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좋아하는 게 많은 에디터B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놀던 중학생 때 나를 떠올려본다. 왼쪽 손목엔 항상 시계가 있었다. 얼마나 자주 시계를 차고 다녔던지, 시계를 풀면 그 부분만 하얗게 됐을 정도다.
지금도 시계를 찬다. ‘시계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까르띠에나 오메가 정도는 있을 것 같지만 나의 시계 컬렉션은 소박하다. 시계를 구매하는 이유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멋 부리며 말하자면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시계를 산다. 졸업을 하며, 취업에 성공하며, 이직에 성공하며, 이사를 하며 인생의 한 챕터를 갈무리할 때 시계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물론 그냥 예뻐서 사는 경우도 많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계 컬렉션을 보니 인생의 마디마디엔 시계를 구매했더라.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시대에 아날로그 시계란 기능적으로 무쓸모에 가깝다. 이제 시계는 오로지 ‘멋’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오로지 멋을 위해 존재하다니, 그 자체로 멋있지 않나.
오늘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시계 7종을 소개하려고 한다. 시작은 소박하지만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소비 역사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거다.
[1]
로터리 Ro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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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는 아주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다. 시계를 잘 모르는 친구에게 로터리 시계를 자랑하면 ‘그게 뭔데’라는 말을 듣게 될 거다. 그땐 이렇게 말해주면 된다. “이거 셜록 홈스 시계”
로터리는 내가 직장인이 된 후 처음 구매한 시계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스>에서 홈스(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찬 모습을 보고 반해서 구입했다. 지금은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지만, 5년 전엔 나름 ‘셜록 홈스 시계’로 유명했다. 로터리는 스위스 브랜드지만 영국 시계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 홈스가 자주 착용한 게 첫 번째, 1940년에 영국 육군 공식 시계로 지정된 것이 두 번째다. 포털에서 로터리를 검색하면 ‘영국 국민 시계로 불리는’이라는 수식어가 있는데, 이건 찾아봐도 명확한 근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혹시 ‘로터리 영국 국민 시계설’에 대해 확실히 아는 분이 있다면 제보 바란다.
나는 이 시계를 신촌역 현대백화점에서 구매했다. 가격은 20만 원대 중반. 사회초년생에게는 나름 큰 금액이었다. 시계에 그 정도 돈을 쓰다니, 라는 생각을 그때의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근사한 시계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어른이라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 회사는 기어박스라는 회사다. 에디터H, 에디터M이 일하던 리뷰 웹진이었고, 나는 입사한 지 한 달 쯤 되었을 때 이 시계를 구매했다. 로터리를 보면 20대 후반의 젊고 어설프던 내가 떠오른다. 나는 그동안 많이 변했는데, 어쩐지 로터리 시계는 변한 게 없어 보인다.
[2]
몬데인 Mon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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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좋아하는 않는 사람이 이 디자인을 안다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거나, 2012년에 아이폰을 썼거나. ‘스위스 철도청 시계’라 불리는 몬데인 시계는 독보적인 디자인을 가진 시계다(디자인에 대한 특허권과 상표권은 몬데인이 아닌 스위스 연방 철도(SBB)가 가지고 있다).
각진 시침과 분침, 미니멀한 다이얼은 비슷한 것을 찾기도 힘들 정도다. 재밌는 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도 전시될 정도로 유명한 디자인을 SBB 엔지니어가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그는 승객이 멀리서도 시간을 볼 수 있게끔 시인성을 높이기 위해 시계를 볼드하게 디자인했는데, 그게 역사적인 디자인으로 남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밌는 건 이 다이얼 디자인을 애플이 iOS6에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라이센스를 계약을 맺지 않은 채 시계 앱에 적용했기 때문에, SBB에서는 특허권 침해를 주장했고 그제서야 정식 라이센스 계약을 맺었다. 이 사건 덕분에 몬데인 시계의 인기와 위상이 꽤 올라가지 않았을까.
내가 이 시계를 실물로 본 건 2016년 모 웹진에서 일할 때였다. ‘몬데인’이라는 브랜드는 알고 있었지만 실물로 구경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계의 주인은 당시 편집장이었다. 그때 나는 꿈도 많고 욕심도 많은 서툰 에디터였고, 나도 편집장도 낯선 프로젝트를 하느라 맘고생 몸 고생을 했었다. 몬데인 시계를 보면 그때가 생각한다. 10만 원대 초반에 구매했는데, 지금 보니 20만 원 초반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3]
세이코 Seiko
프로스펙스 미니 터틀 다이버
다이버 워치를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필드 워치, 파일럿 워치는 사도 눈에 흙이 들어가긴 전까진 다이버 워치를 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못 생겨 보였기 때문이다. 롤렉스 서브마리너 같은 고가의 시계도 내 눈엔 예쁘지 않았다. 두껍고 큼지막한 시계는 자기 과시가 심한 래퍼나 찰 것 같았다. 그런데 세이코 미니 터틀은 ‘미니’이기 달랐다. 보는 순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이코 미니 터틀은 세이코의 인기 다이버 워치 ‘터틀 시리즈’를 미니 사이즈로 만든 버전이다. 일반 시계과 비교하면 두께는 두껍지만, 다이얼 크기는 비슷해서 소위 말하는 ‘방패간지’ 같은 건 없다. 그래서 내가 미니 터틀을 보고 꽂혔던 것 같다. 거북이를 닮은 터틀 시리즈의 디자인 정체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손목에 찼을 때 묵직한 무게감은 느껴지면서도 부담스럽지는 않다. 약 25만 원 정도에 중고로 구매했다.
헤리지티가 있는 시계는 고전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데, 세이코 터틀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한 적이 있다(영화에 등장한 제품은 미니 터틀은 아니며, 세이코 터틀 시리즈의 다른 제품이다).
나는 그날 착장에 맞춰 마지막 단계에 시계를 고르곤 한다. 요즘엔 애플워치로 칼로리 대결을 하는 ‘겨루기’에 빠져 다른 시계는 쳐다보지도 않지만, 원래는 그랬다. 세이코 미니 터틀은 주로 반팔이나 후드를 입었을 때 차는 편이다. 셔츠에 매치하면 멋부린 것 같고, 캐쥬얼하고 밋밋한 복장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포인트가 된다.
[4]
브라운 Bra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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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가 ‘혹하지 않는 나이’라면, 30대는 취향을 아는 나이가 아닐까. 돌이켜보면 나는 20대엔 온갖 취향을 탐색하다, 30대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정갈한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을 보면 자연스레 예쁘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브라운의 제품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디터 람스의 미니멀 디자인을 계승하는 제품들을 좋아한다(좋아한다고 말해봤다 살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래서 쓰지도 않을 탁상 시계, 디지털 계산기 그리고 손목 시계까지 사게 되었다.
다이얼을 보면 요소가 많지 않고 강렬하지 않고 단순하게 배치되었다. 현재 아마존에서 195달러에 판매 중인데 나는 2021년 중순에 87달러에 구매했다. 브라운이라는 브랜드의 역사성, 의미를 생각하면 저렴한 가격이다. 컬러는 블랙 외에 실버도 있고, 디지털 시계도 있다.
[5]
베어 VAER
C3 코리안 워 필드 쿼츠
나의 패션 취향은 심심한 편이다. 검은색이나 회색, 네이비 같은 어두운 컬러의 옷을 선호하고 후드, 조거팬츠 같은 편한 스타일만 좋아하다보니 옷은 많아도 브랜드만 다를 뿐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시계를 좋아하는 것 같다. 훌륭한 포인트가 되니까.
베어(VAER)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를 기반으로 하는 마이크로브랜드다. 모두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안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마이크로브랜드를 선호한다. 베어의 시계도 그렇게 구매하게 되었다. 이 제품은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MWC A-17을 오마주한 시계다. 시계 산업에서는 베트남전, 2차 세계 대전, 걸프 대전 등 전쟁에서 사용했던 시계에 대한 오마주가 많이 제작되는데 한국전쟁은 드문 케이스다. 오마주를 했다곤 하지만 A-17과 비교하면 다이얼 디자인은 비슷해도 전체적으로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부분이 많아서 빈티지한 느낌은 덜하다. 이 부분 때문에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듯하다.
필드 워치는 쉽게 말해 육군이 차는 시계다. 육군에게 대량 보급하는 시계였기 때문에 막 쓸 수 있게 튼튼해야 했고 시간만 잘 보이면 그만이었다. 비록 나는 군인이 아니지만 필드 워치를 찰 때만큼은 마음가짐이 비슷하다. 전투를 치를 듯 고된 하루가 될 것 같으면 괜히 베어를 차게 된다. 가격은 209달러로 할인 코드를 적용해 167달러에 구매했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지인은 그날 볼 뮤지컬에 맞춰 옷을 갖춰 입는다고 했다. 체크무늬로 포인트를 주거나 플리츠 스커트를 입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의식은 아니라고 했다. 혼자만 아는 의식이지만, 그것도 나름 재미있지 않나.
[6]
스코브 안데르센
1971 스테이지 다이버
스코브 안데르센은 2013년 세바스찬 스코브와 토마스 안데르센에 의해 설립된 시계 브랜드다.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스코브 안데르센’이 되었으니 김앤장과 비슷한 작명법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사실 스코브 안데르센은 한국 한정 명칭일 뿐이고, 글로벌 공식명은 ‘어바웃 빈티지’다. ‘어바웃 빈티지’는 왠지 이태원 앤틱 가구거리에 있을 법한 이름이라 스코브 안데르센이 더 마음에 든다.
이 시계는 시계 유튜브 채널 <생활인의 시계>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내겐 세이코 미니 터틀이라는 훌륭한 다이버 시계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덜 다이버스러운 시계를 갖고 싶었고(단순 변심), 그때 스코브 안데르센 1971 스테이지 다이버를 발견했다. 이 시계는 덴마크 로스킬데 페스티벌 50주년 에디션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기존 다이버 워치와는 디자인적으로 차별화되는 특징이 있다. 다이버 워치에는 잘 쓰지 않는 흰색 다이얼을 썼고, 오렌지 컬러로 포인트를 줘서 다이버 워치임에도 발랄한 무드가 있다. 케이스백도 독특하다.
제품명이기도 한 ‘오렌지 스테이지’는 로스킬데 페스티벌의 메인 스테이지 이름이다. 무대에 사용된 거대한 오렌지색 천막을 조각조각 잘라 케이스백에 넣었다. 아메바처럼 생긴 저 모양은 오렌지 스테이지의 실제 모습을 단순화한 것이다. 가격은 29만 9,000원.
[7]
발틱 워치 Baltic watches
HMS 002
가장 최근에 구매한 시계는 발틱 워치의 HMS 002 실버 모델이다. 발틱이라는 브랜드는 처음 들어봤을 거다. 이 또한 크게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마이크로브랜드다. 이 시계를 구매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다이버 워치, 필드 워치 같은 투박한 시계는 하나씩 있는데 정작 드레스워치가 없네? 사야겠다.’
드레스워치는 정장에 어울리는 시계를 말한다. 다이버 워치나 파일럿 워치가 기능으로 분류하는 시계라면 드레스 워치는 디자인으로 구분되는 시계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버 워치도 정장에만 어울린다면 드레스가 워치가 될 수는 있다. 발틱 워치는 화이트 셔츠에서 살짝 보였을 때 가장 예쁠 것 같은 디자인이다. 티셔츠나 후드를 입었을 때도 착용해보았는데,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다.
오늘 여러 시계를 소개하면서 무브먼트에 대한 얘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시계를 구매할 때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틱의 무브먼트는 중저가에 많이 쓰는 미요타 821A를 쓰는데 가격이 332유로라는 걸 감안하면 가성비가 좋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발틱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긴 한다(디자인만 예쁘고 무브먼트는 안 좋다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시계엔 닳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와인이나 위스키에 쓰는 ‘에이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세월이 흐를수록 브랜드의 역사가 깊어지고 희소성이 올라가며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굳이 돈이나 숫자 얘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그날 복장에 어울리는 시계를 장만하는 건 꽤 재밌는 취미 생활이니까. 컨버스는 싫고 뉴발란스를 신고 싶은 날이 있듯이, 애플워치보다는 발틱을 차고 싶은 날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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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