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음식과 술에 관련된 콘텐츠라면 크게 개의치 않고 뭐든 쓰고 찍고 버무리는 에디터 손기은이다. 흰 눈이 쌓이면 나는 늘 흑맥주를 떠올린다. 강렬한 그 흑백 대비 때문인지, 폭신폭신 보드라운 질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강원도 여행 중 숙소에서 눈을 떴는데 사방이 설산으로 바뀐 것을 목도한 경험이 있다. 그 아름다운 병풍을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할 때 혀끝에서 자꾸 맴돌던 흑맥주의 기억 때문에 나는 요즘도 겨울이 되면 흑맥주를 찾는다.
말이 흑맥주지, 검고 짙은 색깔의 맥주의 종류는 꽤 다양하다. ‘흑’으로 퉁치기에는 족보가 꽤 복잡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에일도 있고 라거도 있다. 둔켈, 다크라거는 라거 스타일 맥주다. 스타우트, 포터라고 부르는 흑맥주는 에일 스타일 맥주다. 스타일이 다르니 입안에서의 묵직함도 다르고 넘어가는 매끄러움도 꽤 다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스타우트’와 ‘포터’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가 다르다뿐이지 거의 같은 형태의 맥주를 일컫는다. 이 두 단어의 뜻을 갈라보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는 건 앞에 ‘임페리얼’이 붙는지 안 붙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요즘 크래프트 맥주숍에서도 자주 보이는 이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기존 스타우트보다 더 묵직하고, 몰트의 맛과 향도 더 그윽해진 맥주다. 초콜릿, 에스프레소, 토스트, 토피넛 등을 연상시키는 향이 특징이며 오크통에 추가 숙성할 때도 많기 때문에 위스키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DNA가 점지해주는 확신의 픽(Pick)임에 틀림없다.
뽀할라(Pohjala)는 유럽을 기반으로 하는 집시 양조장으로 개성 있는 맛과 무엇보다 예쁜 라벨의 맥주를 만든다. 이 양조장의 발틱 포터나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자주 사 마시는데, 춥고 깊은 밤 이 진하고 묵직한 맥주 한 병이면 거창한 안주도 배경음악도 대화도 필요가 없다. 슈톨렌 정도를 곁들인다면 완벽한 12월 특식이 될 터이다.
만약 저녁 식사에 좀 묵직한 겨울 맥주를 매칭한다면 포쉐트(Fourchette)를 고르겠다. 흑맥주가 아니라 벨기에 트리펠(Tripel) 스타일 맥주이지만 알코올 도수 7.5도로 이 계절에 마시기 좋은 단단한 맥주다. 쇠고기와 채소를 올리브유에 빠르게 볶아 한 상을 차렸을 때 곁들여도 향이 밀리지 않아 좋아한다.
맥주는 사시사철 마시는 술이라고 여러 번 항변해 왔지만, 정말 추울 때 마시는 진하고 짙은 맥주야말로 제철 술이다. 이 맥주들을 마시면서 내가 쓴 책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를 되새김질하는 것도 좋고,
겨울마다 내가 은밀하게 즐기는 양말 쇼핑을 하며 마시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독일의 양말과 스타킹 전문 브랜드 팔케(Falke)는 지난 몇 년간 나의 양말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브랜드다.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몇 켤레씩 사두고 잘 보이지도 않는 첼시 부츠 안에 색깔별로 돌려가며 신었다. 얼마 전 국내에도 정식 수입이 된다는 걸 깨닫고 또다시 양말 쇼핑에 불을 붙였다.
발목에 착 감겨 올라오는 ‘코튼 블렌드’ 종류로, 양말 서랍에는 없는 특별한 색깔로, 고심을 거듭한 뒤 주문을 완료했다. 맥주와 양말로라도 이 겨울이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