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디에디트 외고 노예 김작가다. 오늘은 회현동의 조용한 전시공간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름은 피크닉. 나는 이곳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처음 알았다. 어느날 갑자기 타임라인에 비슷한 사진이 하나 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에 piknic이라고 적힌 글자.
류이치 사카모토 전시가 열리고 있는 피크닉 건물의 루프탑이다. 내가 이 열풍에 빠질 수 없지. 당장 피크닉이 있는 회현동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인스타그램에 유독 루프탑 사진만 많은 이유를. 그곳이 예뻐서이기도 하지만, 전시장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전시회 내부사진을 대방출한다. 미리 촬영 협조를 구하고 내부 사진을 마음껏 찍었다. 하지만 전시장 내부가 워낙 어두워서 심령사진 같다는 게 함정. 현장의 분위기는 글로 느껴주시고, 끌림이 있었다면 직접 가보시길.
여름 하늘이 공활한 날, 회현동 피크닉에 다녀왔다.
피크닉 가는 길은 그 이름처럼 ‘소풍’같은 느낌을 준다. 회현역에서 5분 정도 걸어가는 거리는 충분히 낯설었다. 소풍이라고 하면 엄마의 손을 잡고 가깝지만 잘 모르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 같아서 괜히 설레곤 한다. 이날은 전시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면 평생 오지 않았을 것 같은 동네라, 가는 길부터 들떴다.
피크닉으로 가는 입구 근처에는 울창한 느티나무가 건물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주변 풍경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갈색 벽돌과 큰 느티나무를 보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폴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잠깐 전시를 보기 전에 건물 및 부대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건물은 1970년대 만들어진 제약회사의 사옥이었다고 한다. 아쉽다. 아직까지 그 회사가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한국에서 가장 힙한 제약회사였을 텐데. 건물 옆에는 그리 크지 않은 온실이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 LIFE, LIFE> 전시는 이름처럼 그의 인생을 볼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다. 사카모토는 꽤 유명한 영화 음악감독이지만, 몰라도 괜찮다. 이름이 낯선 사람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아!’할 정도로 음악은 더 유명하니까. <마지막 황제>로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남한산성>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무려 데뷔 4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되었다.
처음으로 관람한 건 <INSEN-LIVE PERFORMANCE>라는 작품이었다. 가로로 긴 스크린 오른쪽에서 사카모토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고, 반대편에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바 노토.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피아노 연주를 하는 동안 알바 노토는 그 소리를 원자 단위로 분해해 다양하게 변형시켜 노이즈의 형태로 만들어낸다.
어렵다고 생각된다면(저도요), 잠시 오른쪽으로 자리를 이동해 영상을 감상하자. 알바 노토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인터뷰 영상이 태블릿에서 재생되고 있다. 헤드셋을 끼고 작품의 의미에 대해 들어보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다음은 <올스타 비디오>라는 작품이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이름, 백남준과 함께한 작업이다. 사실, 모두가 백남준을 알지만 백남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백남준이 차지하는 현대예술의 위치와 상징’ 같은 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의 성리학적 존재론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천 원과 오천원 지폐를 쓸 수 있듯이, 백남준을 몰라도 작품 감상에는 무리가 없다.
‘올스타 비디오’는 백남준이 문화 전반의 여러 팝스타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인터뷰한 비디오 작품인데, 한쪽 TV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가 나오고, 다른 TV에서는 존 케이지, 줄리언 백 등을 인터뷰한 비디오작업이 나오고 있었다.
전시를 방문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딱 하나가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년에 발표한 앨범 <ASYNC> 듣고 오기. 류이치 사카모토가 8년 만에 제작한 앨범으로, 전시의 여러 작품이 이 앨범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앨범 제작을 준비하다 암 진단을 받고 즉각 하던 일을 중단했다. 그리고 당시 만들었던 스케치는 모두 폐기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곳에 전시된 책, 악보, DVD는 앨범을 제작하며 영감을 받았던 것들이다.
그 옆을 보면 하얀색으로 발자국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위로 올라서보자. 정수리 위에서부터 영어가 들리며,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든다. 문구가 인상적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글귀를 보면 울컥한다고 한다.
그 소리가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해서 예술의 ‘ㅇ’도 모르는 나도 괜히 “거! 어! 인생 한 번 사는 거! 역사에 한 획을 그어보자!”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 옆으로는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가 상영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화인데, 10여 분짜리로 편집된 버전이다. 편도선 안쪽의 암 3기 판정을 받고, 림프절까지 전이될 수 있는 상황. 사카모토가 암 발병 후 느낀 감정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소리를 채집하여 음악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며 예술을 하는 그를 보니 나는 감히 예술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ASYNC – VOLUME>은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듀오 자쿠발란이 제작했다. 그들은 주로 사진과 영화의 경계를 교차하는 예술 작품을 제작한다는데, 전시된 작품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벽에 설치된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고, 주전자가 끓고 있다. 소리와 함께.
그래서 이 작품을 감상할 땐 기기에 귀를 가까이 대고 들으며 감상하면 된다. 영상에 있는 공간들은 실제로 사카모토가 <ASYNC> 앨범을 제작할 때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그 옆으로 나가 검은색 문을 열면 <ASYNC – SURROUND>를 감상할 수 있다. 총 68분짜리 비디오인 이 작품은 타카타니 시로가 제작했다. 타카타니 시로는 미디어를 이용한 퍼포먼스와 설치 작품을 제작하는 아티스트. 지금까지 류이치 사카모토와는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해왔는데, 대표적으로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창작한 오페라 <라이프>의 영상을 담당했었다. 서라운드라는 이름처럼 이 방의 가운데에 앉아 영상과 함께 소리를 들으면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만나게 될 작품은 <WATER STATE1>이다. 아래에는 검은색 수조가 있고, 천장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천장에는 324개의 노즐이 있는데 그곳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물은 일정한 양으로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방울씩 미세하게 떨어지다가 소나기가 온 것처럼 수백개의 물방울이 떨어질 때도 있다. 지구의 기상 데이터를 이용해 패턴을 반영했다고 한다. 한 차례의 사이클을 모두 보기 위해서는 약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마지막 작품은 <LIFE – FLUID, INVISIBLE, INAUDIBLE>. 공중에는 세 개의 투명한 수조가 매달려 있고, 그 안은 안개로 가득차있다. 멀리서 보면 세 개의 수조는 빨갛게 파랗게 변한다.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 누워야 한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다. 그래서 쿠션도 준비되어있다. 수조 아래에 누워서 천장을 보면 그 수조가 스크린이 되어 텍스트가 보인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간다면 서로의 몸에 비친 텍스트를 읽으면 로맨틱하겠다. 마지막으로 옥상으로 올라가면 비로소 전시가 끝난다. 굿즈샵과 사회운동가로의 사카모토의 삶이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처음에 보여준 바로 그 사진 속, piknic 간판이 나온다. 이제 당신은 인증사진을 찍을 자격이 있다. 찰칵찰칵!
<류이치 사카모토 전>은 누구나 가도 좋은 전시이지만, 특히 직장인에게 좋을 것 같았다. 평일 저녁에 퇴근을 하면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피크닉에서는 직장인을 위해 밤 9시까지 전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바 피크닉에서 내츄럴 와인을 캬아아. 상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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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