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넷플릭스보다 더 재밌는 소설 5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5. 06. 04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에디터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시간이 날 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배우 박정민이 쓴 소설 <혼모노> 추천사에서 힌트를 얻어 이번 달에는 ‘넷플릭스보다 재밌는 소설책’ 5권을 골랐다. 무섭고, 웃기고, 슬프고, 놀랍고, 참신한 책들이다. (비밀이 하나 있는데요… 사실 넷플릭스보다 재밌는 책은 이 세상에 무지 많습니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혼모노

소설을 칭찬할 때 ‘영화 같다’는 표현이 종종 쓰인다. 영화가 소설보다 뛰어난 장르임을 전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살짝 나쁘기도 하지만, 뭐 그만큼 재밌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극장에서 OTT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칭찬의 디테일도 살짝 바뀌었다. “넷플릭스 왜 보냐”는 배우 박정민의 도발적인 추천사는, ‘뭔진 몰라도 엄청 재밌나 보네’하는 기대를 갖게 했다.

앞의 두 작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소문이 안 좋은 영화감독을 덕질하는 모임에서 벌어진 이야기고, ‘스무드’의 주인공은 우연히 태극기 집회 인파에 휩쓸린 재미교포다. 2025년 한국사회를 적극 반영한 설정은 재밌었지만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이 잘 안 되어서 끝이 허무했다. 넷플릭스를 볼 때 느끼는 아쉬움과 닮았다.

단편집의 좋은 점은 한두 편 읽고 실망스럽더라도 바로 다음 편에서 보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보석을 찾았다. 표제작 ‘혼모노’는 무형문화재를 꿈꾸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20년 차 무당의 이야기다. 킥킥대며 읽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나는 지금 얼마나 진짜(혼모노)인가를 생각했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고문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를 맡게 된 건축가와 그의 제자를 그린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져 한 호흡에 다 읽고 나니 참신한 그릇 안에 보편적인 주제가 담겨 있었다. 보석을 찾아서인지 이어지는 세 작품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단편집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너와 나의 취향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든 소설이 남에겐 실망스러웠거나 내가 볼 땐 그저 그랬던 이야기가 누군가의 인생소설로 등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단편집을 다 읽고 나면 남들이 쓴 리뷰를 찾아 읽으며 내 보석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엿보곤 한다. 좋았을 수 있겠네, 별로였을 수 있겠네. 그럼에도 난 이런 걸 좋아하고, 또 이런 걸 지루해하네.

  • <혼모노> | 성해나 | 창비 | 1만 8,000원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아기 키우면서 책은 언제 읽어요?” 종종 받는 질문이다. 아기가 아직 어려서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진 않다. 짬을 내야 한다. 다행히 회사가 멀어서 출퇴근길을 활용하면 한 주에 10시간은 확보된다. (스마트폰에 정신만 뺏기지 않으면…) 퇴근 후 아기가 잠든 밤도 책 읽기 좋은 시간이다. (재우다 같이 잠들지만 않는다면…)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 아기를 재우고 이런저런 밀린 일을 처리한 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를 펼쳤다. 제목 그대로 일본 어느 지역에서 나도는 괴담을 모자이크처럼 자르고 붙여 만든 소설이다. 입 찢어진 소년. 부적 붙은 방. 옥상에서 점프하는 여자. 너무 활짝 웃어서 입이 귀에 걸린 귀신의 표정. 캄캄한 밤에 초 하나 켜고 나누던 “무서운 이야기”들과 비슷한 패턴인데, 비슷하게 무섭다. 30분 넘게 읽다가 결국 포기하고 얼른 다른 책으로 도망쳤다. 아무래도 밤에 혼자 읽기는 무리였다.

다음날 어린이집 운동회에서 허리를 다쳤다. 요령 없이 의욕만으로 줄다리기에 임한 탓이었다. 주말 내내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옆으로 누워 자야 했다. 월요일 새벽 4시에 눈을 뜨니 허무하게 날려버린 주말이 아까웠다. 누운 채로 핸드폰을 켜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를 마저 읽었다. 공포가 허리 통증에 눌려서인지 며칠 전보다 무서움이 덜해서 소름 끼치는 에필로그까지 중단 없이 다 읽을 수 있었다.

완독 후 전자책 앱을 끄고 사진 앱을 켰다. 못 보던 영상들이 왕창 찍혀 있었다. 운동회날 아내가 찍어뒀나 보다. 줄다리기하는 내 모습도 있었다. 떠밀려 맨 앞에 선 나는 이리저리 휘둘리더니 줄다리기가 끝나자마자 찡그린 표정으로 허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면서도 애써 웃고 있었다. 아이랑 아이 친구들 앞에서 세 보이고 싶었나 보다. 영상 속 나는 허리를 삔 채로 기어이 장애물 계주에 나가 코끼리 코 열 바퀴를 돌더라. 폰에 남겨진 그 코끼리 코 영상이, 긴키 지방의 입 찢어진 소년이나 부적 붙은 폐가보다 더 괴기스러웠다.

  •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 세스지 | 반타 | 1만 6,800원

“소원은 바라는 걸 비는 거고, 기도는 필요한 걸 비는 거지.”

나의 작은 무법자

고백한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범죄소설을 즐긴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죽으면 애도하기보다 ‘드디어 본격적인 시작이구나!’하고 설렌다. 탐정이 살인범의 트릭을 밝혀내면 분노하기보다 ‘우와 기가 막히네!’ 감탄한다.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특별히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범죄소설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근데 <나의 작은 무법자>를 보고 반성했다. 범죄소설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아는 한 마을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후 30년이 지나도록 이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찰서장이 된 워크. 변호사가 된 마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스타. 그리고 출소를 앞둔 빈센트. 그들 중 한 사람이 죽고, 마을은 다시 충격에 빠진다.

<나의 작은 무법자>는 범죄소설에 대한 내 기준을 한 단계 높였다. 누가, 왜 죽였는지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과정이 기본 줄거리지만 사람 목숨을 도구로 여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죽은 사람과 남겨진 사람, 심지어 죽인 사람마저도 한 명의 인간임을 느끼게 한다. 사건의 해결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깨닫게 한다.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등장인물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범인이 누구냐, 진실이 무엇이냐는 별로 안 궁금하다. 아니, 진실 따위 묻혀버려도 괜찮으니 그냥 이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어떻게 이런 범죄소설을 쓸 수 있지? 책 말미 ‘작가의 말’에 힌트가 있다. 저자 크리스 휘타커는 이 소설을 “실수에 관한 이야기,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나의 작은 무법자> | 크리스 휘타커 | 위즈덤하우스 | 1만 9,000원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여주마. 이것은 복수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넷플릭스보다 재밌는 소설을 손쉽게 찾는 방법 중 하나는 일본 미스터리 목록을 훑는 것이다. 김전일과 코난의 나라답게, 일본은 미스터리 시장이 워낙 크다. 흥미로운 작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걸출한 신인 작가도 매년 등장한다. 연말에 발표되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같은 랭킹만 참고해도 장바구니를 가득 채울 수 있다. 북스피어, 리드비, 블루홀식스 같은 출판사에서 좋은 작품을 꾸준히 번역 출간하고 있다. 지금 소개할 책도 그렇게 신간 목록을 뒤지다 발견했다.

저자 아라키 아카네는 98년생이다. 출판사에서 붙인 수식어 ‘MZ세대 애거사 크리스티’가 호들갑이 아닌 것이, 데뷔작 <세상 끝의 살인>으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최연소 수상했다. 소행성과의 충돌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당시 디에디트에도 이 책을 소개했다. “독특한 설정에 기대 용두사미로 끝나는 작품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 결말까지 이야기를 ‘말이 되게’ 끌고 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

신작의 구성도 독특하다. 1막은 고립된 섬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 이야기로, 한 명씩 죽어나가는 와중에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김전일식 추리극’이 펼쳐진다. 2막은 토막 사체를 발견한 쓰레기 수거원이 경찰과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수사극이다. 책 한 권에서 3가지 맛을 느낄 수 있다.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는 1막,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2막, 그리고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진실로 연결되는 결말까지. 이번에도 작가는 참신함과 완성도를 모두 놓지 않았다. 특히 어두운 분위기의 1막과 대조되는 2막의 산뜻함이 인상적이다. 

  •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 아라키 아카네 | 북스피어 | 1만 9,800원

“그거 알아? 당신도 맛이 간 거?”

퍼니 사이코 픽션

평론가 박혜진의 두 가지 욕망이 이 책을 만들었다. 첫째, 소설 속 ‘맛이 가버린’ 사람들을 모아보고 싶다. “인간이란 모순, 무질서, 혼돈, 그리고 느닷없음의 동의어”니까. 둘째,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간 작품을 ‘끌올’하고 싶다. 나만의 기준으로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소설을 뽑아보자. 그렇게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쓰인 소설 일곱 편을 추리고 짧은 비평을 덧붙였다. 2025년을 살아가는 평론가의 눈으로 본 세기말의 사이코. 이런 기획은 넷플릭스도 못한다. 문학의 힘이다.

첫 작품 송경아의 <정열>에는 남자와 여자가 나온다. 여자는 정열적으로 남자를 원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정열이 부담스럽다. 남녀관계의 전형적인 끝으로 치닫는가 싶더니, 극장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둘의 입장이 바뀐다. 이 소설을 “변화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 비평까지 읽고 나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지루한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김이태의 <식성>도 재밌게 읽었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짐승처럼 고기를 탐하곤 했다. ‘나’는 그런 언니가 징그러웠다. 그랬던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비구니가 되겠다며 절에 들어간다. 고기는 냄새도 못 맡겠다면서. 평론가는 언니를 관찰하는 ‘나’에 주목한다. 양극단을 오가는 언니가 사이코라면, 항상 중간을 지향하느라 자기 욕망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나’는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이상한 사람들이 가득한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모든 인간은 약하고, 그래서 특별하고, 그래서 우린 모두 사이코다. 저자가 쓴 에필로그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나도 이 글을 비슷하게 끝내고 싶다. 나도 사이코다.

  • <퍼니 사이코 픽션> | 박혜진 엮음 | 클레이하우스 | 1만 7,000원
About Author
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