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아버지, 판교 쪽에 땅을 사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2. 01. 27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 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도 만들어 보내고 있다.)

관심사가 바뀔 때마다, 읽는 책도 바뀐다. 고르고 보니 이번 책 5권은 나의 최근 관심사로 연결되더라. 내 글과 고른 책들이 부디 디에디트 독자 여러분의 고급 취향에 부응할 수 있기를… (지난달 몇몇 분이 댓글로 감상을 남겨주셔서 읽으며 참 행복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1]
<세대주 오영선>

“어른이 되고 나서 돈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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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가수 이름은 강백수.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만나러 가고픈 사람은 부모님이다. 아직 건강하던 30대의 엄마를 만나면 이 말을 전하고 싶어한다. “우리 걱정만 하지 말고 엄마도 몸 좀 챙기면서 살아요. 병원도 좀 자주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한창 잘나가던 30대의 아버지에게는 곧 닥칠 미래를 스포한다. “6년 후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그리고 덧붙이는 말. “차라리 잠실 쪽에 아파트나 판교 쪽에 땅을 사요.”

강백수가 노래에 부동산을 녹여냈다면, 소설 <세대주 오영선>은 부동산을 전면에 내세운다. 등본이나 임대차계약서에서나 보던 단어 ‘세대주’가 제목에 떡하니 붙어 있다. 소설 안에는 청약, 보유세, 실거래가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생소하다. 이 생소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동안 부동산, 세대주 같은 얘기가 소설에서 다뤄진 적이 없었으니까. 왜지? 집 얘기, 아파트 얘기는 진작부터 다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국어 시간에 우리는 분명 이렇게 배웠는데. “문학 작품은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 반영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사이에도 시대는 계속 변한다. 이제 잠실이냐 판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서울이기만 하면 된다. 경기도도 괜찮다. 강백수의 노래가 요즘 만들어졌다면, 가사는 바뀔 것이다. “아버지, 빚을 내서라도 뭐든 사요.”

소설은 재밌다. 개인적으로 결혼 후 했던 고민들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상황과 닮아 있어서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불안해진 나는, 올해 나올 사전청약 물량과 예상 후보지를 검색한다. 한숨과 함께 노래가 절로 나온다.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 <세대주 오영선> 최양선 | 사계절 | 12,000원

[2]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긁어야 하는 가려움과 같다.
이런 이야기는 전형적이면서 특별한 감정을 영원히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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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새해 목표가 있다. 단편소설 한 편 완성하기. 소설을 쓴다는 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내가 만든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세대주 오영선>처럼 현실을 닮았을지, 현실 중에서도 특히 어느 부분에 줌인할지. 나의 과거가 녹아 있을지, 나의 꿈이 녹아 있을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일지도 궁금하다. 커리어를 글로 쌓았으니 영화나 음악보다는 소설이 더 가깝게 느껴지지만, 가깝다고 손이 닿으리란 보장은 없다. 닿는지 안 닿는지 확인하려면 손을 뻗어보는 수밖에. 손을 뻗기 전에 책부터 펴는 고약한 버릇은 언제쯤 고쳐질까.

먼저 집어 든 책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은 겁을 준다. “글쓰기 재능이란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 말솜씨, 상상력, 스토리텔링 능력, 이야기 구조 및 리듬에 대한 감각, 여기에다 아직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수많은 다른 능력까지 더해야만 나올 수 있는 재능”이라고. 숙제도 같이 준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것”이며, “그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이 지닌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다른 작가들은 무슨 재능을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두 번째 책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를 집어 들었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한 편씩 골라 싣고, 좋아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훌륭한 소설 열다섯 편을 모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더 알고 싶은 건 ‘좋아하는 이유’ 쪽이다. 어떤 재능을 발휘하건 간에, 소설 쓰기의 최종 목표는 ‘좋아하게 만들기’일 테니까.

  •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레이먼드 카버 외 16명 | 다른 | 17,000원

[3]
<결제의 희열>

“쇼핑은 단순히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게 다가 아니다.
살까 말까 수많은 고민과 정보 수집이 합쳐진 행위다.”

“그렇게나 좋다고 아내에게 자랑했던 신체 신호 감지 기능은
첫날 이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뭐 어떤가, 애초부터 예뻐서 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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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의 희열>을 읽으며 디에디트 에디터B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에디터B는 내가 <대학내일>에 썼던 글을 재밌게 읽었다며, 기고를 제안했다. “주로 어디에 돈을 많이 쓰세요? 그걸로 글을 써주시면 좋겠는데…” 난 옷이나 신발도 잘 안 사고, 여행도 잘 안 가고, 식당도 가던 곳만 계속 가고, 지난달에 산 맥북은 가능한 오래 쓰고 싶고… 그렇다고 교통카드 충전비나 스마트폰 통신비로 매달 글을 쓸 순 없잖아?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것밖에 없었다. “책은 자주 사요…”

직장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책 사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어뒀던 책을 5만 원에 맞춰 주문하고(5만 원이 넘으면 굿즈, 마일리지 등 여러모로 유리하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여유로이 거닐다 한 권 집어 들고, 두꺼워서 보관이 어려운 책은 리디북스에서 전자책으로 구매하고. 물론 그렇게 산 책을 곧바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미 읽을 책들이 지구 몇 바퀴를 돌 만큼 줄 서 있다. 당장 안 읽을 거 왜 사냐고? 그건 당신이 ‘결제의 희열’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좁은 방 안에 책을 쌓아두기 시작하면서, 난 인간을 이해하게 됐다. 신지도 않을 운동화, 듣지도 않을 LP판을 비싼 값에 사서 집에다 모셔놓고 흐뭇해하는 인간들이 바로 내 모습이었구나.

내가 결제 초심자라면, 이 책의 저자 한재동 씨는 최소 중수 이상이다. 직장마저 백화점을 택한 이분은 다년간의 쇼핑 경험을 통해 내공을 쌓으셨다. 에디터B님, 이분이랑 미팅 한 번 해보시면 어때요?

  • <결제의 희열> 한재동 | 눌와 | 12,000원

[4]
<공간을 탐하다>

“오래된 것은 지저분한 것이고 누추한 것이다.
혹은 오래된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편안한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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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도시의 공간: 서울역, 광화문광장, 국회의사당 등이 도시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룬다. 2)기억의 공간: 철원 노동당사, 히로시마 평화공원 등 역사적으로 되짚어볼 만한 공간들을 모았다. 4)휴식의 공간: 땅속에 지은 데시마 미술관이나 한강의 매력을 잘 살린 선유도공원처럼 자연과의 조화에 신경 쓴 공간들을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서점, 골목, 클럽 등을 다룬 3)놀이의 공간이다. 비교적 저자 개인의 감상이 훨씬 많이 녹아 있다. 저자는 책을 좋아하는구나, 오래된 것에 애정이 있구나, 기타를 쳤었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놀이의 공간’은 어디일까?

첫째, 카페. 똑같이 책을 읽고 똑같이 대화를 하더라도 카페에서는 ‘여유’와 ‘있어 보임’이 +1 된다. 심지어 일을 하더라도 회사나 집에서 할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카페에 가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도 놀이가 된다. 둘째, 노래방. 의도한 소리를 정확히 냈을 때의 성취감도 좋지만, 의도치 않게 튀어나오는 소리의 의외성도 재밌다. 노래가 직업이 아니기에, 내 노래 실력이 딱 요정도이기에 가능한 놀이다. 셋째, 축구장. TV로 보는 축구도 재밌지만, 경기장에서 보는 축구는 뭉클하다. 양 팀 22명은 90분 내내 움직이고, 서로 부딪친다. 그러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사소한 움직임 하나가 경기 흐름을 바꾼다. 노래방과 축구장에 못 가는 요즘 나는 참 슬프다.

  • <공간을 탐하다> 임형남, 노은주 | 인물과사상사 | 17,000원

[5]
<오히려 최첨단 가족>

“‘가족’, ‘자식’, ‘양육’이라는 말은 변함없이 쓰이고 있지만,
실제 그 말들의 의미와 형태는 고작 한 세대 전과도 매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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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뾰족한 사물의 맨 끝. 2)시대나 유행의 맨 앞.” ‘최첨단’이란 말이 오랜만이다 싶어 단어 뜻을 검색했다. 1)보다는 2)로 자주 쓰이던 이 말은 요즘 그 빛을 잃었다. 너무 빨리 바뀌어서 어제 맨 앞에 있던 것도 다음날 뒤로 밀려나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보면 이 책 제목에 ‘최첨단’이 들어간 것도 이해가 된다. 다른 게 다 하루아침에 휙휙 바뀌어도 좀처럼 안 바뀌는 것이 바로 ‘가족’이니까.

근데 저자가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면, 최첨단이라는 말로는 성에 안 찬다. 이 가족에겐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내가 마음속으로 외쳤던 것처럼. “이건 가족 2.0이다! 이건 혁신이다!”

혁신이란 무엇인가. 우린 이미 쇼핑의 혁신, 금융의 혁신, 배달음식의 혁신을 경험했다.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감히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객의 편의성을 높이는 것이 바로 혁신이다. 그런 점에서 이 가족은 혁신적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가족 구성원의 의무와 책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이 가족을 구성하는 네 사람은 각자의 ‘나다움’을 지켜가고 있다.

나다움은 가족 안에서 처음 만들어지지만, 나다움을 포기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가족이다. 가족 2.0의 구체적인 모습이 궁금한 분, 너무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가끔은 버겁다고 느끼는 분, 가족에 대한 고민은 없더라도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오히려 최첨단 가족> 박혜윤 | 책소유 | 16,000원
About Author
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