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PICK

[2022 B어워즈] 시기적절한 인사

시간을 채우는 건 결국 말이니까
시간을 채우는 건 결국 말이니까

2022. 12. 26

안녕, 에디터B다. 시기적절한 인사를 좋아한다. 크리스마스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추석에는 추석 잘 쇠시길. 그리 다정한 성격은 못되어서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한명 한명 보내진 않지만, 그 말을 내뱉을 때면 왠지 기분이 좋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순간, 수많은 날 중 하나가 아니라 특별한 하루가 되는듯하다. 그래, 말이 중요한 거다. 시간을 채우는 건 결국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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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보통의 일요일과 다른 이유는 25일을 채우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그리고 길거리에 적힌 크리스마스 문구들. 사소해 보여도 작은 말이 모여 성탄절이라는 따스한 분위기를 만든다. 보통의 나날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들의 말인 것 같다. 내가 하는 말, 내가 듣는 말.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 나오는 대사처럼 2023년에는 조금 더 다정한 태도로 따뜻한 말을 해야지 생각했다. 특별한 순간이 더 많아지도록 말이다.


올해의 영화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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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영화평론가 100명을 붙잡아 ‘올해의 영화’를 물어보면 90명은 이렇게 말할 거다. “당연히 <헤어질 결심>이죠.” 그리고 나머지 10명은 <헌트>를 말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아무도 뽑지 않을 영화 <올빼미>를 ‘올해의 영화’로 뽑았다(아직 안 봤다면 제발 보라는 의미로). <올빼미>의 매력은 군더더기 없다는 것이다. 상황을 지나치게 꼬지도 않고, 감정을 답답하게 끌지도 않는다. 시원하게 쭉쭉 뻗어가면서 메시지는 명확하게 담았다. 눈을 뜬다는 것과 세상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소현세자 독살 사건에 잘 버무렸다. 조선 최악의 암군 인조를 연기한 유해진과 극을 이끄는 류준열의 호연이 놀랍다. <올빼미>는 안태진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부디 오래오래 사극 스릴러를 만들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다.


올해의 빵
코끼리베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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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 맛이야 잘 안다. 무수히 먹어왔으니까. 동네빵집에서, 베이글 전문점에서, 카페에서 베이글을 먹으며 자랐다. 맛있는 베이글과 맛없는 베이글이 어떤 맛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코끼리베이글의 베이글을 먹고 난 뒤엔 맛있는 베이글에 대한 모든 순위가 초기화되는 느낌이었다. 맛있다고 생각한 모든 베이글의 순위가 제로로 돌아갔다. 코끼리베이글 맛의 비결은 화덕에 갓 구웠다는 것. 화덕에서 갓 나온 베이글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참나무 향이 은은하게 베여있다. 쫀득쫀득 고소하고 촉촉하다. 베이글 외에 다른 재료는 불필요하다. 방해될 뿐이다. 줄 서서 먹을 만한 가치가 200% 있는 베이글이다.


올해의 버거
더리얼치즈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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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사는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페이스북에서 자주 보이는 ‘인터넷에서 난리 난~’ 같은 표현이 그렇다. ‘리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리얼치즈버거’라는 상호명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치즈버거, 진짜다. 진짜 리얼이라서 리얼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심히 혈관 건강이 걱정되는 맛. 그래도 이왕 먹는 거 더블 치즈 버거를 먹을 것을 권한다. 채소 하나 들어가지 않은 느끼하고 기름진 맛이 제대로 ‘미국스럽다’. 홍대역 부근에 갈 일이 있다면 더리얼치즈버거에 반드시 들러보기를 바란다. 런던베이글뮤지엄이 종로구 런던동에 있다면, 더리얼치즈버거는 마포구 뉴욕동에 있다. 지금까지 먹었던 치즈 버거는 모두 가짜였구나 생각하게 될 거다.


올해의 힐링템
틔운 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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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죄를 고백한다. 나는 수많은 식물을 죽였다. 통풍이 되지 않는 곳에 두고 숨 막히게 만들어 서서히 죽였고, 물을 제때 주지 않거나 과습으로 죽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식물을 기르는 법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한 줄기 희망은 있다. 바로 틔운 미니다. 틔운 미니는 식물 생활 가전이다. 씨앗 키트를 결합하고, 물과 영양제만 넣어주면 알아서 쑥쑥 자란다. 씨앗에서 싹이 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귀엽고 신비로운지 모른다. 올해의 힐링템이다.


올해의 오픈런
포켓몬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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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런을 종종 하는 편이다. 주로 식당이다. 얼마나 맛있길래 줄 서서 먹을까 라는 호기심과 오픈런 식당 간판깨기에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교차한다. 올해 가장 많은 오픈런을 시도했던 곳은 식당이 아니라 편의점이다. 매일 밤 10시에 입고되는 포켓몬스터 빵을 사기 위해 세븐일레븐에 줄을 섰다. 그때 힘들게 모은 띠부씰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열정이 넘치던 3월의 봄날이었다. 유행이라는 게 다 그렇지.


올해의 품절
최진호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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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호 도자기는 흡사 한정판 스니커즈 같다. 공식 인스타그램(@choijinho_ceramics)에 판매 오픈 스케줄이 공개되고, 그 시간이 되면 1분 만에 거의 모든 제품이 품절된다. 최진호 도자기는 청자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용도로 재해석하는 브랜드다. 청자라 하면 박물관에서 구경하는 도자기가 대부분인데 최진호 도자기는 일상에서 쉽고 자주 쓸 수 있도록 샐러드 볼, 요거트 볼, 술잔으로 제작한다. 참고로 나는 청자 구매는 매번 실패했고 백자 술잔 2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올해의 애증
갤럭시 Z폴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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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 Z폴드4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오락가락이다. 좋을 땐 좋고, 싫을 땐 싫다. 메인 디스플레이가 아닌 커버 디스플레이를 생각보다 자주 쓰게 되는데, 전 세대보다 넓어지긴 했지만 답답함은 여전하다. 이건 단점이다. 하지만 화면을 펼쳤을 때 드러나는 광활한 7.6인치의 화면 비율이 아주 만족스럽다. 이건 장점이다. 웹툰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등 콘텐츠를 소비할 때 만족도가 높다. 그러다가 또 Z폴드4를 주머니에 넣고 달리기를 하면 마음이 또 식는다. 이건 또 단점이다. Z폴드4를 대하는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한다. 큰 화면 덕분에 좋고, 어쩔 수 없이 무거워진 무게 때문에 아쉽다. 애증의 Z폴드4다.


올해의 브랜드
원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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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주를 ‘올해의 전통주’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전통주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핫한 브랜드와의 컬레버레이션, 공격적인 마케팅을 보다가 원소주를 보면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스토리텔링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소주는 맛있는 술이지만 솔직히 다른 증류식 소주와 비교했을 때 엄청 특출나게 맛있다고 말하기엔 어렵다(취향 차이다). 그럼에도 원소주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박재범이라는 아티스트가 몇 년 전부터 쌓아 올린 브랜드 히스토리다. 힙한 아티스트가 소주에 관심을 가지고 몇 년 동안 공들여 런칭한 증류식 소주라는 게 다른 브랜드와 차별을 이룬다. 원소주라는 브랜드 파워를 활용해 산만하게 이것저것 시도하지 않는 것도 ‘소주에 진심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원소주가 부디 롱런해주길 바란다.


올해의 키보드
리얼포스 R2 PFU Limited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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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엔 무접점 키보드 끝판왕이라 불리는 키보드 2종을 드디어 써봤다. 해피해킹 그리고 리얼포스. 며칠 동안 실사용해 본 결과, 리얼포스가 진정한 끝판왕이라는 나만의 결론을(타건감은 개인의 취향이다) 얻게 되었다. 해피해킹의 타건감은 훌륭했지만 방향키가 없는 등 배열이 극악해서 적응에 실패했다. 반면, 리얼포스 R2 저소음 모델은 사무실에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얌전하고 점잖으며 적당한 반발력을 지녔다. 8개월 동안 다른 키보드로 바꾸지 않고 계속 R2만 쓰고 있다. 8개월 전에도 그랬지만 평생 단 하나의 키보드를 쓸 수 있다면 리얼포스 R2를 선택할 것 같다.


올해의 카메라
루믹스 LX100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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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거나 식당에 갈 때는 꼭 루믹스 LX100M2를 챙겼다. 올해 출시한 제품은 아니지만 올 한 해 이 카메라 덕을 많이 봐서 올해의 카메라로 선정했다. LX100M2로 찍은 많은 사진을 기사에 사용했다. 가벼워서 휴대하기에 편하고, 마이크로 포서드 센서를 탑재해서 만족스러운 사진을 건질 수 있다. 사진 욕심이 생겨서 좋은 카메라 하나 사고 싶어지면 웬만하면 휴대성 좋은 카메라를 추천한다. DSLR이나 미러리스보다는 똑딱이 카메라가 입문자에게는 더 좋다. 좋은 사진을 많이 건지기 위해서는 일단 손에 카메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싼 카메라여도 크고 무거워서 집에만 모셔두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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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