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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연필 나이트

난 어릴 때부터 색연필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스위스제 64색 색연필은 내 자부심이었다. 색연필은 정직했다. 시간을 들이면 들인 만큼 멋진...
난 어릴 때부터 색연필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스위스제 64색 색연필은 내…

2017. 09. 19

난 어릴 때부터 색연필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스위스제 64색 색연필은 내 자부심이었다. 색연필은 정직했다. 시간을 들이면 들인 만큼 멋진 것들이 나왔다. 한참을 몰두해 연필 끝이 뭉툭해질 때까지 세밀한 선을 덧그려 색을 만드는 시간. 그게 참 좋았다.

조금 의욕이 꺾인 나날이다. 요즘은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멋진 표현들을 쓰던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고 가을을 타는지, 서른을 타는지. 애어른 같은 한숨을 종일 뱉어 놓는다.

이럴 땐 몰두할 일이 필요하다. 냉큼 앱스토어에 들어가 드로잉 앱을 하나 샀다. 사실 내 아이패드 프로에는 지금도 드로잉 앱이 충분하지만, 지름은 늘 운명 같은 법.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끌려서 산다. 연애랑 똑같다. 하루 불타고 사라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잘 맞으면 진짜 운명인 거고.

Colored Pencil_6

오늘 내 선택을 받은 앱은 ‘Colored Pencil’. 이름이 곧 내용. 색연필 앱이다.

 IMG_0015en

색연필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른 기능은 없다. 썩 엄청난 앱이라고 보긴 어렵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들쑤신 건 이 쿨할 정도의 심플함. 적재적소에 배치된 최소한의 기능. 색연필 툴에서 컬러를 고르면 왼쪽에 수십 개의 브러쉬 팔레트가 자리하고 있다. 얼핏 복잡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별거 아니다. 내가 고른 컬러의 톤에 맞춰서 밝기와 굵기가 다른 브러쉬가 종류별로 표시될 뿐이다. 그 밑엔 지우개 툴과 문대기(이름을 모르겠다) 툴이 있다.

색연필 채색의 매력은 섬세하게 명암을 넣을 때의 쾌감이다. 브러쉬 팔레트에 자동으로 명암별 브러쉬가 표시되기 때문에, 거기서만 컬러를 잘 골라다 써도 그럴싸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Colored Pencil_2

그림을 처음 그릴 땐 역시 정물화라고 배웠다. 눈앞에 있는 걸 그려보자. 방금 먹은 밥그릇이 처연하게 서 있다. 그 모습을 그려본다. 그래도 밥이 소복히 쌓인 게 보기 좋을 것 같아서 밥은 상상해서 그려 넣는다. 우리집 밥그릇을 이렇게 유심히 살펴본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년을 넘게 쓴 그릇인데 꽃무늬가 낯설어 보인다.

Colored Pencil_4

앨범에 저장된 사진을 선택하면, 스케치처럼 만들어주는 기능도 있다. 사진에 따라 결과물이 아주 그럴싸하게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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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문대는 툴’은 정말 만족도가 높다. 색연필로 그리다보면 채색이 너무 날카롭게 될 때가 있는데, 적당히 질감을 죽여서 컬러를 블렌딩해주는 툴이다. 채색을 한번 부드럽게 문대준 후에, 다시 펜선의 질감을 살려서 컬러를 덧입히면 여러가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30분 동안 집중해서 사과를 그렸다. 그림자와 어두운 부분은 잘 문대고, 밝은 부분은 펜선으로 잘 긁어주는 게 포인트다. 말해놓고 나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려보시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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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Colored Pencil 앱에 기본으로 들어있던 드로잉이다. 색연필 특유의 연약하고 섬세한 느낌이 좋다. 정말 종이 위에 색연필로 사각사각 그려 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연필을 눕히면 부드럽고 굵은 펜선이 그려지는 것도 똑같다.

최근에 이렇게 고요하고 즐거운 시간이 있었나 싶다. 에디터M도 요즘 종종 취미로 드로잉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애플펜슬 이야기를 한다. 좋은 도구가 근처에 있다는 건 언제든 캔버스를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지난 주말엔 온갖 좋은 카메라를 두고, 만 사천 원 짜리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들고 외출했다. 그리고 오늘밤엔 애플펜슬로 그림을 그린다. 이상한 심보라고?

사람들은 디지털이 아날로그의 감성을 앗아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에도 감성은 있다. 손에 나무 색연필을 꼭 쥐고, 숨소리도 죽인 채 사각사각 펜 끝을 움직이던 그 순간의 경험을 그대로 옮겨올 수 있다면. 그 느낌만 안다면.

Colored Pencil

Store – iOS
Point –  할아버지가 사주신 색연필보다 색이 많아
Price –  2.19달러
Size – 31.7MB
Download – 클릭!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