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서울의 밤, 서울의 방

안녕, 또다시 돌입한 재택근무로 슬퍼하는 객원필자 김은아다. 재택근무라는 네 글자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보여주는 척도 같다. 지난 봄 재택근무를...
안녕, 또다시 돌입한 재택근무로 슬퍼하는 객원필자 김은아다. 재택근무라는 네 글자는 사람의 마음이…

2020. 09. 07

안녕, 또다시 돌입한 재택근무로 슬퍼하는 객원필자 김은아다. 재택근무라는 네 글자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보여주는 척도 같다. 지난 봄 재택근무를 할 때는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댔으면서, 다시 출퇴근을 시작하니 포근하고 아늑한 집이 얼마나 그립던지. 그러다 다시 재택근무에 들어서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라. 그래서 8월의 어느 하루는 새로운 사무실로 떠나보기로 했다. 호텔이라는 이름의 사무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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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과 가벼운 옷가지 정도만 들고 가볍게 도착한 곳은 신사동의 안테룸 서울. 서울의 많고 많은 호텔 중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8월에 막 오픈한 뉴페이스 호텔이기 때문이다. 건물 곳곳에서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새 것의 냄새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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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은 객실은 아틀리에 룸. 안테룸에는 총 110개의 룸이 있는데, 아틀리에 룸은 단 두 개뿐이다. 특급 호텔로 따지면 스위트룸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가격대는 십만 원 중반대로 아주 비싸지는 않다. 일반 룸의 경우에는 1박에 5만 원 정도로 깜찍하다. 룸 크기 역시 깜찍하다는 것이 특징이지만. 가격에서 룸 크기까지, 군더더기 없고 실용적이라는 것이 안테룸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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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을 마치고 룸에 들어서자 환한 빛이 쏟아진다. 하얀 벽지와 밝은 톤의 우드 가구가 따뜻한 인상을 주는 데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유서 깊은 먼지가 쌓여있을 것 같은 카페트 바닥, 어두컴컴한 객실을 선호하지 않는 나에게는 첫인상부터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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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곳곳에 센스있는 아이템들이 숨어있다. 룸 스프레이와 파자마 같은 것들. 편백나무향의 룸 스프레이는 틈틈이 룸에 칙칙 뿌렸다. 작은 공간에 푸른 내음이 가득 퍼지면서 갑자기 숲 한가운데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네이비 색의 면 파자마는 어찌나 보들보들 착 감기는지. 처음 발을 들인 낯선 공간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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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적인 호텔 체인들은 환경 보호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일회용 어메니티를 없애거나 친환경 소재로 바꾸는 중이다. 안테룸 역시 플라스틱 튜브 제품 대신 세 개의 비누를 비치해 두었다. 샴푸바는 처음 써봐서 거품이 잘 날까 싶었는데 향도, 거품도, 세정력도 만족스러웠다. 거기에 환경보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약간의 뿌듯함까지. 역시 ‘에코-프랜들리 이즈 더 뉴 블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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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미니멀하다는 것? 요즘 웬만한 호텔에서 갖추고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나 커피 머신이 없었다. 티백과 커피포트는 있었지만, 모닝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커피 머신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았을까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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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개 다른 객실이 아니라 아뜰리에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 바로 테라스. 커튼을 젖히면 서울 시내가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데, 비로소 룸 인테리어가 완성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객실이 18층이기도 하고, 앞 건물들이 낮아서 탁 트인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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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남산타워와 강변북로. 서울의 어떤 ‘에센스’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자주 볼 수 없는 서울의 풍경이니까. 이렇게 집에서와는 다른 풍경을 보는 것, 그래서 다른 도시 혹은 다른 동네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떠난다’는 기분을 오롯이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여행에서 받고 싶어하는 느낌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안테룸의 뷰는 완벽.

에어컨을 틀고 침대에 걸쳐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이 풍경을 바라보며 일을 하니까 괜히 일이 잘 되는 것 같고 영감도 막 떠오르는 것 같고. 키보드가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면 덤덤해질까? 혹시 이런 뷰를 가진 집에서 살아서 답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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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에 투숙하지 않고도 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꼼수(?)도 있다. 바로 19층에 있는 카페를 방문하는 것. 카페인 충전을 위해 잠시 들렀는데, 역시 사람들은 빠르다. 평일 낮인데도 벌써 한강뷰 좌석은 만석이다. 이미 조용히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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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아트북, 여행책 등 개성있는 큐레이션의 책을 구비하고 있는데, 서가를 기웃거리는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 책,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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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호텔로 떠날까’에 대한 긴 답변 같은 책인데, 나의 상황과 꼭 들어맞는 우연이 재미있어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책을 쓴 조애나 윌시는 전세계 호텔을 여행하며 리뷰 기사를 써온 호텔 전문가인데, 그의 답은 이렇다.

난 어쩌면 호텔에서 이런 걸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 무심함, 낯선 이에 둘러싸여 얻는 위안을. 질서정연한 존재 방식을. 영화에서 마주하는 유쾌한 사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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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하고 쾌적한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게만 흐른다. 해가 저물고, 집에서 들고온 와인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 오늘의 선택은 과일향이 가득한 이탈리아산 스파클링 와인. 차갑게 마시기 위해 프론트에 와인 바스켓을 요청했는데, 구매한 물품이 아직 배송 중이라는 답변이 왔다. 신규 호텔이라 생기는 귀여운 에피소드다 싶었는데, 5분 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19층 카페에서 사용하는 바스켓을 가져다주신 것. 이 세심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와인을 더 차갑고 맛있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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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에 내려앉은 서울의 밤. 남산타워에 불이 켜지고, 수많은 차들이 동호대교와 한남대교, 강변북로를 달리고, 크고 작은 건물에 불이 들어오며 반짝이는 도시가 한아름 내 것이 된다. 빌딩과 아파트가 빽빽한 풍경이 분명 삭막한데, 이상하게도 정다운 서울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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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메였다는 가사가. 대학생 때는 도시의 빛들을 보며 ‘저 많은 빌딩 중에 내가 앉을 자리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직장인이 되어서도 ‘저 많은 아파트 중에 내가 누울 자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조금 웃기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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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도시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것은 묘한 위안을 주었다. 내가 걷고 있는 미로를 위에서 바라보는 일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그렇다고 명확한 경로가 떠오른 건 아니었대도. 언젠가 이 곳을 다시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도대체 답을 모르겠다고 느껴지는 삶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 싶을 때. 서울의 밤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서울의 방을.

kim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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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전시, 공연, 와인에 대한 글을 씁니다. 뉴스레터 '뉴술레터' 운영자. 뭐든 잘 타요. 계절도, 분위기도, 쏘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