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시간이 날 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대한민국에서 어른으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책 다섯 권을 골랐다. 자기계발 영상 100개 보는 것보다 이 책 5권 읽는 게 당신의 생존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1]
<현대 사회 생존법>
“진화의 역사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현재 모습보다 더 엉망이어야 한다.”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생존 스킬을 기대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이 책은 패스하셔도 된다. 알랭 드 보통은 그저 현대사회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식으로 조목조목 설명할 뿐이니까. 그럼 제목이 왜 <현대 사회 생존법>일까. 원제도 <How to Survive the Modern World>인 걸 보면 번역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하긴, 그는 꿀팁 하나 없이 <여행의 기술>을 쓴 사람이었지…)
서문에 적힌 문장을 읽으면서 의문이 풀렸다. “비록 각자가 외로움을 겪고 있긴 해도,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우리 마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산물이다.” 한마디로 ‘내 탓’ 하지 말고 ‘세상 탓’ 하라는 얘기다. 탓하려면 우선 알아야 한다. 그 현대 사회란 놈이 얼마나 고약한지. 그걸 모르면 괜히 나를 탓하게 되고, 우리가 우리 마음을 탓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정말 힘들어진다. 그래서 “세상 살기 참 힘들다” 하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한다. 생존법은 없지만 생존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 지식과 통찰이 가득한 이 책을 읽으면서 뜻밖의 위로를 많이 받았다. 현대 사회가 편리해 보여도 은근히 난이도가 높은 시대다, 남들 다 화려하고 행복해 보여도 속으로는 애쓰며 버티고 있다, 너는 아니 우리는 정말 잘하고 있다. 특히 내가 받은 최고의 위로는 다음 문장이었다. “일과 가정생활이 상충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이나 의욕 부족 때문이 아니다. 단지 두 가지 거대한 상반되는 주제가 충돌하는 역사의 한 시기에 살고 있을 뿐이다. (…) 우리는 크나큰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
- <현대 사회 생존법> | 알랭 드 보통&인생학교 | 스피어인 | 2만 7,500원
[2]
<달리기의 기쁨>
“나는 달리기에 희망을 걸었다.”
하면 좋다는 것도 알고 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꾸준히 하기는 어려운 것들이 있다. 운동, 영어공부, 독서, 일기쓰기 등… 실행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달리기를 하고 싶으면 달리기 책을 읽으면 된다. 달리는 것보다야 책 읽는 게 쉬우니까. (다행히 난 독서 근육만큼은 꾸준히 키워왔다.)
실제로 달리기 책을 읽다가 그날 밤 바로 뛰쳐나간 적이 몇 번 있다. 몇 번이 몇십 번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게 어딘가. 빌려 읽고 반납한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굳이 또 사서 상비약처럼 쟁여둔 것도 그래서다. 달리고 싶을 때, 아니 달리고 싶어지고 싶을 때 써먹으려고. 이 책 <달리기의 기쁨>도 그래서 골랐다. 달려보려고.
저자는 등을 잘 떠민다. 일단 5분만 뛰어보란다. 힘들면 곧장 집으로 오면 된단다. 폼나는 운동복, 기록 단축을 위한 신발, 경치 좋은 코스 없이도 당장 시작할 수 있단다. 미리 얘기하자면, ‘잘 뛰는 법’ 같은 건 이 책에 없다. 이 책의 타깃 독자는 잘 뛰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일단 뛰고 싶은 사람이다.
저자가 그랬다. 2킬로든 3킬로든, 빠르든 느리든 일단 뛰었다. 절박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시달려온 공황장애, 괜찮다가도 갑자기 찾아오는 불안증, 예기치 못한 이혼까지 온갖 장애물에 허덕이던 그에게 달리기는 탈출구였다.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지배력을 되찾게 해줄 수단”이었다.
나는 어땠나. 나이키 러닝 앱에 쌓인 기록을 열어봤다. 2018년부터 뛰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유독 힘들었던 시기에 많이 뛰었더라. 뛰면서 그 시기를 지나왔더라. 달리기의 기쁨은 딴 게 없다. 숨쉬기의 기쁨, 버티기의 기쁨, 계속 살기의 기쁨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을 예정이니, 이 책도 하루키 책 옆에 나란히 꽂아둬야겠다.
- <달리기의 기쁨> | 벨라 매키 | 갤리온 | 1만 8,000원
[3]
<C. S. 루이스의 글쓰기에 관하여>
“내용이 생각의 표현이라면 형식은 감정을 표현해주거든.”
서울국제도서전은 올해도 성황리에 끝났다. 사람들은 왜 도서전에 갈까. 올해도 못 간 나는 왜 SNS에 올라오는 후기글을 챙겨보며 ‘내년엔 꼭 갈 거야’라고 다짐할까.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쑥스러워서 대화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책이 좋아 죽겠는 그 마음’ 정도는 느끼고 싶어서. 내년엔 꼭 코엑스를 누비며 내적 반가움을 원 없이 나눌 수 있기를.
글쓰기 책을 읽는 이유도 도서전에 가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돈 안 된다고 무시받으며 영상에 밀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언가로 여겨지는 글쓰기가, 여기서만큼은 주인공 대접을 받으니까. 글쓰기 책을 읽을 때만큼은 “내가 쓸모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주눅드는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이 책을 쓴 C. S. 루이스는 무려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집필한 거장이다. 글쓰기에 대한 내 생각과 비슷한 대목이 나올 때마다 괜히 내 어깨가 올라갔다. 호랑이 뒤에 숨은 여우처럼 으스대고 싶어진다. “거봐, 글은 무조건 간결하되 구체적이어야 한다니까? 어려운 전문용어는 글쓰기의 적이라니까? 내가 뭐랬어?”
그는 동화로 유명한 작가다. 그런데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동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그릇이 동화였을 뿐이다. 그는 말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아이들이 뭘 좋아할까?’가 아니라 ‘나는 뭘 좋아할까?’라고. 아이 앞에서 어설픈 어른 흉내는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신나게 얘기해야지.
- <C. S. 루이스의 글쓰기에 관하여> | C. S. 루이스 | 두란노 | 1만 5,000원
[4]
<AI블루>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다들 자기만의 취향, 그러니까 툭 튀어나온 부분들이 있고요.”
2023년 어느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김애란 작가는 챗GPT 이야기를 꺼냈다. 챗GPT 기획기사를 빠짐없이 찾아 읽으면서도, 막상 사용해보려니 망설여졌다고 한다. “일종의 고집이기도 했고 어떤 방어적인 무시 혹은 매혹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아 그랬습니다.” 신기했다. 김애란 정도 되는 작가도 챗GPT 앞에서 복잡한 마음이 되는구나. 나만 고집부리고 무시하고 두려운 건 아니구나. 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주저하고 있으려나. AI가 몇 초 만에 뽑아낸 멀끔한 문장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AI 발전했다, 챗GPT 편하다 이런 얘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하지만 AI 앞에 앉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는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나의 고집, 무시,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기술에 휩쓸린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들.’ <AI블루>의 부제는 내가 알고 싶은 바로 그것이었다.
저자 두 사람은 개발자와 연구자다. 둘은 여러 직군의 사람들을 만났다. 디자이너는 말한다.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좋아한 만큼 노력도 많이 했죠. 그런데 이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결과물이 뚝딱 만들어진다는 게 너무 허탈하게 다가와요.” 소설가는 말한다.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서사 가운데 가장 평이한 이야기를 뽑아서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챗GPT를 쓰면서 느낀 ‘왠지 모를 기분 나쁨’이 조금은 구체화되는 느낌이다.
김애란 작가는 챗GPT의 가장 큰 무능을 한줄로 요약한다. “모른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이어지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인간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서툴고 오류 많은 문장들을 계속 적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AI블루> | 조경숙&한지윤 | 코난북스 | 1만 6,000원
[5]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그는 결코 강한 경쟁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불편을 감수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글 몇 편의 주제가 비슷했다. ‘요즘은 부모가 자식을 워낙 귀하게 키운다. 힘든 일은 못 하게 하고, 중요한 결정도 대신해준다. 자식은 주체성을 키울 기회가 없다. 그 결과,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곁만 맴돈다.’ 인과관계만 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서툰 사람 손에 맡기는 것보다는 대신 해줘버리는 게 더 편하고,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그 서툰 사람은 ‘해내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어려우니까.
그럼 부모들이 자식을 덜 귀하게 키워야 하느냐. 아니, 그럴 수 있느냐. 자식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없다. 몇 번 좌절했다가 자포자기해버리면 어떡하나? 그리고 나는 이쁜 내 새끼 기뻐하는 모습만 보고 싶단 말이야… 첫째딸이 요즘 부쩍 떼를 쓴다. 어르고 달래다 지쳐 ‘알았어 알았어’ 하고 응석을 받아주는 일이 잦아졌다. 이래도 되는 걸까. 마침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책을 만났다.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저자가 어릴 때 뛰었던 야구팀 코치의 이야기다. 코치는 항상 책임감을 강조했다. 학생이 아니라 선수로 대했다.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다. 슬라이딩을 연습하다가 무릎에 피가 나도 개의치 않았다. 상처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고 믿었다. 코치는 저자 말고도 많은 아이들의 인생을 바꿨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부모들 때문이다. 자기 아들이 겪을 좌절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다. 그 마음이 이해는 된다. 하지만 코치 편을 들고 싶다. 아이가 아무리 예뻐도 어른이 되길 바라니까. 나이 먹은 아이로 남길 바라진 않으니까.
책을 덮으려는데 누가 묻는다. 너는 어른이 되었니? 아차. 서른 일곱살 먹은 이 아이는 왜 어른이 되지 못했으며, 어른이 되려면 뭘 더 해야 하는가. 내 코치는 어디 있나. 사는 게 쉽지 않다.
-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마이클 루이스 | 모로 | 1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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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