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서울에서 에디터B다. 한 달 살기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시칠리아가 낭만의 도시라면 서울은 불안의 도시니까. 불안이라는 장작을 태워 밝게 빛나는 도시. 고단한 일주일을 보상받기 위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살을 빼기 위해 런닝머신에 오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혼자만의 굴로 들어가 버린다. 모두의 마음속엔 불안이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시칠리아 한 달 살기의 좋은 점이요? 음…조바심이 안 들었어요. 그게 제일 좋았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조바심을 느낄 수도 없었던 거죠.”
시칠리아의 삶은 정말 그랬다. 와이파이 속도가 처절할 정도로 느리고 도시에 나가기엔 교통편도 좋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이유로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시칠리아가 아니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그곳이 어디든.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어디든.
하지만 서울에 오자 시칠리아에서 받은 에너지와 감정은 끊어졌다. 블루투스 해제하듯 아주 손쉽게.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돈을 더 벌거나 더 큰 명예를 가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거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더 불안한 걸 보면 말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시즌1 출연자가 2에 다시 출연한 느낌이 이럴까? 내 주변의 친구들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생활이 싫어서 서울을 떠났다. 여유 없고 각박한 삶, 스트레스를 견디는 일상, 도시의 빼곡한 인간들이 주는 답답함, 숨 막히는 바쁜 발걸음. 난 모든 것을 견디며 살고 있지만 타지로 떠난 친구들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시칠리아에 다녀오니 한적한 삶을 알 것 같기도 하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불안을 안고 살지만 이 기분이 싫지는 않다. 이런 내가 도시에 맞게 진화한 인간인지 퇴화한 인간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칠리아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계속 불안을 안고 있다고 했지만 그게 스트레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난 이제 조바심에 익숙해져서 큰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모두가 일과 삶의 균형을 노래하지만, 나는 그런 스타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시칠리아를 다녀온 직후에는 조금 공허했다.
로마에서 환승하는 순간부터 이유 없이 답답했다. 한국어가 많이 들렸기 때문에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7인분의 말만 들으면 됐는데 공항엔 한국인이 어찌나 많은지. 서울을 좋아하지만 서울과 가까워진다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한 달 만에 밟은 서울 땅은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추워졌다는 것만 빼면. 일주일 정도는 시차 적응을 하느라 몽롱한 상태였다. 그땐 몸도 마음도 시차 적응 중이었다. 집에 있는 게 어색했고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는데 출근을 하니 자연스레 시칠리아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이후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면 정말 달라진 게 없었다. 10시 반 출근, 1시 점심, 7시 반 퇴근. 모두가 일을 하고, 일에 쫓기고, 일을 쫓았다. 달라진 거라면 조금 추워진 날씨와 조용해진 사무실 분위기 정도.
지금도 한 달 살기 이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시칠리아 다녀온 거 어땠어?”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굉장히 공들여서 대답했었다.
“시칠리아? 너무 좋았지. 처음에는 한 달 살기 같은 거에 관심이 없었어. 어쨌든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거니까.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는 한 달은 처음이었어. 멤버들이 좋아서였던 것 같아. 시칠리아 아니라도 재미있었겠지.”
지금은 조금 다른 대답을 한다.
“아, 그 질문은 내가 서른 번쯤 받아서 이제 말하면서도 흥미가 없는데, 너한테는 처음 얘기하는 거니까 일단 열심히 말해볼게. 내 인생 가장 재미있는 한 달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금방 잊더라. 생각보다 아주 쉽게. 그게 아쉽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시칠리아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한 달 살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추천합니다 꼭 가세요 아니면 꼭 갈 필요는 없어요? 솔직히 모르겠다.
‘남녀 8명이 이탈리아 남부의 섬으로 떠나서 한 달 동안 살았대요. 그 경험 덕분에 그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목표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대요.’ 같은 건 디즈니 애니메이션 엔딩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우리네 삶은 디즈니보다는 차라리 봉준호의 영화 속 세계와 더 가깝지 않을까. 바꿔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달라질 거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거라면.
이쯤 되니 미안한 마음이 살짝 든다. “당신들 유튜브에서 그렇게 신나 보였잖아? 그런데 봉준호라구요?”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말을 덧붙이려고 한다. 디에디트 객원필자 전아론 작가가 내게 해준 말이다.
“여행이 길수록 그 안에서의 낭만은 나중에야 빛나더라고요. 환할 때는 안 보이다가 불을 꺼야 반짝거리는 야광별 스티커처럼요.”
어쩌면 지금은 내가 빛나고 있어서 시칠리아의 기억이 흐릿해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 언젠가 내가 칠흑 같은 암흑에 들어갔을 때 그 추억이 야광별처럼 반짝거리며 밝혀주지 않을까. 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일단은 달려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좌절하는 봉준호 영화든, 반드시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든. 어쨌든 중반까지는 멈추지 않고 달려가니까, 그 엔딩이 무엇이든 함께 달려갈 사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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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