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헤어질 결심>, 붕괴되거나 채워지거나

안녕,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모호한 영화다. 박찬욱이 대표로 있는 모호필름에서 만든 영화 아니랄까 봐 모호하게...
안녕,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모호한 영화다. 박찬욱이…

2022. 06. 21

안녕,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모호한 영화다. 박찬욱이 대표로 있는 모호필름에서 만든 영화 아니랄까 봐 모호하게 흘러간다. 안개가 잔뜩 낀 절벽 끝에 선 두 사람이, 방향을 모른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처럼 위험하고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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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산 정상에서 남자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실하지 않다. 유일한 용의자는 남자의 아내 서래(탕웨이).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서래를 심문한다. 남편의 죽음에 슬퍼하기는커녕 웃음을 보이는 이 여자. 해준은 서래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서래 역시 마찬가지다.

*이 리뷰에는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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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은 멜로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형사가 주인공이고 범인을 찾지만 멜로다. 칸 영화제에서 어느 외신 기자가 “50% 수사 50% 로맨스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해 박찬욱은 “100% 수사 100% 로맨스”라고 답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니 왜 그렇게 말한지 알겠다. 형사가 용의자를 심문하고 의심하고 관찰하는 일이 로맨스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래에게 질문하고, 서래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하루종일 서래를 생각한다.

영화 초반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취조실에서 해준이 서래를 심문하다가 저녁 식사를 하자고 말하며 밥을 시키는데 그 밥이 고급스러운 모둠 초밥이다. 마주 보며 함께 초밥을 먹고, 물티슈로 함께 테이블을 닦는 장면은 마치 연인이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모둠 초밥을 먹는 거냐며 어이없어하는 후배 형사의 반응이 웃기다). 초중반에는 그런 모호한 장면들을 보는 게 귀엽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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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박해일의 캐릭터다. 해준은 형사지만 한국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형사와 다르다. 해준은 언제나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양복을 입는다. 후배 형사가 용의자를 심문할 때 폭력을 쓰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친절한 형사다. 주머니가 18개나 있는 옷을 특수 제작해서 입고 다니고 가제트 형사처럼 온갖 도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조직에서는 자신만 다른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외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서래를 보고 첫눈에 끌렸을지 모른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으니까. 해준은 서래에게 MBTI가 뭐냐고 묻진 않았지만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고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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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안개 같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봤을 때는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만 속마음을 드러내는 사람. ‘안개’는 영화 내내 중요한 소재로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해준의 아내 정안이 있는 도시는 이포군으로 안개가 많이 끼는 곳이다(두 사람은 주말부부다). 우연히 동네 시장에서 서래를 만난 정안은 이포군으로 왜 왔냐고 묻는다. 서래는 안개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그러자 정안은 “여기 사람들은 안개 때문에 여길 떠나려고 하는데 안개 때문에 왔다니…진짜 이유가 뭐예요?”라고 말한다.  그 안개가 해준을 말하는 것임을 정안은 몰랐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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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은 슬프고 불쌍하고 기구한 운명의 두 사람에 대한 영화다. 해준이 서래에게 감정을 토해내듯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하는 형사 일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여자(서래)에 미쳐서 다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붕괴의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었던 서래는 그 뜻을 인터넷에 검색하고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직 영화를 못 본 분들을 위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는데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그리고 서래는 그 대화를 녹음했다. 서래는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그 말을 해준과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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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해준의 그 솔직한 말들을 사랑한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해준의 전체 대사를 들으면 사랑한다는 말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해준은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냐”고 되묻는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꼭 사랑하는 건 아니다. 사랑은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고, 억지로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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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서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랑하고 있었다. 반대로 서래의 남편은 시큰둥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행동에서는 사랑이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을 했냐는 해준의 얘기를 듣고 서래는 중국어로 나직이 읊조린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두 사람의 사랑은 비슷하게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도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두 사람은 모두 채워졌다가 붕괴되었지만 속도가 달랐다. “어떤 사람은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어떤 사람은 잉크처럼 천천히 번진다”는 해준의 말처럼 두 사람의 사랑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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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보며 사랑만이 줄 수 있는 것과 사랑이 남기는 흔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마음을 가득 채운다. 무엇으로도 채워주지 못한 마음을 사랑이 충만하게 채운다. 그래서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함이 남는다. 사랑만이 가득 채웠던 자리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일 거다. 극 중에 잠깐 등장하는 박정민의 대사도 사랑으로 인한 채워짐과 공허함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놓치지 말고 자세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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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가 끝나고 용산역에서 성수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붕괴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 붕괴가 일어날까. 붕괴되기 위해서는 일단 세워져야 한다. 애초에 쌓여있거나 세워지지 않은 것은 붕괴되지도 않는다. 서래와 해준의 엇갈린 사랑은 왜 붕괴하고 말았는지, 어떤 사랑이 붕괴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퇴근길이다. 아, 그래서 영화가 재밌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주 좋았다. 또 보고 싶다.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