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디에디트 에디터B다. 첫 출근을 하기 전에 굉장히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접시를 뒤집어놓은 듯 평평한 섬,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마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 가파도가 그 주인공이다. 그 섬에서 1박 2일을 머물렀다.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난데없이 가파도에 가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현대카드 때문이었다.
현대카드와 제주시, 원오원건축사무소는 2013년부터 지역재생사업으로 가파도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 중에는 내가 묵을 숙소인 가파도 하우스도 있었다. 진심으로 목적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내가 현대카드 덕후인 탓이다.
가파도는 제주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제주도 남단에 있는 모슬포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가파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린 뒤 처음 마주하는 곳은 가파도 터미널이다. 이 터미널 역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로 지어진 곳이다.
가파도 하우스를 관리하시는 분이 바로 이 터미널에 계신다. 터미널 안에는 매표소도 있지만 그 옆에는 카페도 작게 마련되어있는데, 관리자가 커피를 내리고 계시더라.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담당하는 남자가 나오는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 숙소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짐은 카페에 두고 1시간 뒤에 들어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때마침 가파도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인 청보리 축제를 하고 있었고, 점심도 먹고 보리밭도 구경할 겸 길을 나섰다.
보리밭은 터미널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가파도의 2/3가 보리밭이라 굳이 찾을 필요 없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놀라운 풍경이었다. 삼십 평생 살면서 지평선, 수평선은 많은 봤지만, 보리밭선은 처음 봤다. 끝없이 이어진 보리밭은 장관이고, 절경이고, 신이 주신 선물이었다.
특히 바람이 불면 보리끼리 부딪히며 ‘사삭’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정말 편해지더라. 참고로 이번 여행은 2명의 친구와 함께 갔는데 그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하늘공원 갈대숲과는 비교도 안 된다”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실 가파도에 오기 전까지 좀 불안하긴 했다. 현대카드를 좋아해서 가파도 하우스에 가보자고 했는데, 나도 가파도는 처음이니까 도박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파도에 간다고 하면 “거기 뭐가 있는데?”, “가파도가 어디 있는데?”같은 질문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가파도가 예쁜 건 나 같은 젊은이들만 몰랐던 것 같다. 모슬포 운진항에서 가파도로 가는 배를 탔을 때도 빈좌석이 보이지 않았는데 90%의 승객이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어르신들이었다. 이미 그 분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한 관광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주의할 점을 잠깐 알려주자면, 가파도로 가기 위해서는 2-3일 전 가파도 여객선에 전화해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나는 하루 전날 예약을 했는데 3시 타임 말고는 전부 매진이 되어서 하마터면 못 갈 뻔했다. 배는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지만, 날씨가 궂으면 출항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날짜를 잘 정해서 가도록 하자.
섬이 크지 않아서 느린 걸음으로 30분이면 가로지를 수 있었다. 가파도에도 식당들이 몇군데 있는데 해물짬뽕이나 해물짜장을 많이 팔더라. 아낌없이 넣어주는 해산물 덕분에 짬뽕국물맛이 기가 막혔다. 고생해서 맛있는 건지, 경치가 좋아서 맛있는 건지 몰라도, 한라산 소주와 같이 먹으니 쭉쭉 들어갔다.
가파도 하우스는 총 여섯 동이다. 그중 내가 묵었던 곳은 C동으로 눈앞에 바다가 보이는 가장 비싼 곳이었다. 가파도 프로젝트 1주년이라 할인 가격이 적용되어 1박에 15만원이었는데, 원래 가격은 20만원. 독채에 4인까지 묵을 수 있으니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숙소에 대한 첫인상은 ‘생각보다 고급스럽다’였다. 1시간 정도 둘러본 가파도의 시골스러움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안 어울린다는 느낌은 아니다. 화려하지 않고 미니멀한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과 오버랩되기도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TV가 없다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다 보면 자연스레 TV를 켜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현대카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홈페이지에서도 가파도의 잔잔함을 온전히 느끼고 가라는 의도라고 소개해놓았다. TV가 없는 대신 책과 오디오가 있다.
하지만 내가 묶었던 C동에서는 아쉽게도 블루투스 연결이 원활하지 않았다. 1분쯤 들으면 연결이 끊어져서 결국 우리는 비디오도 오디오도 없는 곳에 갇힌 듯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멍 때리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지만.
또 하나 아쉬운 점! 4인까지 가능한 숙소이지만 침대는 2인용 침대 하나뿐이다. 나머지 2명은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야 한다. 홈페이지에 다 나와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침실 뷰가 꽤 괜찮은데, 일행의 절반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게 참… 그런데 화장실은 또 친절하게 두 개나 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불만이 없었고 멋있는 공간임은 확실하다. 테이블과 의자는 매터앤매터의 제품을 썼고, 전기 포트는 무인양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납공간을 많이 만들어서 최대한 미니멀하게 디자인하고, 따뜻한 조명으로 포인트를 준 점을 보니 꽤 신경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도 하우스에는 조리 공간이 없다. 요리를 해 먹기 위해서는 숙소 이용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가파도 하우스 키친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 역시 숙소 관리자에게 연락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열쇠로 열어주신다.
가파도 안에도 편의점이 있긴 하지만, 모슬포 운진항 근처 홍마트에서 사는 걸 추천한다. 마트에서 흑돼지, 채소 같은 메인 재료를 사고 가파도 편의점에서는 술 정도만 사도 괜찮을 것 같다. 참고로 편의점이라 해도 저녁이 되면 문을 닫으니 술이 부족할 것 같으면 미리 사놔야 한다.
키친에는 테이블이 3개 있다. 이 날은 우리 팀 밖에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괜찮았는데, 만약에 3팀이 한꺼번에 몰리면 동선이 너무 복잡할 거 같더라.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고, 익혀 먹거나 데워먹는 정도의 간단한 요리가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흑돼지 오겹살을 구워먹었는데 환풍이 되지 않아서 모든 문을 개방하고 먹어야 했다. 다른 손님들이 오기 전에 고기를 빨리 익히려고 15분 요리 대결을 하듯조마조마하게 먹었다. 몇시에 손님들이 이곳을 이용하는지 공지해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일회용 제품은 없어도 된다. 수저, 잔, 그릇은 충분해서 좋았다.
제주도에 갈 계획이 있다면 하루 정도는 가파도에 할애해보는 건 어떨까. 가파도에는 프랜차이즈 카페도 없고, 24시간 편의점도 없고, 빛나는 네온사인도 없지만, 고요함과 칠흑 같은 어둠이 있다. 외딴 섬에 고립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