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그 섬에 가고 싶다

오늘은 섬에 다녀왔다. 앞엔 검푸른 바다가 흰 파도를 만들어내고 왼쪽에서 푸른 해가 떴다가 오른쪽으로 붉은 해가 지는 곳. 아니 사실은 용산구...
오늘은 섬에 다녀왔다. 앞엔 검푸른 바다가 흰 파도를 만들어내고 왼쪽에서 푸른 해가 떴다가…

2018. 11. 21

오늘은 섬에 다녀왔다. 앞엔 검푸른 바다가 흰 파도를 만들어내고 왼쪽에서 푸른 해가 떴다가 오른쪽으로 붉은 해가 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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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실은 용산구 이태원이다. 이곳은 다양한 인종과 복잡한 문화가 뒤섞여 딱 이태원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동네. 가장 붐비는 주말엔 온갖 사람들이 달뜬 얼굴을 하고 파도처럼 넘실대고, 도로는 손님을 태우고 뱉어내기 바쁜 택시들로 꽉 막힌다. 서울 어디와도 다르다는 점에서 이태원은 서울의 섬이라고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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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태원의 현대카드 스토리지에 다녀왔다. 노란 은행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이었다. 스토리지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담아내고 소개하는 일종의 저장소 같은 곳이다. 지금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는 이야기는 바로 가파도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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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는 섬이다.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15분 정도 이동해야하는 외딴 곳이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쉼표를 찍은 듯한 작은 섬. 걸어서 20분 정도면 섬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할 수 있고, 150여 명 정도의 주민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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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는 평평하다. 섬 어느 곳에 서 있어도 해발고도가 20m를 넘지 않는다. 산도 그늘도 없는 이 섬에선 몰아치듯 거센 파도와 이글거리는 태양을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섬에 뭍사람들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왜? 그에 대한 답은 스토리지를 찬찬히 둘러보며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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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가파도 AiR(Artist in Residence)에 대한 설명부터 눈에 들어온다.아티스트들이 잠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한 때 펜션을 만들기 위해 기초공사까지 했다가 어떤 사정으로 버려졌지만, 20년 만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지을 뻔했던 펜션의 이름은 파랑새 펜션이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멀리 달아나버린 줄 알았던 파랑새를 현대카드와 제주도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다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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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보이는 거대한 것은 AiR의 실제 크기를 15분의 1로 줄인 모형이다. 건축물을 작게 만드는 데에는 지극히 실용적인 계산이 개입된다. 큰 것을 작게 봐서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모델은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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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이 거대한 모형의 상당 부분을 바다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판을 접고, 자르고, 이어 붙여 햇빛에 반사된 바다의 모습을 표현했다. 넘실대는 바다를 따라 한참이나 시선을 옮기고 나서야 AiR의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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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는 지하에 있다. 겉에서 보기엔 한 줄기 높게 솟아오른 전망대를 제외하고 여기에 건물이 있다는 단서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한때 펜션이 될 운명이었다가 20년 동안 물에 잠겨 박제되었던 철근 콘크리트는 철거되지 않고 이곳의 뼈대가 되었다. 멋진 설계 덕분에 지하지만 여전히 해가 들고 바닥에는 풀이 자란다. 기존에 있던 것을 모두 거부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 그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한 기획은 이번 가파도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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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곳에서 머물렀던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자연을 온전히 맞닥뜨리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자연 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해는 뜨거울까 찬란할까. 방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무서울까 아니면 밤의 적막이 더 무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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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영 작가는 그림을 그렸다. 한때 바다를 가르던 부표와 표식들이 가파도까지 떠내려와 바다 위에 넘실거리는 모습이 꼭 바다가 그린 드로잉처럼 보였다고 한다.  바다가 그림 그림을 또다시 그려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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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큼 실험적인 미디어 작품을 만드는 양아치 작가는 영상을 만들었다. 깊지 않은 바닷속으로 카메라를 넣어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여 준다. 생각보다 다양한 색과 알 수 없는 생물들이 세계를 만들어 살고 있더라. 그 자체로 온전한 우주처럼 보인다. 궁금하신 분은 직접 이곳을 방문해서 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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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 달, 아니 하루 단위로 바뀌는 작은 세상 속에서 사는 나는 그 인내심이 부러울 정도다.  6년의 시간을 담은 아카이브 사진 속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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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프로젝트가 흥미로운 건, 이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이다. 건축가가 가파도를 방문했을 때 끄적거린 스케치부터 공식적으로 제출했던 문서까지 이 전시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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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를 설명하기보다는 독자들이 전시된 작품 중 일부를 떼어가고 소장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전시를 보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말이다. 단순히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사소한 과정까지 모두 공개하는 건, 이 가파도 프로젝트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이 전시마저도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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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에서 현대카드는 가장 잘 하는 걸 했다. 가파도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것. 평평한 가파도의 모습을 본따 선 두개로 섬의 아이콘을 만들고, 낮게 깔린 지붕과 거센 바닷바람에 깎인 돌 그리고 가파도의 청보리밭을 따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 모양이 참 귀여워서 자꾸만 카메라를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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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2층 전시장을 둘러보는 내내 어디선가 설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인지 알 수 없다. 소리의 정체는 한 층 더 내려간 지하 3층에서 그 정체를 드러냈다. 지하 2층이 가파도 프로젝트를 머리로 이해하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머리 대신 가슴으로 귀와 눈으로 느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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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가로 15m, 세로 3m의 압도적인 크기의 영상. 벽면엔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 뜨고 지는 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가파도의 모습이 압도하며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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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에 홀린 것처럼 의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바다. 이곳은 서울의 중심에서 만나는 외딴 섬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땐 이곳을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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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쪽 세 개의 장면이 레이어드된 화면은 이 가파도 프로젝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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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전시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리진 않겠다. 그건 직접 방문할 여러분들의 몫이니까. 여러분 모두 이 섬에 다녀오셨으면 좋겠다. 이번 가파도 프로젝트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사라져갈 것들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작은 성의이며,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쳐버리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속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니 사실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어도 좋다. 이곳엔 멋진 바다와 섬이 웅크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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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