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소전서림, 책으로 지은 숲

고요를 찾기 위해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면
고요를 찾기 위해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면

2023. 07. 13

안녕 에디터B다. 도시의 속성은 고요와 거리가 멀다.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식당, 길거리, 공원, 어디에나 사람이 붐빈다. 나는 도시를 사랑하지만 가끔은 팽창하는 밀도를 견디지 못해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렸으면 좋겠고, 신이 나서 떠드는 무리의 소음이 싫어진다. 만약 나처럼 도시 속 고요를 찾는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도서관.

1400_retouched_-1

소전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도서관 소전서림은 ‘흰 벽돌로 둘러싸인 책의 숲’을 뜻한다. 멀리서 보면 저기가 바로 소전서림이구나 예측 가능할 정도로 독특한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얗고 네모난 상자를 수직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듯한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건물은 스위스 건축가 다비데 마쿨로가 2016년 설계했다. 리움 미술관을 설계한 마리오 보타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은 건축가다.

1400_soj2 ⓒ소전서림

소전서림에 관해 흥미로운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청담동에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소전서림이 탄생한 목적이다. 소전문화재단의 목표는 ‘독서를 통해 사람들이 지극히 좋은 상태에 도달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한다. 지극히 좋은 상태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지만, 소전문화재단의 행보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늘 소개하는 소전서림이 그렇고, 신진 작가 후원 사업을 해오고 있으며, 현재 강원도에는 인문학 레지던시를 짓고 있으니까.

소전서림은 그 이름처럼 숲과 비슷한 인상이다.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이라, 알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갈 때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느낀다. 금지된 상자를 여는 판도라처럼 나는 책으로 지은 숲 소전서림에 입장했다.

1400_retouched_-206

1400_retouched_-177

1층에는 투바이투라는 카페와 함께 전시 공간이 있다. 나는 곧장 계단을 통해 소전서림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은 우측으로 돌아가며 내려가게 설계되어 있다. 돌아가며 내려가는 설계는 공간과 공간을 단절시키는 효과를 준다. 덕분에 속세를 떠나 멋진 신세계로 입장하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비밀 북클럽에 방문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1400_retouched_-8

지금 보는 곳이 소전서림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소전서림이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다. ‘집 밖의 내 서재’.  아무래도 집 밖에 있는 공간은 집 안에 있는 공간보다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내 공간이 아니니까. 소전서림은 ‘내 서재’라고 느낄 정도로 편한 공간이 되길 바랐기에 공간 인테리어에 많은 공을 들였다. 실제로 이용해 보면 내 서재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하고 안온했다.

1400_retouched_-33

소전서림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책이지만, 정체를 알면 깜짝 놀랄 의자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게 재밌었다. 프리츠 한센, 핀율, 카시나 등에서 출시되는 의자들이다.

1400_retouched_-34

각종 브랜드의 의자를 탐닉하는 나로서는 다양한 착석감을 느낄 수 있는 의자가 도서관에 있다는 게 큰 메리트였다. 당연하게도 소전서림은 단순히 좋은 가구를 보여주고 싶어서 도서관에 놓은 게 아니다. 의자에 이토록 신경을 쓴 이유는 ‘독서’ 그 외에는 없다.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책을 읽는 것이고, 좋은 의자는 독서를 할 때 편안한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으니까.

1400_retouched_-63

1400_retouched_-9

1400_retouched_-30

1400_retouched_-12

서가 한쪽에 크게 자리한 대리석은 이탈리아 까라라 지역에서 공수했다. 바다 건너 온 대리석이라니. 소전서림에서는 이 대리석에 추가 세공을 해서 스탠드를 설치했다. 많은 도서관을 다녀본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도서 환경에 공을 들이는 도서관은 처음이다.

물론 공간을 갓 방문했을 때 가구, 공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지만, 시간이 흐르니 소전서림의 진짜 매력을 알 수 있었다. 소전서림의 가장 큰 매력은 문학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이다.

1400_retouched_-15 1400_retouched_-14

예를 들어 이런 거다. 도서관에서는 보통 책 제목을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리를 한다. 반면, 소전서림은 작가 이름으로 분류해 놓았다. 곳곳에 놓인 아이패드를 통해서 책 위치를 검색한 후 책을 찾으면 바로 옆으로 그 작가가 집필한 다른 작품이 쭉 나열되어 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방식이다. 친구가 “나 요즘 이런 소설 읽어”라고 말하면 덩달아 신이 나서 “그렇다면 이 소설도 읽어볼래?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거야.” 답해주는 것 같다.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박완서와 김중혁이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1400_retouched_-192

1400_retouched_-194

소전서림은 문학 도서관이긴 하지만, 비문학 도서도 구비되어 있다. 인문일반, 철학, 과학 분야도 읽어볼 수 있다. 소전서림이 보유한 책은 총 3만여 권으로 공공도서관과 비교하자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데이터 과잉의 시대에 필요한 건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큐레이션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들여 책을 큐레이션했다. 열린책들의 편집이사 김영준, 비평가 박혜진, 시인 서효인, 보안책방 큐레이터 강영희, 철학아카데미 박정하, 과학책방 갈다의 이명현이 한 권 한 권 골랐다. 신간과 구간은 정기적으로 교체되는데, 매달 소전서림 관장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회의를 통해 최종 결정되어 입고된다.

1400_retouched_-46   1400_retouched_-48

파리리뷰, 모노클 등 외국 매거진, 국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도 있으니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땐 잡지 한 권 손에 쥐고 이곳에서 ‘라캉스’를 보내보는 것도 좋겠다. 호텔 라운지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는 기분으로.

1400_retouched_-67

1400_retouched_-58

라캉스를 위한 완벽한 좌석으로 1인 서가를 추천한다. 소전서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지 않을까. 나는 사람이 없을 때 촬영하기 위해 오픈런 했는데 1인 서가는 빠르게 빈자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사진 속 의자가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LC4다. 몸의 곡선에 딱 맞춘 듯 편안한 느낌이었다. 20분쯤 누워있다가 이러다가는 잠들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켜 다시 촬영을 하러 떠났다.

1400_retouched_-68 1400_retouched_-66

1인 서가 옆으로는 2인용 서가, 1인용 책상이 놓인 공간이 있었다. 소전서림을 이용하면서 시각, 청각, 후각적으로 만족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다름 아닌 청각이었다. 1인 서가에 누워 있으면서 책을 읽는데, 어딘가에서 타닥타닥 타이핑하는 소리와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고, 어디선가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들렸다. 마치 유튜브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ASMR’을 재생한 것 같았다. 내가 찾던 고요는 소음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가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물결 하나 없는 호수가 아니라, 잔잔한 바람이 이는 바다가 아니었을까. 소전서림에 있었던 순간 중 가장 좋았다. 평일 오전부터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분명 누구보다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소전서림을 애용하고 있었다.

1400_retouched_-73 1400_retouched_-75

도서관 곳곳을 산책하듯 다니길 권한다. 책에서 발췌한 문장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책장에도, 심지어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도 문장이 쓰여있다. 계단 옆 벽을 가득 채운 위 작품은 네마니아 니콜리치(Nemanja Nikolic)의 <Panic Book>(2013-2015)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주인공이 비행기에 쫓기는 장면을 재해석했다.

1400_retouched_-94 1400_retouched_-93

소전서림의 공간은 크게 세 군데로 나눌 수 있다. 적당한 고요가 있는 메인 서가, 완벽한 고립을 주는 1인 서가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예담. 지금 보고 있는 곳이 바로 예담이다.

1400_retouched_-96

1인 서가에 누워 있을 때 작게 들었던 음악의 출처가 여기였다. 마찬가지로 좋은 의자가 구비되어 있기에 책 읽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다른 공간과 비교해서 이곳은 투명창으로 한쪽 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개방감까지 느낄 수 있다.

1400_retouched_-129

1400_retouched_-112
1400_retouched_-114

1400_retouched_-132

이곳에서는 강연, 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곤 한다. 책, 식물, 햇살에 둘러싸인 공간이라 뭘 해도 좋은 공간이 것 같다.

1400_retouched_-131

특히, 전시를 좋아한다면 예담을 자주 방문하게 될 거다. 뉴욕, 베를린, 파리 등 전 세계에서 열리는 전시 도록을 모아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MoMA에서 진행 중인 전시 도록부터 도쿄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전까지 해외 전시 도록을 볼 수 있다는 게 전시 마니아들에게는 큰 메리트를 주지 않을까.

1400_retouched_-117 1400_retouched_-123

예담에서 바로 이어지는 문 밖으로 나가면 내촌목공소에서 만든 정자가 하나 놓여있다. 이름은 모동정. ‘동녘을 그리는 정자’라는 뜻이다. 위에서 살짝 언급한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이 만들어지고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날은 날씨가 더워서 밖에 앉아있긴 힘들었지만 조금만 선선해진다면 신선놀음하는 기분으로 빈백에 누워 계절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1400_retouched_-140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1층에 있는 전시 공간이다.  낮에는 카페, 저녁에는 바가 되는 투바이투 바로 옆에 있다. 현재는 <앨리스 북아트전>이 개최하고 있다. 보통의 전시와 비교했을 땐 규모는 소박하지만 도서관에서 선보이는 전시답게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만한 텍스트가 많았다.

1400_retouched_-141 1400_retouched_-144 1400_retouched_-151

전시를 다 봤다면, 앨리스 관련 아트북과 소전서림의 굿즈 등이 진열된 ‘작은 서점’에 들리면 오늘의 투어는 끝. 참고로 ‘앨리스 북아트전’은 7월 30일까지만 하니 늦기 전에 관람하러 가보는 게 좋겠다.

1400_retouched_-160 1400_retouched_-163 1400_retouched_-162

소전서림은 유료 도서관이다. 반일권은 3만 원(5시간 이용), 연간 회원권은 10만 원이다. 도서관에 돈을 내고 간다는 게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혹시 ‘그 돈이면…’이라는 생각이 들까. 직접 소전서림을 다녀와서 든 생각은 ‘우리 동네에도 이런 공간이 있다면 참 좋을텐데’였다. 나는 올해만 해도 10만 원이 넘는 옷을 산 게 수십번이고, 신발까지 포함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몇 번 사용하고 질릴지도 모르는 그것들에 지출한 금액을 생각하면, 소전서림에 쓴 비용은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특히, 지금보다 더 문학을 더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1400_retouched_-180

엄선한 책들이 깔끔하게 구비되어 있고, 값비싼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게다가 전시회와 독서회까지 있는 공간이라니. 카카오톡 선물하기에 회원권을 입점한다면 인기가 많을 것 같다. 스타벅스 쿠폰이 친구의 일 년에 미치는 영향은 적어도 소전서림 회원권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줄 수도 있으니까. 참고로 소전서림은 동시 이용객 50명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좋은 독서 환경을 만들겠다는 목적 하나로 만들어진 이런 공간이 강서구에도 있다면 참 좋겠다.

1400_retouched_-184

촬영이 끝나고도 30분 정도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카메라는 백팩에 넣어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촬영 중 집어 들었던 <식물적 낙관>을 마저 읽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비가 쏟아질 예정이라더니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날씨는 흐려도 마음까지 흐려질 필요는 없겠지. 비가 오고, 눈 이 내리고, 해가 뜨는 건 자연의 일이고, 나는 식물처럼 단단히 뿌리내려 살아가면 되는 거니까. 올여름, 떠나고 싶은 여행지가 없다면 소전서림도 좋겠다.

소전서림

  •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138길 23 지하1층
  • 영업시간 화-일 11:00-21:00(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sojeonseolim

*이 글에는 소전문화재단의 유료 광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