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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H어워즈] 괜찮아, 사랑이야

안녕, 여러분. 한 해를 보름 남짓 남겨둔 어느 밤, 에디터H다. 오늘은 2021년에 내가 소비하고 경험했던 것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안녕, 여러분. 한 해를 보름 남짓 남겨둔 어느 밤, 에디터H다. 오늘은 2021년에…

2021. 12. 15

안녕, 여러분. 한 해를 보름 남짓 남겨둔 어느 밤, 에디터H다. 오늘은 2021년에 내가 소비하고 경험했던 것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뽑아 10개의 리스트로 준비했다. 매년 12월이 되면 “올해 어워즈에는 어떤 것들을 담아야 할까” 습관처럼 고민한다. 술을 마시면서도 고민하고, 쇼핑을 하면서도 고민하고, 다시 술을 마시면서 한 번 더 고민한다. 10개의 리스트 안에 1년 동안의 기억을 모두 담아내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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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재미 삼아 시작한 연말 어워즈가 벌써 여섯 해를 맞이했다. 이 정도면 역사와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충분하겠다. 다만, 나의 개인적인 기록이 그 전통에 걸맞을지는 자신이 없다. 누군가는 “왜 저런 걸 골랐지?”하며 비공감을 보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않나.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내가 사랑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당신이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냉혹한 잣대는 잠시 내려두고 나의 주책맞은 수다를 즐겨주시길. 2021년 에디터H 어워즈를 시작한다.


올해의 제품
갤럭시 Z 플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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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어워즈를 찾아보니 <올해의 디자인> 부문에서 갤럭시 Z 플립을 골랐더라. 작고, 귀엽고, 레트로한 디자인에 감탄하긴 했지만, 결국엔 “넌 외모가 전부야”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다. 고작 1.1인치의 커버 디스플레이는 흔적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폰을 닫은 상태에서는 쓸 수 있는 기능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올해 출시된 갤럭시 Z 플립3는 달랐다. 거의 4배가량 커진 커버 디스플레이 덕분에 플립을 열지 않고도 삼성 페이로 결제하고, 문자를 읽고,  쾌적하게 셀카를 찍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마저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영특함을 보였다. 원하는 테마를 골라 커버 디스플레이를 꾸밀 수 있었고, 최애가 활짝 웃는 움짤을 배경화면으로 저장해둘 수도 있었다. 크림, 그린, 라벤더 같은 감성적인 컬러 조합마저 성공적이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갤럭시 Z 플립3 너무 예쁘지 않아?”라는 얘길 했다. 이 놀라운 디자인 덕분에 요원해 보이던 폴더블폰 대중화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갤럭시 Z플립3는 더이상 외모가 전부인 제품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디자인도 스펙이라는 걸 드라마틱하게 증명한 제품이기도 하다.


올해의 기술
아이폰13 시네마틱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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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시된 아이폰13 시리즈에는 재밌는 영상 촬영 기능이 추가됐다. 바로 ‘시네마틱 모드’. 영상에서 얕은 피사계 심도 촬영을 구현한 기능으로,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인물 사진 모드를 영상으로 구현했다고 보면 된다. 피사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뒷배경은 아웃포커스 시키는 효과다. 물론 아이폰에 탑재된 렌즈로는 이런 심도를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로 구현되는 기능이다(인물 사진 모드가 그렇듯). 인물을 촬영하다 보면, 배경과 머리카락 부분의 경계가 어색하게 표시되기도 하고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피사체는 실수로 아웃포커스 시켜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태까지 소프트웨어로 구현했던 어떤 동영상 아웃포커스 효과보다 가장 자연스럽다. 게다가 화면 속에 두 명의 인물이 있을 때, 시선의 이동에 따라서 포커스가 옮겨가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 이제는 그럴싸한 카메라가 없어도 아이폰만으로 배경에 보케가 표현된 영상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술의 완성도를 집요하게 따질 필요 없이, 기존에 카메라 경험이 없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네마틱 모드를 쓰기 시작했다.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를 찍고, 춤을 추는 친구의 모습을 찍어서 배경이 뽀얗게 아웃포커스된 영상을 틱톡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동안 시네마틱 모드는 점점 발전하겠지. 폰카메라와 카메라의 경계가 또 하나 허물어진 셈이다.


올해의 서비스
배달의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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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올해의 서비스> 부문에서 배달의민족을 뽑았다. 미리 말해두자면, 콕 집어서 배달의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배달 앱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기 때문에, 그 영향력에 대해서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나는 본래 배달 음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코로나19 전에는 배달 앱을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근데 며칠 전에 아이폰에서 최다 사용 앱 리스트를 살펴보니 ‘배달의민족’ 사용 시간이 10위 안에 들더라. 흠칫 놀랐다. 매 끼니를 배달 음식으로 해결한 결과다. 심지어 최근 1년 사이에 배달 음식의 카테고리도 넓어졌다. 인도 요리, 태국 요리, 평양냉면… 온갖 세계 요리는 물론이고 밀크티나 크로플도 터치 몇 번이면 배달이 온다. 비건 요리나 저탄고지 식단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금요일 밤엔 와인 안주로 먹을 치즈 플레이트를 배달 앱에서 주문하고,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아빠를 위해 초밥을 배달시키는 원격 효도도 가능하다.

이 치명적인 편리함 뒤에는 항상 고민이 남는다. 산더미처럼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와 날로 치열해지는 배달 생태계의 갈등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도 이득 보지 못하는 제로섬 게임 같기도 하다. 결국엔 배달 앱을 쓸 거면서, 머리 아프게 그런 고민은 왜 하냐고? 이 모든 갈등은 결국 다 연결되어 있는 법이니까. 함께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척박해지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창밖으로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다. 누군가의 늦은 저녁 식사이거나, 야식이겠지.


올해의 실망
에어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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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디에디트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될 2021 어워즈 영상에선 올해의 실망템으로 ‘아이패드 프로 5세대’ 제품을 뽑았다. 역대급 성능을 자랑하는 훌륭한 제품이지만, 미니 LED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디스플레이에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선 개인적인 선호를 좀 더 강력하게 반영해서 에어태그를 뽑으련다. 이 제품은 실망 정도가 아니라 폭망에 가깝다. 울트라 와이드 밴드를 탑재한 스마트 태그라면서 요란하게 등장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써먹은 적이 없다. 에어태그를 달아둔 물건을 분실 후에 찾는다는 건 애플의 판타지에 가깝다. 6~7m 범위 내로 들어가야 제대로 방향이 표시될 뿐만 아니라, 애플이나 구글 같은 해외 서비스에 상세 지도 데이터를 반출할 수 없는 국내 사정상 ‘찾기’ 기능 또한 써먹을 수 없다. 결국 누군가 에어태그가 달린 내 자전거를 들고 튄다면, 자전거에 에어태그 값이 추가되는 상황이 벌어질 뿐이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에어태그를 다시 꺼내 보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맙소사. 나는 에어태그가 나의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줬으면 했는데, 결국엔 이것도 내 잃어버린 물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올해의 콘텐츠
나의 눈부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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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디즈니+ 애플TV+, 티빙… 이 모든 OTT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콘텐츠를 소비하며 살았지만, 올해의 콘텐츠는 망설임 없이 선정할 수 있었다. 바로 왓챠 익스클루시브 콘텐츠인 <나의 눈부신 친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60년에 걸친 두 여인의 일생과 그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릴라와 레누는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를 동경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성장한다.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대에, 한 명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다른 한 명은 학업을 멈추게 되면서 영민했던 두 소녀의 삶은 달라지게 된다. 대학에 진학한 레누와 누군가의 아내가 된 릴라의 삶은 마치 어떤 상징과도 같다. 이 정도 서사를 갖춘 드라마는 만나기 쉽지 않다. 그들이 살아가는 과정을 얼마나 몰입도 있게 그렸는지 이탈리아 마을에 가면 두 소녀가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숨도 쉬지 않고 시즌2까지 정주행을 마쳤다. 조만간 원작 소설도 구입할 예정. 애정과 질시가 얼마나 입체적인 감정인지, 삶은 얼마나 여러 모습을 띠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 꼭 보셨으면. 


올해의 사치
셀린느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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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돈을 많이 쓰고, 쇼핑을 많이 해봐도 항상 좋은 제품만 고르는 건 쉽지 않다. 가끔은 잘못된 물건을 구입하고 나서, 자신의 안목에 스스로 크게 실망할 때가 있다. 그게 100만 원이 훌쩍 넘는 럭셔리 브랜드의 물건이라면 더더욱 현타가 몰려온다. 나는 아직도 나에게 어울리는 게 뭔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걸까? 올해도 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성공적인 쇼핑도 있었다. 그중에 최고를 꼽자면 셀린느의 하운드투스 체크 재킷.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한참 망설이다가 구매했지만, 입어보는 순간 거울 앞에서 방방 뛰었다. 통통하고 좁은 어깨를 가진 내 체형에 이렇게 찰떡처럼 어울리는 옷은 처음이었다. 입을 때마다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옷걸이에 걸어둔 모습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물건이 기쁨을 주는 순간은 이런 때다. 나를 더 근사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줄 때. 그리고 그 자신감이 태도가 될 때. 나는 아마 아주 오래오래 이 재킷을 입겠지. 혹시 입고 있는 나와 마주친다면, 칭찬해주셨으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올해의 도전
머니사이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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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머니사이드업’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다양한 제품을 제작했다. 항상 소비하는 입장이었는데, 제작하는 입장이 되니 새롭다.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시간을 들여 관여한 제품은 단연 아이폰13 케이스와 에어팟 케이스다. 케이스의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여러분은 아실까. 아주 미묘한 차이로 달라지는 핏과 디자인, 내구성. 가장 중요한 건 이 정도 퀄리티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제조사와 공장이 아주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 좁은 문을 열기 위해 눈물을 훔치며 동분서주했고, 결국 링케와 협업해서 기가 막힌 케이스가 나왔다. 아쉬운 건 아이폰 케이스의 이중 프린트 퀄리티가 사진과 영상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물로 보면 그림자가 내부와 외부에 4번이나 레이어드해서 인쇄한 그래픽 사이의 깊이감이, 3D 효과 같은 입체감을 표현해주는데…. 아무리 열심히 촬영을 해봐도 마음처럼 담기지 않는다. 반짝이 그래픽 안에 충전 표시등이 딱 맞게 들어가는 에어팟 케이스의 디테일도 꼭 알아주셨으면. 실제로 받아보고 퀄리티에 감동했다는 후기를 볼 때마다, 괜히 마음이 찌르르. 이건 나의 개인적인 기록을 담은 2021 어워즈니까. 꼭 한 번 더 생색내고 싶었다. 링크는 [여기].


올해의 공간
와인소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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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먹고 마시는 일에 진심이라 전국의 맛집을 쏘다니곤 한다. 올해도 맛있고, 근사하고, 좋은 공간이 많았지만 고민 끝에 소개하는 장소는 얼마 전 도산공원 인근에 오픈한 ‘와인소셜’. 와인을 좋아하게 되면서, 제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에 알음알음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 항상 비슷한 와인만 마시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가격의 허들 때문에 취향이 제한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잘 모르다보니 “이 품종은 이런 맛, 저 품종은 저런 맛”하고 정의 내려진 편견에 갇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다 만난 와인소셜은 신선했다. 두 가지 테이스팅 코스 중에 원하는 무드의 코스를 선택하면, 와인 5잔이 제공된다. 재밌는 건 생산지, 품종, 가격…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고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마셔보게 된다는 사실. 그래서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내가 느낀 맛을 솔직하고 편하게 나눠볼 수 있다.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미지 카드로 표현하는 방식도 게임처럼 재밌고 말이다. 소믈리에와의 소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와인을 매개체로 대화라는 안주가 함께 차려지는 느낌. 굉장히 즐거웠다. 다만 식사 메뉴는 전혀 없으니 참고하시길.


올해의 좋은 일
아이패드 미니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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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머니사이드업을 론칭하면서, “나는 당신이 부자가 됐으면 좋겠어”라는 우리의 슬로건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니사이드업 수익금 중 천 만원을 기부하기로 마음먹었고, 시설에서 퇴소하고 자립을 준비하는 청소년과 예체능에 관심이 있는 아동청소년에게 아이패드 미니를 선물로 보낼 수 있었다. 더 저렴한 태블릿을 기부하면,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을 지원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애플의 제품을 선물하고 싶었다. 왜냐면, 아이패드를 사용하면서 느꼈던 가능성과 경험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여담이지만 기부한 직후에 아이패드 미니 신제품이 출시되어 버려서 약간 머쓱했다. 그러니까 다음엔 더 좋은 아이패드와 애플펜슬도 함께 기부할 수 있게 열심히 살아야지. 그리고 그 때마다 이렇게 열심히 생색을 낼 예정이다. 나눈 일을 널리 알리는 건 선한 영향력이 될 수 있으니까. 나도 누군가의 선행을 보고 “돈을 벌면 기부를 많이 해야지”라고 마음 먹었듯 말이다.


올해의 사고
좌측 제5중족골 기저부 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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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나에게 가혹한 해였다.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1월 1일을 맞아 해피뉴이어를 외치며 술을 마셨는데, 비틀비틀 걷다가 제자리에서 넘어지며 부상을 당한 것이다. 발등의 뼈가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좌측 제5중족골 기저부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떻게 제자리에서 넘어져서 발등 뼈가 부러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지만, 다량의 알콜과 함께 기억도 부러져 버렸다. 응급실에서 1월 1일을 보내고, 생애 첫 깁스와 목발을 경험한 나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 당장 쌓인 일이 많은데 출근을 할 수 없었고, 회사에 끼칠 민폐를 생각하면 울고 싶었다. 게다가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모든 존엄권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을 일으키기 위해 한참을 씨름해야 했다. 누우면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 책상에 앉아 일만 했다. 밥을 먹으러 나갈 수도 없었고, 옷을 갈아입거나 화장실에 갈 때도 용기가 필요했다. 절망의 속에 내가 결심한 건 한 가지였다. 나는 그래도 매일 샤워를 할 것이다. 그게 나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곡예를 하듯 목발을 짚어서 화장실에 들어간 뒤, 깁스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발레리나 같은 자세로 샤워를 했다. 온 몸이 저렸다. 두 발로 걸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하나도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려 47일 간 깁스를 했고,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발등이 뻐근하지만 걷는 데는 문제가 없다. 뼈도 잘 붙었다고 한다. 그래도 가끔은 방안에 갇혀서 꼼짝도 못했던 그 시간을 떠올린다. 낯선 세상에 격리되었던 것 같은 그 불안을 상기해본다.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지.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그래 맞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업무에 모든 게 나빠보여도,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지금은 괜찮다. 사실은 괜찮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모두 괜찮아질 것이다. 나의 제5중족골처럼.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