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예체능의 천재들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2021. 04. 19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번 달에 고른 다섯 권은 예체능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쓴 책이다. 시즌 내내 한 번도 지지 않고 우승을 차지한 축구 감독부터, ‘펭수’로 얼떨떨한 성공을 거둔 배우 출신 작가, 두 천재의 자존심 싸움을 중재하는 데 도가 튼 지브리 프로듀서, 그림과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살짝 다른 일에서 적성을 찾은 두 사람까지. 개인적으로 다섯 권 모두 추천.


[1]
<아르센 벵거 자서전>

“경기 중에 존재하는 수십억 개의 경우의 수가 축구를 풍성하고, 놀랍고
환상적인 스포츠로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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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수행평가 종목은 줄넘기 2단 뛰기였다. A의 기준은 최소 20개. 연습 때 최고기록이 11개에 불과했던 나는 ‘10개만 하자!’는 마음으로 줄넘기를 시작했다. “… 열, 열하나, 열둘…” 어? 뭐지? “…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 내가 스무 개를? 그날부터였다. 스스로를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 여기게 된 것은.

그 자신감이 박살 난 건 대학교 축구 동아리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연습경기 때까지 몸이 가볍다가도, 총장배니 뭐니 하는 대회 이름만 붙으면 아주 죽을 쒔다. 죽 쑤는 나와 달리, 대회 때 오히려 더 날아다니는 몇몇을 보면서 ‘실전에 약한 타입’임을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축구는 예외일 뿐이라고, 다른 분야에서는 여전히 실전에 강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예를 들면 줄넘기 2단 뛰기라든지…).

이 책의 저자이자, 22년 동안 인기 축구팀 아스널을 지휘해온 감독 아르센 벵거는 그런 나의 뼈를 때린다. “축구야말로 그 어떤 심리테스트보다 사람의 성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종목이다.” 축구 경기 중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맞닥뜨린다. 왼쪽 vs 오른쪽, 패스 vs 드리블, 견제 vs 태클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축구 경기에서는 그 무의식적인 선택들의 총합이 그 선수의 스타일 혹은 경기력이 된다. 즉, 나는 실전에서 유독 안 좋은 선택을 많이 하는 타입인 것이다.

실전에 약하다고 연습만 할 수는 없다. 대회에 약하다고 대회를 안 나갈 순 없듯이. 그래서 나는 이제 전보다 더 공들여 실전을 준비한다. 체력/전술 훈련 외에도 선수들의 식단과 멘탈까지 케어하던 벵거 감독처럼. 축구뿐 아니라 세상일 대부분은, 줄넘기 2단 뛰기보다 훨씬 더 경우의 수가 많으니까.

  • <아르센 벵거 자서전> 아르센 벵거 | 한즈미디어 | 22,000원

[2]
<내향형 인간의 농담>

“나 또한 완전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내가 추구하는 것까지 불완전해질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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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력은 간단치 않다.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배우로 데뷔했고, 드라마 대본을 쓰다가 단편 영화도 한 편 찍었다. 그리고 펭수. 이슬예나 PD와 함께 만든 <자이언트 펭TV>로 ‘펭수 작가’가 되었다. 추천사를 쓴 <펭TV> PD가 “이토록 복잡하고 진지한 작가와 그토록 단순하고 유쾌한 펭TV를 기획했다니!”라고 놀랄 만큼, 책은 가볍지 않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펭수는 늘 진지했다. 무해하고 진지한 태도로, 우릴 웃겨줬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펭수를 사랑한 이유이자, 이 책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작가는 이 책이 ‘펭수 작가의 에세이집’인 동시에 ‘삐죽거리는 욕망들을 다루며 용케 한국 사회를 살아온 평범한 사람의 기록’이라 말한다. 삐죽거리는 욕망이라 함은, 뭐 이런 거다. 유명해지고 싶지만 아무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오르고 싶지만 언젠가 이 사회가 뒤집히길 바라는. 개인의 욕망, 특히 젊은 여성의 욕망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저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되고 싶은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쫓겠다는 그의 다짐을 읽다 보면 나의 욕망을 돌아보게 된다.

책에는 메모해두고 싶은 문장이 많은데, 저자처럼 농담을 좋아하는 내향형 INFP인 내가 꼽은 최고의 문장은 이거다. “약해빠진 그들이 서로의 어리석음을 함께 읽고 비웃어줄 수 있었다면, 삶의 짓궂음을 유머로 승화할 수 있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그럴 수 있다면…”

  • <내향형 인간의 농담> 염문경 | 북하우스 | 15,000원

[3]
<지브리의 천재들>

“영화가 히트하냐, 히트하지 못하느냐는 결코 신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끈기와 노력에 의한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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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게 없다고들 얘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밌는 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는(혹은 했던)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다. 상대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기에 공격의 적중률이 높고, 그렇다고 다신 안 볼 사이는 아니기에 눈살 찌푸려지는 막장으로 치닫지도 않는다. 그러니 개그맨 부부들의 티격태격 사랑싸움을 재미 포인트로 삼은 JTBC 예능 <1호가 될 순 없어>가 인기인 것도 납득이 된다.

한국에 최양락&팽현숙 부부가 있다면, 일본엔 미야&다카하타가 있다. 둘은 부부가 아니지만, 사사건건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롤 모델로 삼아 평생을 같이 일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양대산맥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다.

<지브리의 천재들>은 한 마디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이야기다. 고래는 앞서 얘기한 두 감독이고, 새우는 지브리의 프로듀서이자 이 책의 저자인 스즈키 도시오다. 특유의 장인정신과 예술적 감각으로 손만 댔다 하면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내는 두 감독이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어쩜 그리 괴팍하고 유치한지… 툭하면 삐지고 질투하고 고집부리는 ‘자강두천’이 귀엽다가도, 같이 일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온다(실제로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스태프들은 줄줄이 회사를 뛰쳐나갔다고…).

그래서 둘 사이를 오가며 지브리를 키워온 스즈키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두 천재가 훌륭한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호하게 ‘일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이것 또한 천재적인 능력이다. ‘지브리의 천재들’은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 <지브리의 천재들> 스즈키 도시오 | 포레스트북스 | 17,000원

[4]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나를 관찰하는 것은 몹시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뜻밖에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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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밑줄을 긋는다면, ‘그림 그리는 법’보다는 ‘겁내지 않고’에 긋고 싶다. 그림 스킬보다는 ‘나를 표현하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책이니까. 그림 스킬이 부족하면 잘 못 그린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지만, 나를 표현하는 데 겁을 내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나를 표현하기 겁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1) 소리높여 표현할 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저자는 말한다. “나의 평범함이 혼자 갖고 있을 때는 초라한 일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꺼내놓으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2) 새로운 걸 만들어낼 만큼 창의력이 풍부하지 않아서. 저자는 말한다. “개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3) 표현은 하고 싶은데 서툴러서. 저자는 말한다. “지금처럼 글을 적당히 쓸 수 있는 이유는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글을 많이 써본 사람이라 그저 익숙하여 그런 것이다.”

지금껏 내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은 주로 글이었고, 그래서 처음 디에디트 기사 커버 이미지를 직접 그려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주저했다. ‘난 디자이너도 아니고 그림도 못 그리는데…’ 첫 그림을 그리고 나서 걱정이 사라졌다. ‘난 어차피 디자이너도 아니고 잘 그리길 기대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괜찮겠구나!’ 그 후로 쭉 기사 커버가 될 표지를 직접 그리고 있다(다행히 아직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냐’라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앞의 몇 챕터를 읽고 나서는, 제목을 ‘겁내지 않고 글 쓰는 법’으로 바꿔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의 진짜 제목은 ‘겁내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다.

  •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이연 | 미술문화 | 15,000원

[5]
<아무튼, 클래식>

“좋아하는 마음이란 그 마음의 주인까지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까닭이
뒤섞여 어떤 장면처럼 남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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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분야의 입문용 책이라고 하면 보통 A to Z를 알려주기 마련이다. 언제 처음 만들어져 그동안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이 분야를 대표할 만한 사람과 결과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단계별로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면 좋을지 등등… 쉽게 말해 ‘교과서’ 스타일이다. 책 한 권으로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어떤 분야든 교과서와는 아무래도 친해지기 힘들다는 게 단점이다. 클래식에 입문하고 싶어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입문하지 못한 나에게는, 단점이 더 강하게 작용했나 보다.

<아무튼, 클래식>은 좀 다른 타입의 입문용 책이다. 클래식의 역사와 변천 과정, 클래식의 아버지와 어머니, 클래식에 입문할 때 꼭 들어야 할 앨범과 필독서 같은 건 없다. 대신 클래식이 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클래식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일상생활 속에서 클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이 주를 이룬다. 쉽게 말해 ‘일기’ 스타일이다. 이 책 한 권 읽고 클래식에 대해 아는 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클래식을 들으면 이런 점이 좋겠구나’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구독 중인 음원 스트리밍 계정에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고, 저자가 프랑스 여행 중에 들었다는 드뷔시의 프렐류드와 첫눈 오던 날 쓸쓸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그리고 정신이 복잡할 때 이 리스트를 재생한다. 아직 ‘입문했다’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클래식으로 내 삶의 풍경이 바뀌는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게 됐다.

  • <아무튼, 클래식> 김호경 | 코난북스 |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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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