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PICK

[2016 H어워즈] 돈 쓰는 건 짜릿해

세상 모든 일은 연애와 닮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가질 땐 너무 좋았는데, 사실은 내 짝이 아니었던 물건도 있다. 몇 달을 벼르고,...
세상 모든 일은 연애와 닮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가질 땐 너무 좋았는데, 사실은…

2016. 12. 30

세상 모든 일은 연애와 닮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가질 땐 너무 좋았는데, 사실은 내 짝이 아니었던 물건도 있다. 몇 달을 벼르고, 돈을 모아서 구입했지만 뒤이어 출시된 신제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연애와 쇼핑의 닮은 점은 또 있다. 그것들이 당시의 내 일상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올해 나는 어떤 물건들과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고, 질척댔을까. 2016년을 정리하는 에디터H의 아주 사적인 <연말정산 리스트>를 공개한다.

매번 잘못된 사랑에 빠지면서도 그렇게 느끼듯이, 돈 쓰는 건 늘 새로워. 짜릿해.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올 여름엔 맥북을 샀다. 2016년형 로즈골드 맥북. 이 어여쁜 물건을 사고보니 어울리는 슬리브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휘몰아쳤다. 평범한 12인치 노트북용 파우치나 슬리브를 샀으면 참 좋았을텐데, 난 발작처럼 발렌시아가 클러치를 샀다. 해외 구매대행까지 하는 극성을 부려가며 이게 12인치 맥북 사이즈에 딱 맞는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패브릭과 가죽 소재를 믹스해 만든 클러치는 충격 완화에는 젬병이었고, 금속 지퍼는 맥북 표면을 ‘직직-‘ 긁어댔다. 결국 딱 한 번 쓰고 다신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격은 창피하니까 비밀이다.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맥북 얘기가 나온 김에 이어서 가보자. 12인치 맥북엔 단 한 개의 구멍만이 있다. 작고 귀여운 USB Type-C 포트 말이다. 덕분에 나는 매일 같이 멘붕에 빠졌다. 충전기도 빌릴 수 없었고, 라이트닝 케이블도 연결할 수 없었으며, SD카드 리더도 꽂을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날 구해준 건 14cm 길이의 짧은 케이블 어댑터. 벨킨의 Type-C to Type-A 어댑터다. 언제 어디서든 네가 있으면 안심이다. 이게 없으면 숨 쉴 수 없어. Type-C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만능키.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잠깐 분위기 전환을 해보자. 그간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라도 이 과자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지난 11월 11일. 언제나 그러했듯 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편의점에 들렀는데 빼빼로 투성이었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싶어서 나에게 빼빼로를 선물했다. 코코넛 맛이 보이길래 아무 생각 없이 샀는데, 어머어머, 뭔데 이렇게 맛있어. 빼빼로 주제에 고급스러운 풍미로 혀를 유혹한다. 인공적인 코코넛 향이 초콜릿에 촘촘히 스며 ‘뭔가 비싼 맛’을 만들어내더라. 보이면 무조건 먹어보시길. 근데 잘 안 보인다.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리뷰어로 살며 가장 행복한 건 좋은 제품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도 참 잘 지은 소니의 블루투스 스피커 히어고(h.ear go)도 그중 하나였다. 얘는 사실 아직 구입하진 못했다. 스피커보단 헤드셋을 쓰는 인생이라 그렇다. 비오는 제주도에서 히어고로 음악을 들어봤다. 소리 좋다. 정말 내 취향. 쳇 베이커와 테레즈 몽캄을 듣는데, 가슴이 쿵쿵 내려앉는 기분. 엑스트라 베이스 버튼을 눌렀을 때 저음이 묵직하게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 꼭 첫 연애 같았지. 감수성 폭발하는 바람에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중2병이 도질 뻔 한 게 함정.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정말 올 한해 내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찬양한 사진 편집 앱이다. 당연히 포토샵만큼 기능이 많진 않다. 그러나 모바일 앱 치고는 꽤 전문적인 작업까지 가능하다. 복잡한 툴 없이 제품 사진 외곽선을 따고, 리사이즈 작업이나 레이어 작업까지 해낸다. 사진에 워터마크도 박을 수 있고 텍스트를 넣거나 컬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복구’ 기능도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서, 원치 않는 사물이나 인물은 터치 한 번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 파일을 저장할 때 PSD 등 다양한 형식을 지원하는 것도 특징.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펜슬이 더해진다면 완벽하다. 찬양하라!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나는 탄수화물을 사랑한다. 치킨이나 삼겹살보다는 밥과 빵에 열광한다. 그런 내가 뽑은 2016년 최고의 빵은 합정역 인근 카페 ‘더블하모니’에서 먹은 카스테라. 몇 가지 베이커리 메뉴를 판매하는데 모두 주문 후에 즉석에서 바로 구워준다. 이 카스테라는 우리가 보통 먹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파운드 케이크와 카스테라의 중간 정도? 아니 설명할 길이 없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달콤하지만 질리지 않는다. 빵 위에 지붕처럼 얹어진 것은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아몬드 슬라이스다. 저 아이스크림은 이상하리만치 쫀쫀하고 바닐라 특유의 풍미가 강하다. 따뜻한 빵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먹는데도 지저분하게 녹아 흐르지 않는 것도 특징. 나만 알고 싶은 맛이지만 특별히 공유한다. 참고로 커피는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최근의 나는 책상에 두 대의 맥북을 올려놓고 작업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하나는 본래 쓰는 12인치 맥북이고, 하나는 따끈따끈한 13인치 맥북 프로 터치바 모델이다. 리뷰를 위해 새로운 맥북 프로를 쓰다 보니 삶의 질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영상 작업은 4K도 거뜬하게 돌아가고, 시시각각 변하는 터치바는 쓸수록 궁금하다.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 더 만져보고 싶고. 이건 어쩌면 사랑인 걸까. 과감하게 기존 맥북을 버리고 맥북 프로로 갈아탈까 고민하지만, 외출할 땐 생각이 또 달라진다. 깃털처럼 가벼운 맥북에 비하면 맥북 프로는 아무리 가벼워져도 부담스럽다. 둘 다 사랑할 수 없을까. 양다리 걸치기엔 내 지갑 사정이 빈곤하구나.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파이널컷으로 영상을 편집하고 나면 생기는 원본 파일의 용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가장 최근에 작업한 건 6분짜리 영상이 120GB를 돌파했다. 굳이 영상이 아니더라도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다보면 매일 매일이 파일 정리와의 싸움이다. 친구 C가 그러더라 “콘텐츠 사업은 아이디어도 돈인데, 자료도 힘이고 돈이야” 그래서 샀다. 내 힘을 지켜줄 예쁘고 용량 넉넉한 외장하드. 핑계가 구구절절했지만 어쩌면 예뻐서 샀는지도 모르다. 올해는 이렇게 누울 자리를 찾았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듯 바라만 봐도 마음이 든든하다.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정말 이상하지. 특별한 기능 없이 개 짖는 앱이 이렇게 살아남았다. 처음엔 너무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자꾸 짖게 된다. ‘바크’ 앱은 위치기반 개짖기 소셜 미디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최근엔 여기저기 ‘똥’을 싸고 다닐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됐다. 정말 똥이다. 개가 영역표시하듯 아무 사진이나 투척하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동네마다 개들의 특징이 다르다. 어떤 동네는 적극적으로 번개도 추진한다. 우리동네 개들은 다들 외로워보인다. 탑독이 동네 이름을 ‘커플지옥 솔로천국’이라고 해놨다. 아는 사람들은 가끔 불편하다. 모르는 사람이 더 편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앱을 열고 짖거나, 개소리를 한다.

Processed with VSCO with c8 preset

1월에 제주도에서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돼 갇혀있었다는 얘기는 이제 지겹도록 늘어놓은 것 같다. 4월에 제주 공항에서 비행기가 회항해 인천공항에 갇혔다는 얘기도 지겹도록 한 것 같고 말이다. 9월엔 비행기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비바람에 날아갈 뻔했다. 나와 제주는 참으로 맞지 않는 짝이다. 그래도 지겹도록 제주를 짝사랑한다. 1월에 창밖으로 쏟아지던 눈을 보면서 그곳에 버리고 온 감정들을 생각한다. 나는 이상할 만큼 이 섬이 좋다. 바람도 좋고, 아무것도 안 해도 좋고, 집안에 갇혀도 좋다. 제주도가 아무리 나를 밀어내도 집착해야지. 내년에 또 갈 거야. 다들 내가 가는 날짜만 피하길.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