성난 사람들>을 보자. 마지막 편에서 인용된 카를 구스타프 융의 말처럼,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할 때가 아닌, 어둠을 인식할 때 찾아온다.”
- 연출 | 이성진
- 각본 | 이성진
- 출연 | 스티븐 연, 앨리 웡, 데이비즈 최, 영 마지노, 조셉 리, 패티 야스타케 외
- 총 10부작
[3]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바로 그것>
‘연휴에 웬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일에서 손을 떼고 멀찍이 떨어진 지금이야말로 일이라는 존재를 돌아볼 때다. <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바로 그것>은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제작과 진행을 맡은 4부작 다큐멘터리로, 각계각층의 노동자들을 만나며 ‘일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재밌는 점은 돌봄 노동자부터 최고 경영자에 이르기까지, 각 회차를 노동자들의 직급에 따라 나눴다는 것이다. 노동 강도가 높다고 임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근속 연수가 느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자리는 산업 구조의 변화로 사라지고, 어떤 일자리는 살아남지만 사람들이 떠나간다. 다큐는 이 괴이한 구조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일할지를 묻는다. 무슨 일을 하든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삶의 범위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서. ‘노동자’보다는 ‘근로자’로 지칭하는 일이 흔한, 그만큼 ‘열심히’ 일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물음이 아닐까.
- 연출 | 버락 오바마, 미셸 오바마 외
- 총 4부작
[4]
왓챠 영화
<밀레니엄>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를 영화화한 작품. 시사 잡지 ‘밀레니엄’의 창간인이자 기자인 미카엘(미카엘 뉘크비스트)는 금융계 거물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역으로 소송을 당하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정보를 줄테니 40년째 미제로 남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재벌가의 의뢰를 받고 천재 해커 리스베트(누미 라파스)와 함께 진실을 쫓는다.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탐정 영화 장르 특유의 플롯에 통렬한 사회비판과 건조한 듯 끈적한 인물 관계가 더해져 쾌감을 준다. 가장 재미있는 건 리스베트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갖은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고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주는 리스베트의 매력에 푹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데이빗 핀처가 연출한 할리우드판도 재미있지만, 원작이 가진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잘 살려낸 데다 어쨌든 완결성 있게 3부까지 제작한 스웨덴판을 먼저 보시라 권하고 싶다.
- 연출 |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
- 출연 | 미카엘 뉘크비스트, 누미 라파스
- 총 3부작
[5]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
미국 아이비리그 중하위쯤에 있는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 지윤(산드라 오)은 동양인 여성 최초 학과장으로 발탁된다. 하필 학과가 사상 최대 위기를 맞은 때에. ‘FUCKER IN CHARGE of you fucking fucks(X 같은 X놈들을 책임지는 X)’ 지윤이 학과장실로 출근한 첫날 선물 받은 명패에 쓰여 있는 말처럼, 그는 정말로 ‘X 됐다’. 학교는 지원 예산을 줄이고 ‘가성비 낮은’ 원로 교수들을 정리하려 한다. 영문학이 코딩이나 공학처럼 이력서에 넣을 수 있는 지표나 기술을 가르쳐줄 순 없지만, ‘비판적 사고를 토대로 한 공감의 가치’를 전할 수 있다고 믿는 지윤은 학과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무작정 인문학을 예찬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누구보다 깨어있다고 믿는 학자이자 교수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착취와 차별을 일삼기도 한다. 학생들은 ‘대문호’라 평가받는 작가들의 권위에 가려진 시대의 한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토론한다. 성찰과 전망, 즉 학문이 하는 일을 보여준다.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취업률로 학문의 쓸모를 판단하고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시대에서, “언제 교수 될래?”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 모든 대학원생에게 추천한다.
- 연출 | 대니얼 그레이 로니노
- 각본 | 어맨다 피트, 애니 줄리아 와이먼, 제니퍼 킴 외
- 출연 | 샌드라 오, 제이 듀플라스, 홀런드 테일러 외
- 총 6부작
[6]
웨이브 다큐멘터리
<국가수사본부>
전국 7개 권역 강력계 형사들의 수사 과정을 담은 <국가수사본부>는 픽션이라면 ‘허구이며, 실제와 같더라도 우연’이라는 문구가 나올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본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역, 사건 등은 모두 실제임을 밝힙니다.’ 추석날 자식 중 누구도 연락하지 않는 것에 분개해 술을 마시고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부터 도박, 절도, 사기, 마약, 살인까지.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가해자의 서사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의 시점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사건 현장을 살피고 증거를 수집하고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 자체를 조명한다. 경찰이라는 무거운 이름 뒤에는 삶과 죽음을 만나고 들여다보는, 울고 웃으며 다음 현장으로 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에 유난히 더 바쁘다며 씁쓸하게 웃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이번만큼은 부디 별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게 된다.
- 기획 | 배정훈
- 연출 | 정인혁, 김규리, 박성철, 임건연
- 작가 | 박진아, 신소원, 박혜민, 박은빈
- 총 13부작
[7]
넷플릭스 |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고등학생 라라 진(라나 콘도르)은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짝사랑할 때마다 편지를 써왔지만 절대 전하지 않는다. 여전히 짝사랑을 하던 어느 날, 누군가 라라 진의 편지를 보내버리는 바람에 편지를 받은 남자들에게 마음을 들키고 만다. 그 중 피터(노아 센티네오)가 라라 진에게 어떤 이유로 계약 연애를 제안하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연애를 시작한다. 지지고 볶아도 서로가 서로뿐인, 어느 길로 빠져도 ‘결국엔 너’에 다다르는 로맨스가 있지 않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딱 그렇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는 3편으로 마무리됐는데, 라라 진 옆에서 조잘거리며 때때로 대범한 사고를 치던 키티(애나 캐스카트)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엑스오, 키티>가 스핀오프로 나왔다. 키티의 연애는 언니보다 더 종잡을 수 없다. 애틋한 첫사랑, 죽도록 미웠지만 사랑하게 된 라이벌, 늘 티격태격 다퉜지만 묘하게 끌렸던 친구 등 여러 관계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말랑한 하이틴 로맨스로 가볍게 보기 좋은 시리즈지만, 세계관이 점차 커지고 있다. 드라마는 벌써 시즌 2 제작이 확정됐다고 하니,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서둘러 정주행하자.
- 연출 | 수잔 존슨, 마이클 피모냐리
- 각본 | 수피아 알바레즈
- 출연 | 라나 콘도어, 노아 센티네오
- 파트 3부작, 스핀오프 1편
[8]
왓챠 시리즈
<출사표>
명절에 취업, 정치, 연애 얘기는 금기처럼 여겨진다. 개인사를 향한 무례한 간섭과 참견은 제외하고, 우리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주제를 두고 건강한 논의조차 나눌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그렇다면 취업도 하고 정치도 하고 연애도 하는 로맨틱 코미디 <출사표>는 어떨까. 불의를 참지 않는 세라(나나)는 진상 손님에게 문제를 제기해서, 사무보조로 들어간 회의에서 부조리한 조례안을 지적해서, 부당해고를 당한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취업은 해야겠는데 눈 감고 귀 막은 채 살자니 죽을 것 같다. 마침내 세라는 “1년에 90일 출근하면서 연봉 5,000만 원을 받는” 구의원이 되기로 한다. 학력, 경력, 단체, 정당 중 어느 것 하나 갖지 못했지만, ‘마원구 민원왕’으로서 더 좋은 내일을 만들겠다는 열정을 가졌으니까. 세라가 구민들의 소중한 한 표를 얻기 위해, 또 구의원으로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내는 목소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지쳐가는 모두에게 위로를 건넨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바보처럼 싸우는 누군가를 향한 응원이기도 하다.
- 연출 | 황승기, 최연수
- 각본 | 문현경
- 출연 | 나나, 박성훈, 유다인, 한준우, 안내상 외
- 총 16부작
About Author
임현경
이야기와 글쓰기, 사람들을 만나 삶의 일부를 나누는 일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