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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에게, 난 음악은 잘 몰라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난 음악은 잘 몰라. 그때그때 내키는 걸 들어. 내 플레이 리스트를 남에게 보여주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난 음악은 잘 몰라. 그때그때…

2016. 08. 16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난 음악은 잘 몰라. 그때그때 내키는 걸 들어. 내 플레이 리스트를 남에게 보여주는 건 속살을 보여주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많은걸. 내 야트막한 음악 취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조금 촌스럽고 구식이기도 하고.

중학생 땐 멋있어 보여서 비틀스만 들었고, 고등학생 땐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를 들었다. 대학생 땐 연애사업에 목매다느라 이별 노래만 흥얼거렸다. 주로 싸이월드 배경음악이었다. 지금은 이것저것 듣는다. 대부분 옛날 노래다. Mary hopkin의 ’Those were the days’, Jeff buckley의 ‘Hallelujah’, 산울림의 ‘찻잔’ 같은 노래들. 이 역시 각 아티스트에 대한 조예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귀에 듣기 좋았던 노래들만 패치워크처럼 모아놓은 것이다.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선곡 스펙트럼이 좁다. 취향이 좋은 누군가 귀에 직접 속삭여주지 않는다면, 내 플레이리스트는 늘어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에겐 개인화된 음악 추천 서비스가 절실하다는 얘기다.

멜론은 정말 지긋지긋하도록 내 취향을 몰랐다. 게다가 늘 내가 아는 노래만 추천했다. 멜론라디오 섹션에 “경화미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라는 자신만만한 문구와 함께 표시된 음악은 내 취향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이렇게 내 마음을 못 읽으면서 5년 넘게 자동 이체로 요금을 빼가다니, 얄미울 정도다. 뭐가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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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 오래 기다린 애플뮤직이 한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3개월 무료 서비스에 미국보다 2달러 저렴한 7.99달러의 한 달 정액제는 꽤 즐거운 소식. 나는 구남친같은 멜론을 뒤로하고 애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물론, 아직은 양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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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뮤직은 iOS는 물론 안드로이드도 지원한다. 아이폰6S와 갤럭시S7 엣지에서 각각 실행해보았다. 어떤 기기에서든 유려한 UI를 뽐낸다.

첫눈엔 예뻐서 좋았다. 멜론을 쓰다 애플뮤직에 들어오면 눈이 탁 트인다. 빨간 풍선이 화면을 떠다니며 듣고 싶은 음악 장르를 알려달라고 한다. 좋아하면 한 번 탭, 아주 좋아하면 두 번 탭,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길게 눌러서 지워버리면 된다. 이런 경험 자체가 매력적이다. 늘 한결같이 못마땅하던 애인을 등지고 온 보람이 있었다. 새로운 애인은 세련되고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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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인 Rachael yamagata의 ‘Duet’을 실행하고 나니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플레이 화면도 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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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음악엔 온갖 낯선 앨범이 가득했다. 평생 멜론을 썼다면 들을 일 없었던 숨은 명곡을 캐낸 것 같아서 떨렸다. 음질도 훌륭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 몇 명을 검색해 재생목록을 만들고, 추천음악 몇 곡을 들어보았다. 조금 헤매긴 했지만 애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좁은 어깨를 들썩이니 힙스터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무슨 노래를 듣지? 모르겠다. 한참 후에야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함을 느끼는지 깨달았다. 실시간 차트 TOP 100이 없었다. 멜론의 노예라면 으레 관성적으로 플레이하는 그 ‘하태핫태 리스트’말이다. 멜론과 나의 길고 미지근했던 연애가 심어놓은 습관이었다.

결국 애플뮤직에서도 비슷한(?) 메뉴를 찾았다. 새로운 음악 탭에 들어가면, 애플뮤직이 큐레이션한 오늘의 히트곡과 K-Pop 섹션이 있다. 제법 현지화가 잘된 리스트라 들을만하다.

국내 음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검색할 때마다 없는 곡이 많았다. 멜론과의 힘겨루기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국내 음원의 상당수를 가지고 있는 로엔엔터테인먼트를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 3대 엔터테인먼트인 SM, YG, JYP와 손을 잡았다. 국내 사용자들에겐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애플은 한국시장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전세계 K-pop 열풍의 중심에 있는 3대 제작사의 음원을 확보했으니 물량 대비 실속은 챙긴 셈이 아닌가. 잘 나가는 아이돌은 여기 모두 모여 있으니 K-pop을 듣고 싶어 하는 해외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기엔 충분한 미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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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뮤직에서도 K-pop 관련 콘텐츠를 잘 꾸려가는 모습이다. 라디오 서비스인 Beats 1 채널에선 4주간 ‘Takeover: The Sound of Korea’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소녀시대 티파니에 이어 f(x) 앰버, 샤이니가 출연했다. 모두 영어를 잘하는 아이돌이군… 국내 사용자들보다는 해외의 K-Pop 팬들에게 크게 어필할만한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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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 매일 매일 애플뮤직을 사용했다. 국내 음원이 부족하다는 것 외에도 단점은 생각보다 많았다. 가사를 확인할 수 없어 답답했다. 기존 서비스와 완전히 다른 인터페이스에 적응하는 것도 일이었다. 멜론이 바보같았다면, 애플은 불친절했다. 아직 적응 중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재생목록을 만들며 꽤 애를 먹었다. 모두가 열광하는 Beats 1 라디오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내가 남이 틀어준대로 얌전히 듣고 있는 성격이 못 되는지라…

내가 애플뮤직의 매력을 강렬하게 느낀 건 애플 에디터가 큐레이션해 제공하는 ‘재생목록’ 기능이다. 이거 정말 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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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잠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카플레이에서 바로 애플뮤직을 플레이했는데, 차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의 음악 취향이 모두 달라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재생목록 리스트에서 다양한 샘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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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저녁식사’, ‘여름을 테마로 한 팝’ 등 직관적인 제목 덕에 선택이 어렵지 않았다. 선곡도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JYP의 추천리스트’를 들었는데, 박진영의 자기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본인이 프로듀싱하거나 본인이 부른 노래가 자꾸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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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별로 제공하는 추천 재생목록은 생각보다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분위기를 포용한다. 나는 주말부터 이것만 듣고 있다. 휴가, 드라이브, 느긋한 휴식, 파티, 운동, 일, 공부 등의 테마로 나뉜 리스트에서 골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리할 때 듣는 음악부터 출퇴근 때 듣는 노래까지 따로 준비해 뒀다. 멜론에도 비슷한 맥락의 DJ 서비스가 있었는데 대부분 촌스러워서 듣기가 괴로웠다. 미안해요, 나 같은 게 촌스럽다고 해서. 하지만 정말이다. 운동할 때 듣는 음악은 모두 심장이 터질듯한 비트의 EDM이어야 한다고 주입식 교육이라도 받은 사람들 같았다. 반면 애플뮤직의 운동 테마 리스트는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다. 꼭 한번 찾아보시길.

나는 기사를 쓰며 집중력을 해치지 않을 만한 노래를 찾기 위해 ‘일 테마’에 들어갔다. ‘일하며 듣는 재즈’, ‘일하며 듣는 90년대 히트곡’, ‘열심히 일한 당신을 위해’ 등 마음이 솔깃한 문구가 눈에 띈다. 오늘은 ‘공부할 때 듣는 쿨 재즈’ 리스트를 들으며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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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게 애플에만 있는 독자적인 서비스는 아니다. 테마별 음악 추천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서비스다. 그런데 애플은 취향이 참 좋다. 날 위해 추천하는 노래들도 아직은 낯설지만 신선하고 새롭다. 적어도 내가 습관처럼 듣던 노래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귀가 트이고 있음은 확실하다. 내 빈곤한 상상력을 뛰어넘어, 누군가 제시하는대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쾌적함은 말로 못한다. 나는 게으르지만 의심이 많다. 내 취향을 누군가에게 맡길 때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남자도 이만큼 믿어본 적이 없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이유를 못 듣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애플뮤직에선 내 인생 노래인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들을 수 없더라. 결국 익숙한 구남친, 멜론을 다시 찾아가야 했다.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양다리다. 내가 이 양다리를 끊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애플뮤직은 부족하지만 섹시하다. 일상에 지친 내가 음악 앱을 터치할 때마다 괜히 힙(HIP)한 느낌이 가슴 가득 몰아친다. 일단은 이거면 됐다. 적어도 무료 체험 기간인 3개월 동안은 말이다.

애플아. 난 음악은 잘 몰라. 뭘 더 들려줄 수 있는지 말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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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