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디에디트에서 별난 음악 이야기를 이어 가는 객원 에디터 세훈인서울이다. 오늘 할 이야기는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레코드(LP, 바이닐)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조금 더 두근거린다.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레코드 판매 성장세는 17년 동안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2022년에는, 2006년에 비해 48배 이상 늘어난 4,350만 장의 레코드가 팔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제2의 레코드 전성기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레코드와 연계된 행사와 팝업이 끊임없이 열리고, 레코드를 테마로 한 공간이 계속 생겨나고 있어서, 레코드 문화에 많은 관심이 몰렸다는 것이 실감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레코드 구매자의 단 50%만이 실제로 턴테이블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절반의 사람에게는 감상용이 아닌 수집용 아이템으로만 소비되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턴테이블과 오디오 시스템을 집에 갖추고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꽤 사치스럽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아 진입 장벽이 두껍기 때문이다.
손쉽게 레코드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는 레코드 바에 가는 것이다. 매장에 구비된 수많은 음반 사이에서 ‘오늘의 음악’을 골라 훌륭한 오디오 시스템으로 재생하고, 그 선율에 어울리는 음료를 페어링하며 마실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많다. 그중에서도 서울 교통의 요지 용산구에 위치한 3곳을 골라 추천하려 한다. 소개하는 곳 모두 일회 방문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들를 수 있는 아지트로 삼을 수 있는 곳이라 자신한다.
[1]
“마지막 손님이 떠날 때까지 영업합니다”
스네일레코드앤바
남산 낮은 자락 후암동에는 내가 즐겨 찾는 식당과 카페가 많다. 약속 장소 선택권이 내게 있는 경우에는 후암동을 찾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후암동의 재미는 2차를 갈 때 (1) 언덕을 올라 해방촌으로 향하거나 (2) 숙대입구역 쪽으로 내려가서 남영동 맛 골목 쪽을 탐구하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것.
첫 번째 선택지를 골라 언덕을 한참 오르다 보면 해방촌의 입구 같은 ‘신흥시장’과 조우하게 된다. 소개할 스네일레코드앤바 또한 여기에 위치해 있다. 복작복작한 시장 중심부가 아닌 외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 형태로 된 좌석들과 바 깊숙한 곳에 자리한 턴테이블이 보인다. 좌석에 여유가 있을 때면 일부러 제일 안쪽으로 들어와 턴테이블 앞에 앉고는 한다. 이날은 Beyoncé의 ‘Renaissance’가 돌아가고 있었고, 흥을 참을 수 없는 댄스 넘버 ‘BREAK MY SOUL’을 들으며 주문을 했다.
제일 마음에 든 건 레코드를 대하는 사장님의 태도다. 자신이 아끼는 음반을 한 음 한 음 손님에게 들려주려는 태도. 음반을 교체할 때마다 매번 브러쉬로 레코드를 쓸고, 바늘 클리너로 바늘을 닦는 행위를 반복한다. 판 하나 하나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마음은 손님에게도 자연스레 닿지 않을까?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장님은 물잔이 비면 채워주고, 손님들에게 메뉴와 음료를 내어 주고, 물 흐르듯 다음 레코드를 준비한다. 공지로 내 건 영업시간이 ‘마지막 손님이 떠날 때까지’인 것도 그런 사려 깊음의 일면 같다.
✅방문했던 날 먹고 마신 것
글렌리벳을 스트레이트로 한 잔, 버드와이저 맥주를 한 병.
이곳에 와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면 그날의 약속을 마무리하기 참 좋은 아웃트로가 된다. 그래서인지 안주를 시켜서 배를 채우기보다는 드라이한 음료를 몇 잔 마시는 게 좋다.
✅방문했던 날 가장 좋았던 레코드
Philip Glass [Glassworks] (1981)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로, 자칫 단순하게 들리는 구성을 겹겹이 쌓아 극적인 감흥을 빚어낸다.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대중문화와의 융화에 굉장히 열려 있다는 것이다. 현대 전자 음악과의 결합을 시도하거나 영화나 광고 음악에 자주 작곡으로 참여하곤 한다(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에서도 그가 쓴 곡을 만날 수 있다).
[Glassworks]는 그의 이런 개방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가 메이저 레코드(CBS)와 계약하여 발매한 첫 음반이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로 앨범의 문을 여는 1번 트랙이 앞서 시킨 술과 참 잘 어울린다.
Glassworks: I. Opening
스네일레코드앤바
- 서울 용산구 신흥로 99-7, 1층
- 영업 시간 : 수요일 ~ 일요일 / 20:00~until you leave
- @snailrecordandbar
[2]
“신청곡은 받지 않습니다”
디거이즈디깅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선택지 중 다른 하나. 남영동 쪽으로 걸어 내려가 보자. 숙대입구역의 9번 출구 인근엔 역 대로변과 대학가를 잇는 예스러운 느낌의 굴다리가 있다. 정겨운 포장마차들이 몰려 있고 굴다리를 가로지르는 사람들로 활발하다. 그 활발함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는 듯한 노란 지붕 건물 3층에 디거이즈디깅이 있다.
문을 열면 큰 창밖의 철길과 마주하게 된다. 창밖으로 열차들이 주기적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도, 사장님과 마주 앉아 턴테이블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바 자리도 모두 좋은 느낌. 곳곳에 주황빛 원목으로 포인트를 준 공간이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와도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과 공지사항을 읽다 보면 ‘죄송하지만, 신청곡은 받지 않습니다’, ‘음악 볼륨은 키워드리지도 줄여드리지도 않습니다’와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다소 단호한 멘트에 공간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위축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템포로 플레이리스트를 이끌어가겠다는 신념과 음악 때문에 재방문해 준 손님에게 아쉬움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어 주는 따끈하게 데운 수건이 참 다정하고, ‘머물러 주시는 동안 편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시길’이라는 안내문의 문구는 단호함 뒤에 가려진 다정한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문했던 날 먹고 마신 것
블렌드 커피 한 잔, 소울 트레인 한 잔, 그리고 바닐라 커스터드 푸딩
낮 영업을 하는 날에는 사장님이 내리는 드립 커피를 주문할 수 있다. ‘소울 트레인’은 데킬라, 카다멈 시럽, 자몽과 라임 주스를 배합한 이곳의 시그니처 칵테일. 체리 절임을 곁들인 바닐라 푸딩은 술에도 커피에도 잘 어울린다.
✅방문했던 날 듣기 가장 좋았던 레코드
Julius Rodriguez [Let Sound Tell All] (2022)
씬에서 주목받는 신예 재즈 뮤지션, 줄리어스 로드리게스(Julius Rodriguez)의 첫 정규 앨범이다. 세계 최고의 공연 예술 학교라고 불리는 줄리아드 스쿨에서 이론을 배우고, 교회나 재즈 클럽, 뮤지컬 극장에서 즉흥 연주를 하며 실전 경험을 쌓다가 힙합 뮤지션들의 투어 밴드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다채로운 이력처럼 그가 영향을 받은 장르는 재즈, 클래식, R&B, 가스펠, 팝 등 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다양한 색깔의 물감으로 캔버스를 칠하듯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 낸 좋은 음반이다.
Chemical X
디거이즈디깅
- 주소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87길 8, 3층
- 영업시간 수-목 13:00~00:00 / 금-토 13:00~01:00 / 일-화 19:00~00:00
- @deggerisdigging
[3]
“해피아워가 있는 레코드 바”
퀘스트
퀘스트(QUEST)의 첫인상은 자신들의 소개처럼, ‘젊은 창작자’ 혹은 ‘기이한 몽상가’가 지낼 법한 작업실에 초대된 느낌이다. 카페트와 식물들, 술병과 굿즈들, 그리고 턴테이블과 레코드들이 무작위스러운듯 조화로운듯 배치되어 있다. 그러한 요소들 사이에도 누구나 지친 몸을 쉬어 가기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다. 턴테이블 바로 앞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는 자리도 좋고, 정각마다 울리는 뻐꾸기시계가 정겨운 바 자리도 좋고, 용산구청이 눈에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풍경을 즐기는 자리도 좋다. 이날 나는 편안한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비치된 책과 잡지를 여유롭게 읽었다. 80년대의 매끈한 소울 음악을 들으며.
어느 자리에 앉아도 좋은 음악이 귀를 채우는 이유는 왕성하게 DJ로도 활동하고 있는 퀘스트 지킴이 Sina Hill의 플레이리스트 덕분이다. Sina Hill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다양한 DJ가 번갈아 턴테이블 앞을 지키는 이벤트들이 자주 열리니, 시간 맞춰 방문한다면 멋진 순간을 목격할 수도 있다.
팁 하나, 가게 한 켠 선반에 장르별로 잘 나뉘어 있는 레코드는 구매 가능하다. 구매하기 전에 청음이 가능하니 부담 없이 체크해보길.
✅방문했던 날 먹고 마신 것
잭 콕 두 잔
팁 하나 더, 퀘스트에는 저녁 8시까지 운영하는 해피 아워가 있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술잔을 채울 수 있으니 행복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잭 콕을 연거푸 두 잔을 비우면서 책장을 넘겼다. 기본 안주로 한 움큼 내어 주신 ABC 초콜릿도 정겹고 좋았다.
✅방문했던 날 듣기 가장 좋았던 레코드
Average White Band, [Shine] (1980)
매장에서 노래를 듣다가 귀를 사로잡는 곡이 있으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곤 하는데, DJ가 음악을 틀어주는 곳에서는 그 재미가 더 각별해진다. 적당한 타이밍에 수줍게 곡의 정보를 물어보면, 그날 DJ는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 분명하다.
이날 만난 여러 좋은 소울 곡 중 Roy Ayers의 ‘Love Fantasy’도 반가웠고, The Rah Band의 ‘Float’도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할 정도로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이름조차 생소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울-펑크 밴드 Average White Band다. 이날 최고의 발견이었다. 듣기 좋아서 찾아봤던 곡 두 개가 마침 같은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운명처럼 느껴져 바로 그 레코드의 정보를 내 위시리스트에 기록해두었다.
For You, For Love
퀘스트
- 주소 서울 용산구 보광로 105, 2층
- 영업시간 월-목 18:00~00:00 / 금-토 15:00~02:00
- @quest.ent
‘아지트로 삼고 싶다’는 말은 내가 자주 쓰는 극찬이다. 다른 날에 방문하면 어떤 새로운 음악을 만나게 될지 궁금하고, 그 음악에 어떤 술을 마시며 즐거운 추억을 쌓아볼까 하는 기대가 절로 생기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애정 가득 담아 영업한 나의 아지트가 마음에 들었을까? 이 글을 계기로 세 곳 중 한 곳 이상을 방문한다면 정말 기쁘겠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 소개한 공간에 취향 저격당해서 ‘나만의 레코드 아지트’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면, 한 명의 레코드 문화 팬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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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인서울
유튜브 채널 ‘sehooninseoul’에 좋아하는 걸 모으고, 사람들과 함께 듣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는 청개구리 디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