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H다이어리] 어른의 기분

어른이 되면 시간과 돈을 바꾸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른이 되면 시간과 돈을 바꾸는 법을 배우게 된다

2017. 09. 06

H 다이어리
날짜 : 2017년 9월 5일
날씨 : 침 뱉듯 비가 오고 흐림

간만에 돌아왔다. 문득 우울한 날이면, 발작처럼 연재하는 코너 H다이어리. 내 일기장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니 깜찍한 관심종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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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진짜 어른이 됐구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상상 속의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구나. 사실, 난 ‘어른’이라는 호칭이 새삼스러운 나이인데도 말이다. 계기는 별거 아니었다. 출장지에서 밤새 기사를 쓰고 있었고,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쯤이 되어서야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낯선 미국땅. 문을 연 식당이 있다고 해도, 밤늦게 혼자 나갔다 올 자신이 없었다. 타지에서 배를 곯고 있으려니 점점 침통해졌다. 잠이 모자라 마신 커피 외에는 배를 채울 게 없었다. 호텔방에 비치된 책자를 뒤지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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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를 좋아하는 에디터H…]

룸서비스로 이름이 요란한 파스타와 버섯 요리를 시켰다. 마실 것이 없어 미니바도 털었다. 카드값이 걱정되긴 했지만, 만족스런 식사였다. 마트에서 사오는 것보다 서 너 배는 더 치뤘을 캔맥주 맛이 그렇게 청량할 수가 없었다.

배가 불러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겁도 없이 룸서비스 시켜 먹을 생각을 했구나.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문득,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내 첫 해외여행은 홍콩이었다. 일행 중 내가 막내였고, 모든 것이 신기했다. 호텔 미니바조차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콜라를 마셔도 되냐고 물었더니 같이 갔던 언니가 그랬다. 그거 엄청 비싸니까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단호했는지 잔뜩 겁을 먹고 콜라캔을 원래 자리에 넣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언니들과 호텔 앞 편의점에 가서 콜라와 주전부리를 사왔다. 밖에 나가면 이렇게 싼값에 콜라를 살 수 있는데 누가 비싼 값을 내고 호텔 냉장고에 있는 걸 마실까? 아주, 아주 돈 많은 사람들이나 그러겠지. 세상은 참 신기해. 스무 살을 막 넘긴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호텔 냉장고에 있던 콜라와 편의점에서 사온 콜라를 착각해서 바꿔 마신 까닭에 미니바 가격을 물어내야 했다. 일행이었던 언니가 대신 내줬기 때문에 미니바의 콜라가 얼마나 비쌌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후로 십 년이 넘도록 내게 호텔 미니바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금단의 냉장고에 손을 뻗어 캔맥주를 꺼내 꿀꺽꿀꺽 마시는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런데 손을 뻗치고 나니 별일 아니었다. 만 원짜리 캔맥주를 마셔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화로웠다. 행복을 돈으로 산, 어른의 시간이었다.

에디터M에게 물었다. 너는 언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껴? 시덥잖은 질문이라고 힐난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대답해준다.

“난, 엄마아빠랑 밥 먹고 나서 내가 계산할 때 그런 기분이야.”

그리고 우린 어른이 된 것 같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 이름으로 첫 대출을 받았을 때. 일 때문에 시간이 급한데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모범택시를 잡아 탔을 때. 할머니에게 진짜 진주 목걸이를 사드렸을 때. 룸서비스를 시켰을 때. 엄마 아빠와 첫 해외여행을 갔을 때. 둘이서 비슷한 경험을 늘어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땐 상상하지 못했던 사소한 순간이 모여서 어른이 되는 모양이라고.

이상하게도 전부 ‘돈’이 가져다주는 순간이었다.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서? 아니, 아닐 것이다. 어른이 되면 시간과 돈을 바꾸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한 순간을, 속상하고 힘든 마음을, 지친 퇴근길을 소비로 메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건 아주 얄궂은 일이다. 왜냐면 그 돈은 모두 내 시간과 맞바꾼 결과니까. 그리고 공평하게도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가혹하다.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날이 있을 것이다.

가끔은 치사하고 숨 가쁜 날들도 있지만, 호텔 미니바처럼 호사스러운 순간도 온다. 어느 비참한 날 비상금처럼 꼬불쳐둔 자존심을 야금 야금 꺼내 먹으며 사는 일. 순간순간 어린 아이가 되어 ‘어른의 기분’을 만끽하는 일.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어설픈 일이구나. 여러분이 어른이 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