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麥book] 너와 나의 속도

안녕, 여러분 에디터M이다. 어쩐지 오랜만에 인사를 하는 기분이다.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맥북(麥book) 시리즈다. 첫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가 1월 말이었다. 아직...
안녕, 여러분 에디터M이다. 어쩐지 오랜만에 인사를 하는 기분이다.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맥북(麥book)…

2018. 05. 15

안녕, 여러분 에디터M이다. 어쩐지 오랜만에 인사를 하는 기분이다.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맥북(麥book) 시리즈다. 첫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가 1월 말이었다. 아직 바람이 차가웠던 한겨울이었다. 지금 서울은 여름의 문턱이락 들었다. 지난 두 달을 돌이켜보니 24프레임 흑백 무성영화처럼 빛바랜 장면들이 스쳐지나 간다. 오늘 맥북은 어쩌면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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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너무 바빠서 많은 책을 읽진 못했다. 그치만 속죄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책을 사모았다.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마음으로 모아둔 책들은 겨울방학 숙제처럼 쌓여만 갔다. 그리고 이번 맥북 시리즈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개학을 앞두고 밀린 일기를 쓰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게다가 요즘 나의 콘텐츠에 대한 집중력은 형편없다.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한 권의 소설은커녕 영화 한 편도 진득하게 소화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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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 아니 작가는 제임스 설터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사람.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설터의 단편 12편을 모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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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에서 출판한 제임스 설터의 표지는 모두 하나같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던컨 한나가 그린 그림들이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슬프고 공허해 보이는 여성들이 있다. 아름다운 이 표지를 내 책장에 모셔둘 수 없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지만, 어느 새벽 제임스 설터의 <아메리칸 급행열차>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자책을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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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이름이자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아메리칸 급행열차>. 뉴욕을 배경으로 성공한 두 명의 이야기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탁탁. 문장은 짧고 단편적이다. 책은 빠르고 경쾌하게 읽힌다. 제임스 설터의 글은 기차를 타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같다. 너무 빨라 호흡이 가빠진다. 이 호흡을 깨지 않기 위해 꿀꺽 빠르게 술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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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주는 앤드유니온(And Union). 독일의 바이에른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7년에 생긴 맥주 회사지만, 이 지역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양조장 4곳과 협력해 맥주를 생산한다. 각각의 양조장의 역사는 길게는 500부터 짧게는 90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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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에 맥주 이름만 적혀있는 단출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완벽한 인스타 인증용 맥주 아닌가.

“디지털 세계를 위한 아날로그 맥주”
(Analog Bier for a Digital World)

흥미로운 곳이다. 맥주의 단순함 그리고 순수함을 믿는 이들은 물, 보리, 홉, 효모 만으로 만든 전통 방식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맥주 본연의 맛을 지키기 위해 별도의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맥주를 만드는데, 덕분에 풍성하고 진한 맛과 부드러운 바디감을 즐길 수 있다. 단색에 이름만 쓰여있는 디자인도 그들의 사상을 철저하게 반영한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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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노란색의 스테피 바이스(STEPH WEISS)부터 마셔보자. 굉장히 싱그러운 맛이다. 일반적인 밀맥주에서 오렌지와 바나나의 탁한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면, 유니온앤드의 바이스는 초여름 잘린 풀에서 나는 싱그러운 풀내음과 알싸한 정향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여과를 거치지 않은 맥주라 굉장히 탁한 편인데, 맛도 그만큼 진하고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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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페일에일(SUNDAY P/ALE)은 오렌지를 진하게 응축시킨 맛이 나다가 자몽의 씁쓸함과 홉과 몰트의 진한 맛이 밀려든다. 이름처럼 느긋한 일요일 오후와 참 잘어울리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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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추억의 새마을호가 영원히 멈춰섰다. 내 기억으론 대학교 때 새마을호를 타고 MT를 갔었다. 규칙적인 진동, 긴 차장 밖으로 지나가는 이미지. 분명 기차 여행은 자동차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시속 150km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보는 차창밖 풍경은 그 속도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느리고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간다. 나에겐 제임스 설터의 문장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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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우리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

디지털 세계를 위한 아날로그 맥주를 표방하는 유니온 앤드와 제임스 설터의 <아메리칸 급행열차>에는 얼마나 큰 상관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거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매일매일 하루를 버티며 전속력으로 전진하는 우리 일상도 한 발자국 떨어져 관망하면 차장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속력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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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3. 앤드유니온 스테피 바이스/ 선데이 페일에일
Style – 밀맥주 / 페일 에일
With – 제임스 설터 <아메리칸 급행열차>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