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랜만에 돌아온 호캉스의 요정 에디터H다. 한때 서울 시내의 호텔을 휘뚜루마뚜루 쏘다니며 소개하는데 재미를 붙였었는데, 이 취미도 한참 쉬었다. 그만큼 마음 가는 공간도 없었고 이탈리아 한 달 살기니 출장이니 밖으로 돌기 바빴다.
그러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전 직원이 긴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름 휴가 한 번 제대로 떠나본 적 없는 일개미 인생에 2주 가까운 자유 시간이라니. 오로지 휴가만 바라보고 불도저처럼 달렸다. 얼마나 숨 가쁘게 일했던지 지난 12월 한 달은 기억이 희미하다. 항상 잠이 모자랐지만 가슴 속엔 휴가를 향한 열망이 활활 타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 밤까지 촬영을 하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좀비 같은 몰골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떠오르는 순간 현실은 로그아웃이었다.
파리에선 달팽이 요리에 샴페인을 마셨다. 기차 타고 벨기에까지 가서 와플에 체리 맥주를 마셨다. 그림 같은 유럽의 휴가는 달콤하고 짧았다. 남은 일정이 줄어들수록 묘한 우울감이 밀려왔다. 떠날 때보다 곱절은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인천 공항에 컴백했을 때의 마음이란.
전쟁터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는 집 대신 호텔을 향했다. 휴가는 3일이나 남아있었고, 아직은 여행자이고 싶었다. 다음 행선지는 장충동의 신라호텔이었다.
파리는 다섯 번째였는데 오히려 신라호텔은 처음이었다. 서울신라호텔은 1979년에 개관한 오래된 곳이다. 개관 후 40년이 지났지만 수많은 세계적 행사를 치러내며 한결같이 럭셔리 호텔의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이제는 서울에도 포시즌스 같은 호텔이 즐비하지만 신라호텔의 위상은 여전하다.
캐리어를 두 개나 끌어야 해서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공항버스 정류장부터 호텔은 너무 멀었다. 전화를 거니 곧장 픽업 차량이 마중을 나온다. 그때 차에 실은 짐은 매끄럽게 내 객실까지 배달됐다. 픽업 차량에 올라탄 순간부터 물흐르듯 서비스의 바통터치가 이어졌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서 객실에 들어가기까지 한순간도 빈틈이 없었다. 신생 호텔에선 찾아볼 수 없는 정교한 서비스다.
낡은 건물이지만 객실 컨디션은 기대 이상이었다. 2013년에 반 년이 넘는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한 덕이다. 객실은 뉴욕 포시즌스 호텔을 맡았던 피터 리미디오스가 디자인했다. 내가 묵었던 객실은 비즈니스 디럭스.
파리에서 여행 비용 아낀답시고 숨 막히게 좁은 호텔에서 고군분투하다 와서인지 숨이 탁 트인다.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닿는 구조가 아니라 2인용 소파와 테이블로 거실 공간과 침실이 분리되는 구조다.
객실 입구를 따라 벽장을 짜두었는데 옷장과 금고, 냉장고와 커피포트 등의 비품이 깔끔하게 수납돼 있다. 가장 멋진 건 요트 콘셉트로 만들어진 프라이빗 바. 벽장 끝을 열면 숨어있던 바 공간이 나타난다. 비싸다는 걸 알면서도 미니바의 유혹이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호텔 내에 편의점이 없다.
객실이 조금 건조해서 요청했더니 바로 가습기를 가져다준다. 겨울엔 실내가 지나치게 건조한 경우가 많아서, 기껏 비싼 돈 내고 호캉스 다녀와서 목감기에 걸리는 일이 종종 있다. 부지런히 가습기를 요청하자.
충전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 오래된 호텔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다. 업무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책상 위에는 다양한 케이블이 구비되어 있다. 여기서 바로 HDMI 포트에 노트북을 연결하면 객실에 있는 TV에 화면 송출도 가능하다. 나는 이렇게 해서 넷플릭스와 왓챠 플레이를 하루종일 봤다. 침대 좌우의 서랍마다 콘센트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전자파가 나오든가 말든가 나는 아이폰과 떨어지면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전을 하지 않는 상태로 자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머리맡에 아이폰을 두고 쾌적하게 충전하며 잠들 수 있는 자유. 생각보다 이게 안 되는 호텔이 많다.
이틀 밤을 묵었는데 둘째 날 오후 내내 낮잠을 잤다. 시차 적응을 못한 탓도 있었지만, 침구가 너무 좋아서 누우면 몸과 마음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푹 잠기는 푹신함도 아니었고 오래 자도 편안한 잠자리였다.
게다가 맨살에 닿는 침구 소재의 느낌이 얼마나 좋던지. 살이 너무 감기지 않는 매끄러운 소재라 이불 속에 폭 싸여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다. 비스듬히 들어오는 오후의 해 덕분에 공기가 따뜻하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잠이 몰려온다.
낮에는 해가 찬란하게 쏟아져서 블라인드를 쳤다. 객실 분위기를 크게 좌우하는 고급스런 우드 블라인드였다. 나무 틈새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볕이 나태하고 기분 좋았다.
어메니티는 몰튼 브라운. 샴푸와 바디 로션이 정말 괜찮았다. 치약마저 내가 좋아하는 덴티스테.
이틀 밤 내내 마음껏 게으르게 지내느라 밤마다 룸서비스를 찾았다. 샐러드와 갈비 반상을 시켰는데 반찬까지 정갈하게 나온다.
둘째 날엔 아리아께의 일식 도시락을 먹었다. 1인용 도시락이 10만 원이니 가격이 높긴 하지만, 음식 하나하나가 맛이 좋았다. 게다가 예약하기도 힘든 아리아께의 요리를 객실에서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명성 높은 다이닝 역시 신라 호텔의 장점 중 하나다. 호텔 중식 레스토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팔선부터, 일식당인 아리아께, 프렌치 레스토랑인 콘티넨탈. 미슐랭 한식당인 라연까지. 굳이 아쉬움을 표하자면 괜찮은 바가 없다는 것인데, 그 정도야 망고 빙수의 명성으로 커버 가능하겠다. 하지만 난 빙수를 싫어한다.
아침을 먹는 편은 아니지만 호텔 조식은 거르지 않는다. 더 파크뷰의 아침 식사는 명성만큼 훌륭했다. 어지간한 호텔 뷔페의 디너보다 나을 정도다. 그래서 아침을 먹지 않는다는 3X년 평생의 신조를 잊고 폭식. 점심까지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었다.
참고로 지하의 베이커리 ‘패스트리 부티크’도 훌륭하다. 딸기 쇼트 케이크를 사와서 먹으며 영화를 보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아 얘가 먹으러 간 거야, 쉬러 간 거야”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 휴식에 대한 나의 지론은 이러하다. 마음 편한 장소에서 끝없이 맛있는 걸 먹고 배가 부르면 그대로 잠드는 것이 참된 휴식이 아닐까. 몸과 마음의 허기가 모두 채워져야지.
침대에 누우면 남산 타워가 선명하게 보였다. 에펠이 보이는 전망만큼이나 사치스러웠다. 훌륭한 휴가였고,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좋은 쿠션이었다. 오래된 호텔이 가진 향취와 현대적인 서비스의 조화가 돋보였고 말이다. 휴식이 많은 2020년 되길. 나도, 여러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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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