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인사드린다. 디에디트에 처음 글을 쓰는 객원 에디터 이재민이다. 만화평론가로 산 지는 이제 9년차, 만화전문 에디터로 산 지는 7년차, 만화문화연구소장으로 산 지는 4년차, 서울웹툰아카데미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산 지는 3년차가 됐다. 이번 디에디트 글도 만화로 쓰고 있는데, 이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만화를 읽을 때 ‘그만 일하라’는 잔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만화 보는 게 일인 사람에게 신작은 축복이다. 새로운 작품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웹툰은 말 그대로 매일매일이 눈 내리는 날 같다. 볼 때는 즐겁고, 쓸 때는 괴롭다는 얘기다. 하지만 괴로움은 나의 것이다. 결국 쓰는 사람은 나니까, 독자 여러분은 즐겁기만 해도 된다. 매주 따라갈 수 있는 신작들과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명작을 준비했으니,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
1. 호수의 백조

작품의 시작은 1960년대. 문화생활이 사치이던 시절, 발레를 본 백순옥의 시점이다. 순옥은 발레리나를 꿈꾸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 앞에 열등감을 느낀다. 함께 발레를 하자는 친구, 빛나는 재능을 가진 발레리나의 말에 순옥은 자신은 딸을 낳아 발레를 시킬 거라고 말하는데…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만 되지 않는다.
작품은 순옥의 장례식으로 넘어간다. 순옥은 딸은 낳지 못했고, 아들만 셋을 낳았고, 아들들은 미처 당사자에게 토해내지 못한 분노를 쏟아낸다. 그래도 될 정도로 장례식은 한산했기 때문이다. 정승이 키우던 개가 죽으면 조문을 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조문을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딱 그 꼴이다.
그리고 할머니 이름 덕에 그럭저럭 발레학원을 운영하는 손자만이 눈물을 흘린다. 좋은 할머니는 아니었다면서도.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주인공의 할머니 순옥이 2년 전 입양했다는 딸이 등장한다. 여기서 나는 약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썩어빠진 어른인 나는 일단 상속 문제부터 생각했다. 이제부터 집안싸움이 나는 것을 그릴까? 아니 일단, 발레에 미친 순옥 할머니는 도대체 이 아이를 왜 입양했을까. 심지어 그 아이는 순옥의 손자인 수원이보다 스무 살은 어린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주인공 수원에게는 고모인 셈이다.
발레에도 미쳤지만, 사실은 열등감에 미쳤던 사람인 순옥이 남긴 유산은 열등감이었다. 순옥의 삶은 겉으로 보면 훌륭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발레계의 거물, 협회장, 교수 같은 타이틀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겉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나 불완전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모순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열등감으로 평생을 살았던, 모든 걸 다 이뤘지만 열등감은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입양한 아이는 도대체 어떤 완벽한 천재일까.
내가 이렇게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면 그건 싫지만,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이 작품은 다분히 한국적인 맥락에서 재능과 열등감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다. 재능을 부러워해본 한국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따라 읽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 네이버 웹툰
- 1화 보러 가기
2. 우리 아이는 외계인에 납치됐어요

‘한국적인 맥락’ 하니 또 추천할 작품이 있다. 영화에서는 인기 장르로 꼽히지만, 만화에서는 비인기 장르로 꼽히는 것이 바로 스릴러다. 그 중에서도 미스터리는 엄청난 볼거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 그대로 최종 갈등까지 가는 ‘빌드업’이 길고, 또 잘 만들기도, 설득력을 갖추기도 어렵다. 그래서 비인기 장르로 꼽힌다. 연재해야 하는 웹툰에서는 몇 화씩 빌드업하는 것을 견뎌주는 독자가 드물다. 그리고 빌드업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한국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전화가 안 터지는 곳도 거의 없고, 전화가 터진다는 말은 인터넷도 된다는 얘기고, CCTV가 없는 곳도 거의 없다. 도시에 살고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외계인에게 납치됐어요’는 한국의 시골을 배경으로 빌드업을 시작한다. 개구리 소리, 고압 송전탑.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이나 ‘낯선 배경’ 정도로 여겨지는 것들이 삶의 터전인 곳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학생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갑자기 실종된 작품 속 첫 번째 소녀가 쫓고 있던 4년 전 또 다른 소녀의 실종사건. 잘 나가던 생명공학 연구자였던 그 소녀의 아버지는 갑자기 “내 딸이 외계인에게 납치됐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실종된 소녀의 아버지 별명은 ‘외계인’이고, 두 소녀의 실종사건은 아주 닮아 있었다.
사이다가 제일 잘나가고, 구구절절 사연보다는 호쾌하게 주먹을 뻗는 것이 인기라지만 역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까 그게 떡밥일까?’ 하면서 쫓아가는 스릴러는 독자가 한발 더 들어가 몰입해야 재밌는 법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작품은 만들기가 아주 어렵다. 한발 더 들어오도록 만들기가 어렵고, 작품 속에 뿌려 놓은 단서들이 이어 맞춰지도록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작품 속 트릭이나 떡밥 회수가 ‘가짜’로 느껴지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것을 아주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그렇게 초대되어 한발 더 들어가면, 독자들은 질문 봇처럼 질문을 쏟아내게 된다. 자꾸 언급되는 외계인은 무엇일까. 형사들은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데 괜찮을까.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과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다가 저렇게 된 것일까. 그것이 두 사람의 실종사건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차로 가득한 거리를 아슬아슬 질주하는 추격전이나 가죽자켓 입은 형사가 한 방에 나쁜 놈을 날려보내는 액션은 없다. 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단서들이 하나씩 ‘또각!’ 소리를 내면서 맞춰질 때 느껴지는 쾌감은 ‘우리 아이는 외계인에게 납치됐어요’가 주는 선물이라고 해도 좋다. 귀한 것이 선물이라면, 이런 쾌감이야말로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고민하고 있으면 답을 건네준다. 얼마 전 연재를 시작했으니 가장 중요한 답은 아직 조금 남았다. 10화 베스트 댓글은 “후발대가 부럽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선발대라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또각!’ 하고 맞춰지는 단서들이 주는 즐거움을 따라가려면, 그리고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 올라탈 때다.
- 네이버 웹툰
- 1화 보러 가기
3. 인어기담

혹시 ‘묘진전’이라는 웹툰을 아는가. 아직 모른다면, 인생에 큰 즐거움이 하나 남아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인어기담’은 젤리빈 작가의 신작이다. 카카오웹툰을 대표하는 작가로 아직 강풀, 윤태호 작가를 기억한다면 이제 젤리빈도 업데이트해 둘 필요가 있다.
‘묘진전’을 시작으로 ‘어둠이 걷힌 자리엔’, ‘도깨비는 우는 법을 모른다던데’까지, 한국적인 설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 젤리빈은 이번에도 가상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기묘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배경은 가상의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략해온 한반도다. 전쟁이 한창이라면 당연히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절망이 가득할 것이다. 원보라는 인물은 사람들의 절망과 불안을 눈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꺼뜨릴’ 수 있다. 전쟁터에 끌려갔고, 거기서 칼잡이로 살아남아 엄청난 힘을 갖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고향에는 원보가 떠날 때는 없던 신이 생겼는데, 이 신들은 사실 도소리와 도보리라는 귀족의 쌍둥이 자식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인어고기를 먹고 불사의 몸이 되어 스스로를 신이라고 부르면서 뻔뻔하게 마을에 눌러앉았다.
하지만 능력이 없지는 않아서 죽어가는 사람도 피를 먹여 되살리고, 해류를 읽고 날씨를 읽어 매일이 풍요롭게 해준다면 당연히 신이라고 믿을 것이다. 원보도 그들이 신이라고 믿었다. 머리가 하얗게 샌 도보리의 머리에 피어오른 절망을 꺼줄 때는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앞서 말했듯, 젤리빈은 우리나라에 있는 설화들을 각색해 풀어낸다. 우리나라에 인어고기 설화가 있는지 궁금할 수 있는데, 있다. 비구니 ‘낭간’ 설화다. 가난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구해온 인어고기를 먹고 불로의 몸이 되어 결혼하지 못해 기생으로, 이후에는 비구니로 살다가 산에 들어가 사라졌다는 ‘옛날’ 이야기다.
물론 설화는 모티프일 뿐이고, 낭간 설화가 진짜 모티프였는지도 불분명하다. 2026년의 젤리빈은 더 가까이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불사의 힘을 가진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악용하고, 원보의 ‘절망을 없애는’ 능력과 더해져 무슨 비극을 낳는지를 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가 아닐 것이라는 점은, 젤리빈이 전에 연재한 작품들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다. 혹시라도 웹툰이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면, 젤리빈의 작품을 보면 된다.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얼마나 재밌는 것이 많은지 알게 될 것이다.
- 카카오웹툰
- 1화 보러 가기
4. 도나츠와 서커스

올해 초에 만화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작가들이 매번 언급하는 작품이 있었다. ‘이태원 클라쓰’의 광진 작가가 “진짜 대단하다”고 극찬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 무슨 서커스?였는데”라고 누가 운을 떼면 “‘도나츠와 서커스!'”라고 받는 식으로 대화가 오갔다. 그거 봤냐고, 어떻게 이런 만화가 있냐고 입을 모았다. 만화가들이 평론가인 나에게 먼저 작품 추천을 하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진짜 미친 작품이거나, 아니면 도대체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거나. ‘도나츠와 서커스’는 당연히 전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도나츠와 서커스’는 ‘대폭발’이라는 재앙 이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일상을 보여주는 귀여운 만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스크롤을 빠르게 넘기면 안 된다. 하나하나 새겨가면서 보면, 눈에 새겨놓은 그 장면들이 다시 폭발하듯 충격적인 장면으로 돌아올 것이다. ‘슥슥’ 넘기지 않고 꼼꼼하게 보면 작품 속에 꾹꾹 눌러담아 숨겨둔 단서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어놓은 짜임새가 아주 훌륭하다. ‘우리 아이는 외계인에게 납치됐어요’가 ‘또각!’이라면, 이 작품은 ‘빠가각!’ 하고 끼워맞춰진다. 억지로가 아니라 제대로 맞춰진건데도 ‘이래도 되나?’싶은 충격이 있다.
만화는 글과 그림으로 만들고,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좋은 만화는 ‘쉽게 읽히되 쉽게 소화되지 않는’ 작품이다. 밥이나 케이크와 달리, 웹툰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소화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만화의 즐거움이다. 많이 먹어도 불쾌하게 배부르지 않고, 쉽게 소화가 안 되더라도 댓글에 사람들이 남겨놓은 고민의 흔적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댓글을 안 보는 나도 댓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봤다. 좋은 작품은 댓글 남기는 사람들을 다시 독자로 돌려놓는다. ‘도나츠와 서커스’는 그런 작품이다.
- 네이버 웹툰
- 1화 보러 가기
About Author
이재민
만화평론가이자 만화 전문 에디터. 서울웹툰아카데미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