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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킹 7일 쓰고 포기한 썰

안녕, 키보드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유튜브에서 키보드 리뷰 영상을 올리면 꼭 달리는 댓글이 있다. “에디터님! 해피해킹은 없어요?” “아니, 해피해킹이 없다니요! 다음에는...
안녕, 키보드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유튜브에서 키보드 리뷰 영상을 올리면 꼭 달리는 댓글이…

2022. 02. 08

안녕, 키보드를 좋아하는 에디터B다. 유튜브에서 키보드 리뷰 영상을 올리면 꼭 달리는 댓글이 있다.

“에디터님! 해피해킹은 없어요?”
“아니, 해피해킹이 없다니요! 다음에는 꼭…”
“다음에는 해피해킹 기대하겠습니다ㅎㅎㅎ”

말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해피해킹을 제발 써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써봤다. 그 유명한 해피해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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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해피해킹을 안 써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중고 가격으로도 30만 원이 넘어가는 키보드에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뿐이다. 행운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날, 옆자리 에디터H가 반가운 얘기를 해줬다. “서울리안이 해피해킹 빌려줄 수 있다는데 써볼래?” 그렇게 처음으로 해피해킹을 써보게 되었다.

아무리 같은 브랜드라고 해도 제품마다 타건감은 조금씩 다르다. 해피해킹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내가 사용한 제품은 ‘해피해킹 프로페셔널2 타입S’이다. 만약 다른 제품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면 지금 리뷰는 참고만 하자.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해피해킹에 적응하지 못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말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 리뷰를 끝으로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다. 아무튼, 리뷰 시작한다. 리뷰는 해피해킹을 사용한 첫 번째 날, 사용 일주일 후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해피해킹 사용 첫 번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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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럽다. 여기쯤 백스페이스가 있겠지 생각하면 그곳에 없다. 이건 백스페이스뿐만 아니었다. 다른 문자도 조금씩 그랬다. 초행길의 드라이버처럼 쉽사리 속도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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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배열이기 때문에 풀배열이나 텐키리스와는 배열이 조금씩 다르다. 익숙한 키들이 그 자리에 없다는 것 때문에 타이핑을 하면 버퍼링이 걸린 듯 조금씩 버벅댔다. 과속방지턱이 있는 것처럼 속타를 치다가 한 번씩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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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당황스러운 건 한영 전환키다. 나는 맥북을 사용하기 때문에 Caps Lock으로 한영 전환을 해왔는데, 해피해킹에서는 Caps Lock이 있어야 할 자리에 Control이 있다. ‘뭐야 이거, 그럼 Caps lock은 어디 있어?’ 바로 위에 있었다. 나의 소중한 Caps Lock이 Tab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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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s lock을 누르기 위해서는 Fn+Tab을 눌러야 한다. 한영 전환이 이렇게 불편할 일인가. 일단 한 번 해봤다. 역시나 많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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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키는 측각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방향키다. 사실 방향키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해피해킹엔 방향키가 없다는 얘기를. Fn키를 누른 채 각각 [ / ; ‘를 누르면 상하좌우로 이동한다. 난 이제 정말 자신이 없었다. 내가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배열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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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킹이 극단적으로 미니멀한 배열을 추구한 이유는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넘버패드가 없는 텐키리스 키보드인 경우에도 방향키를 누르려다 보면 동선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해피해킹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세 가지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방금 위에서 말한 간편한 동선 그리고 디자인, 타건감이다. 동선 및 사용성에 대해서는 며칠 더 사용해보고 생각을 정리해보겠다. 일단은 디자인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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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인정. 풀배열보다는 텐키리스가, 텐키리스보다는 미니배열이 깔끔하고 예뻐 보인다. 물론 디자인에 대한 취향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키가 많으면 클래식 보일 수 있어도 복잡함을 덜어내기는 힘들다. 미니배열만이 줄 수 있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해피해킹의 로고가 포인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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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궁금했던 건 타건감이다. 내가 키보드 리뷰를 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타건감이고, 그건 해피해킹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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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무접점 키보드 취향을 밝히자면 한성 무접점 키보드다. 한성키보드의 서걱거리는 NIZ EC(이하 ‘노뿌’) 키감을 좋아한다. 해피해킹은 토프레 무접점이다. 토프레 무접점은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도각도각이라는 소리, 노뿌는 찌개가 끓은 보글보글에 비유하곤 하는데, 해피해킹은 도각도각에 서걱거림이 섞여 있는 느낌이다. 키압이 높고 반발력이 좋아서 훨씬 쫀득쫀득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해피해킹의 이런 특징은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키압이 높으면 손가락이 아파서 장기간 타이핑하기엔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해피해킹의 첫인상이다. 일주일 동안은 아무리 손에 안 맞아도 참고 견디며 사용해보겠다.


일주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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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확실해졌다. 해피해킹은 분명히 독보적인 타건감을 가진 마성의 무접점 키보드가 맞다. 처음에는 높은 키압과 반발력 때문에 낯설었지만, 적응을 하고 나니 이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해피해킹에 적응한 후에는 다른 노뿌 무접점이나 리얼포스 키보드를 쓰면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키압이 높아서 타이핑을 오래하면 손가락이 피곤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려니 넘길 수 있을 정도다. 서걱거리고 쫀득한 키감이 좋아서 계속 타이핑하고 싶게 만든다. 쾌감이 고통보다 큰 케이스다.

키보드 사이즈가 원체 작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사무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 한 손에 잡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작아서 휴대용으로 들고 다니기에도 좋다. 아는 분이 책을 출간하면서 “해피해킹 덕분에 책을 낼 수 있었어요”라고 간증했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들고 다니며 쓰기에도 좋은 제품이고, 만약 키보드 세계를 해피해킹으로 입문했다면 다른 키보드를 못 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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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해피해킹을 타건했을 때는 노뿌에 비해 소리가 커서 신경쓰이기도 했다. 키보드를 좋아하는 옆자리 디자이너는 “키보드 바꾼 거예요? 소리가 조금 다른데요?”라며 바로 알아차릴 만큼 차이 났다. 확실히 해피해킹은 정숙한 느낌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조용한 사무실에서 존재감을 어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특징도 쓰다보니 익숙해지긴 했다. 다 해피해킹만의 매력처럼 느껴진다. 좋은 말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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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피해킹을 계속 쓸 생각이 없다.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방향키와 한영키 전환은 아무리 써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사 하나를 쓰는 데도 수십번의 방향키와 한영키를 눌러야 한다. 그때마다 한숨 한번씩 쉬고 누른다. ‘하…’

내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오직 해피해킹만 사용한다면 익숙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 다른 키보드를 쓰고 있어서 적응이 쉽지 않다. 시끄러운 청축 키보드가 사회와 공존하기에 힘든 키보드라면, 해피해킹은 나의 키보드 생태계 안에서 공존하기 힘든 키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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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에세이 작가 같은 원고 노동자 중에 해피해킹을 쓰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글만 쓰면 되니까 방향키는 별로 필요 없을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해피해킹으로 글을 써보니 ‘글만 써도’ 방향키를 쓸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문단이나 문장을 복사하기 위해 SHIFT+방향키로 블록을 지정할 때가 많다. 그런데 방향키가 두 키의 조합이다 보니 블록을 지정하려면 무려 세 개의 키를 눌러야 한다. 극악의 불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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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전환도 불편한 부분이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많은 해피해킹 사용자들이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원래는 백스페이스도 Fn+Delete 조합을 눌러서 작동한다. 다행히도 딥스위치로 세팅을 바꾸면 Delete를 백스페이스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방향키만은 방법이 없다. 나는 끝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해피해킹을 잘 쓰는 분들도 많으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격 차이로 헤어진 걸로 하자.


결론

해피해킹을 구매하기 전에 반드시 베타테스트 기간을 가지면 좋겠다. 친구의 키보드를 빌리든, 번개장터에서 중고로 구매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타건샵에서 잠깐 사용해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틀 정도는 진득하게 사용해보아야 내가 해피해킹에게 선택받은 아이인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니까. 흔히 해피해킹을 무접점 키보드의 끝판왕이라고는 하지만, 모두에게 끝판왕은 아니다(좋아하는 타건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무접점 키보드를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해피해킹으로 직행하지 말고 한성, COX, 앱코의 키보드를 써보는 것을 추천한다.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