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음식과 술에 관련된 콘텐츠라면 크게 개의치 않고 뭐든 쓰고 찍고 버무리는 에디터 손기은이다. 요즘은 작고 쓸모없지만 예쁜 물건들을 테이블 한쪽에 올려두고 술 한잔하는 낙을 하루의 끝에 보태며 열심히 살고 있다. 어제 산 것, 지난주에 산 것, 지난달에 산 것들과 두루두루 어깨동무를 하고서 한잔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끝난다.
잠들기 전에 살짝 마시는 술 한잔은 나에게는 수면 양말보다 더 소중한, 그야말로 ‘나이트캡(Night Cap)’이다. 머리 위로 꽃무늬 고무줄 모자를 뒤집어쓴 기분으로 포근하게 잠에 들 수 있도록 딱 한 잔, 기분 좋으면 슬쩍 두 잔 마시는 게 나만의 루틴이랄까. TV는 끄고, 조명은 한쪽 코너에 있는 것 하나만 켜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마신다.
오늘은 싱글 몰트위스키 부나하벤(Bunnahabhain)을 골랐다. 매년 이맘때쯤, 특히 10월의 밤공기 냄새만 맡으면 묘한 기대감과 절절하게 외로운 맘이 온몸을 뒤덮는 편이다. 밤새워 연애한 달도, 드럽게 차여본 달도 유독 10월에 많이 몰려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단맛, 짠맛, 매캐한 맛, 감칠맛 두루두루 꽉 차게 들어있는 부나하벤 12년을 안 고를 수가 없는 그런 온도와 날짜다.
부나하벤은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섬 ‘아일라(Islay)’에 증류소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목포, 신안 어디께에 있는 섬으로 이곳에서 만드는 위스키는 ‘피트향’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향을 뿜어낸다. 우리식으로 풀어 향을 설명하자면 병원 냄새, 정로환 향, 클럽에서 담배냄새에 쩔은 채로 집에 갈 때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도대체 이런 독특한 향이 나는 위스키를 도대체 왜 마시냐고 묻는다면, 조용히 아일라 위스키 한잔을 권하는 일밖에 나는 할 수가 없다.
부나하벤이 진짜 특별한 건 아일라 섬에서 만드는 위스키지만 정작 피트향은 쏙 빠져있다는 점이다. 기장 앞바다까지 가서 쇠고기 구워 먹고 앉아있는 소리 같은데, 부나하벤의 매력은 거기서 시작이다. 피트향은 없지만 매캐하게 깔려있는 스모키한 향, 바닷가 바람에서 느껴지는 살짝 짭짤한 맛, 첫입에서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향이 적절한 볼륨으로 아주 차지게 섞여 있다. “어? 이거 진짜 아일라 맞아?”라는 물음표가 머리 위로 떴다면, 이 한 잔의 맛과 향은 더 재밌어진다. 더 확실한 맛을 내기 위해 찬장에서 바카라(Baccarat)의 아를캥(Arlequin) 텀블러도 꺼내왔다.
이 부나하벤의 한 잔과 제대로 어울릴 것 같아서 열심히 공수한 안주가 있다. 연희동의 ‘롱보트 스모커(longboat Smoker)’라는 작은 공방에서 만든 훈제 연어다. 나무소품 공방 ‘우들랏’에 갔다가 발견한 가게다(우들랏은 사무실 한 켠에 두고 인감도장보다도 더 소중하게 챙기는 테이블 모빌을 구입한 곳이기도 하다). 가게의 거의 반절을 차지하는 크고 멋진 훈연기를 보고서는 ‘찐이다’를 속으로 외쳤다. 이 연어의 귀퉁이만 조금 떼어먹어도 바비큐 플래터 한 상을 받은 듯한 훈연 향을 흠뻑 즐길 수 있다. 가수 전소미의 아버지 매튜가 운영하는 가게라는 사실은 이 한 점의 맛보다 덜 흥미롭다. 샐러드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콜드 스모크드 연어도 판매하지만, 역시 옹골찬 맛이 깃든 단단한 질감의 훈제 연어가 위스키와는 더 잘 맞는 짝이다.
사진 속의 훈제 연어 한 덩어리는 족히 4명을 위한 위스키 안주가 될 수 있는 양이다. 물론 다른 3명은 커녕 단 한 명도 내 곁에 없지만, 10월의 밤공기에 훈연 향을 슬쩍 스프레이한 듯한 그윽한 혼술 식탁이 있어 다행히도 덜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