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차에 대해 글 쓰는 객원 에디터 박주연이다. 나는 보통 1시가 넘어서야 잠에 드는 편이다. 야근도 하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집안일 좀 하다 보면 어느새 1시를 넘겨있다.
사람마다 밤의 길이는 제각각이다. 아이를 재우다 이른 밤에 함께 잠드는 사람부터, 창작의 고통으로 새벽 2~3시까지 깨어 있는 사람까지. 밤의 길이는 달라도 잘 보내고 싶은 마음은 비슷할 것이다. 그런 밤에 차 한 잔을 추천하고 싶다. 차는 남은 시간을 또렷하게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음가짐이 되기도 하니까.
여러 밤에 걸쳐 차를 마시며 몸소 터득한, 저녁부터 밤까지 즐기기 좋은 차 리스트를 준비했다. 시간대별로, 상황별로 정리했으니 각자에게 맞는 차를 찾길 바란다.
<6PM>
아직은 조금 또렷하고 싶을 때
오후 6시.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으로 저녁의 할 일까지 해내기엔 벅찬 날이 있다. 읽다 만 책도, 끝내지 못한 일도 남았는데 벌써 하루를 접기가 아쉽기도 하고. 그럴 때 더 또렷한 저녁을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차를 끓인다. 추천하는 차는 교쿠로와 짜이다.
교쿠로

‘차 맛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라는 생각을 쏙 들어가게 하는 내 비장의 무기, 교쿠로. 이 차를 집에 온 손님에게 내주면 다들 처음 느껴보는 맛에 깜짝 놀란다. 교쿠로는 일본 녹차의 한 종류인데, 수확 전 약 3주 동안 햇빛을 가려 키워 감칠맛을 내는 테아닌이 풍부하게 남아, 녹차 하면 떠올리는 쌉싸래함보다 진한 감칠맛과 단맛이 두드러진다. 해조류나 육수를 연상시키는 맛이라 처음에는 이게 정말 차인가 싶을 수도 있다.
마시는 방법도 독특하다. 내가 교쿠로에 입문한 찻집 ‘사쿠라이’에서는 첫 두 잔은 낮은 온도의 물로 소량씩 진하게 우리고, 세 번째에는 뜨거운 물을 더하는 방법을 안내했다. 같은 찻잎에서 감칠맛부터 산뜻한 떫은맛까지 차례로 꺼내 마시는 재미가 있다.
맛뿐 아니라 카페인도 강렬하다. 자료에 따르면 대략 커피의 약 2.7배. 다만 교쿠로는 작은 잔으로 마시다보니 한 잔의 카페인이 커피 한 잔보다 무조건 많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카페인이 필요한 밤에만 추천한다.
교쿠로 사기 좋은 곳 <사쿠라이 재패니즈 티 익스피리언스>
도쿄에 갈 일이 있다면 이 찻집을 추천한다. 이름 그대로 차 한 잔이 ‘경험’이 되는 곳. 나도 이곳에서 교쿠로에 입문했다. 차를 내는 퍼포먼스도 훌륭하지만, 산지와 품종에 따른 차이를 살펴보며 다양한 교쿠로를 고르는 재미도 있다. (교쿠로 호슌/교토 50g, 4,050엔)
짜이

할 일에 파묻혀 오래 홀짝거리기에는 짜이가 좋다. 짜이는 종류가 다양한데 홍차에 카르다몸, 계피, 생강 같은 향신료를 넣고 우유와 함께 끓이는 게 우리에게 익숙한 짜이. 우유의 고소함 사이로 향신료의 알싸한 향이 올라온다.
도쿄의 찻집 ‘쵸케쿄’에서는 우유 없이 사이펀으로 추출한 짜이를 마실 수 있다. 집에서도 그 한 잔을 떠올리며 우유 없이 마셔봤다. 저녁이라 배부른 게 싫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하다. 그래도 내 취향은 역시 우유를 넣고 끓인 쪽이다.
카페인은 대체로 교쿠로나 커피보다 적은 편이지만 홍차 베이스라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완성된 짜이의 카페인 함량은 찻잎의 양과 끓이는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짜이 사기 좋은 곳 <높은산>
서울에서 짜이에 진심인 카페를 꼽으라면 ‘높은산’이 있다. 집에서도 짜이를 즐길 수 있게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 판매 중이다. 한 번 끓일 분량으로 소분된 제품을 고르면 여러 향신료를 따로 사서 배합할 수고를 덜 수 있다. 짜이는 좋아하지만 향신료를 잔뜩 들일 자신은 없는 사람에게 좋은 선택이다. (짜이팩, 1회 분량당 2,000원)
[8PM]
향이 좋은 차와 보내는 저녁 시간
6시엔 남은 일을 해내려고 차를 끓였다면, 8시는 차를 마시려고 잠깐 하던 일을 멈추기 좋은 시간. 보이차와 호지차는 향을 느끼기 좋은 차다. 흙과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향, 곡물을 볶은 듯한 구수한 향. 둘 다 카페인이 조금은 있으니 잠들기 직전보다는 아직 여유가 남은 저녁에 작은 잔으로 즐겨보자.
보이차

보이차는 크게 생차와 숙차로 나뉜다. 생차는 햇볕에 말린 찻잎으로 만들고, 보관 중에 서서히 숙성시킨다. 숙차는 수분과 온도를 조절하여 미생물 발효를 촉진하는 ‘악퇴’ 과정을 거치며 맛을 만든다.
생차는 산뜻한 꽃향과 쌉싸래하고 떫은맛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오래 숙성하면 그 맛이 한결 둥글어진다. 숙차는 흙과 나무를 닮은 묵직한 향에 부드러운 질감과 은은한 단맛이 특징이다.
저녁에 추천하는 건 숙차 쪽. 부드러운 질감과 삼킨 뒤의 단맛에 집중하며 마시기 좋다. 보이차가 카페인이 적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연구 결과도 너무 천차만별이지만 확실한 건 커피보단 월등히 적다.
보이차 사기 좋은 곳 <차예마을>
보이차를 간편하게 즐기는 방법이 있다. 보이차를 추출해 농축한 뒤 동결건조해 고체로 만든 ‘보이차고’다. 꼭 목캔디처럼 생겼는데 물에 녹여 마시면 돼서 아주 간편하다. 찻잎을 거르거나 다구를 씻을 필요도 없다. 하나 장만해두면 저녁뿐 아니라 입이 심심한 아침, 점심에도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정성스럽게 찻잎을 직접 우려 마시는 게 보이차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보이차고의 간편함만큼은 인정. 차예마을 사이트에서 판매 중이다. (보이숙차고 60g, 2만 2,500원)
호지차

녹차의 잎이나 줄기를 볶아 만드는 호지차도 좋다. 볶은 곡물이나 견과류를 떠올리게 하는 고소한 향이 난다. 보이차가 구수했다면 호지차는 고소하다. 가루로도 유통돼 차선으로 풀어 마시거나 우유를 더해 라테로 즐길 수 있다. 포스트 말차로 주목받는 호지차이니 이 기회에 다들 즐겨보길.
일본 농림수산성의 참고값에서 호지차의 카페인은 100mL당 20mg으로 커피의 약 1/3이다. 실제 함량은 사용하는 잎과 줄기, 찻잎의 양과 추출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호지차 사기 좋은 곳 <소식다료>
소식다료는 국내산 찻잎을 직접 볶는 구례의 찻집이다. ‘101 보편’은 초콜릿, 구운 김, 누룽지를 향미로 소개하는 호지차다. 만약 카페인에 강하다면 소식다료가 원두와 블렌딩한 호지차도 추천한다. 교쿠로처럼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렬하면서도 고소한 맛에 반할 것. (현재 사이트에서는 제품들이 대부분 품절 처리로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가격 문의 후 구매 가능 @sosik_daryo)
[9PM]
출출한 밤을 고소쌉쌀하게 달래는 법
입이 궁금하고 심심한 시간. 뭘 먹자니 부담되고 안 먹자니 아쉽다. 이럴 때 꺼내기 좋은 차의 재료는 팥, 메밀, 쑥, 호박이다. 네 가지 원물 모두 카페인이 없다. 고소한 맛부터 쌉싸래한 향, 은은한 단맛까지. 야식을 완벽하게 대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살짝은 입이 달래질지도.
팥차

설탕 없어도 맛있는, 우린 팥의 고소함을 아는 사람은 주목. 달콤한 팥소보다는 볶은 콩을 닮은 담백한 맛이다. 추천하는 건 을지로에서 팥을 전문으로 다루는 카페 적당의 팥차. 한 포씩 꺼내 마시기 편하고, 선물하기 좋은 패키지도 마음에 든다. 팥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틀림없이 좋아할 맛이다. (팥차 10개입, 1만 6,000원)
호박차

은은한 단맛이 당길 때는 호박차를 추천한다. 살짝 노란빛이 도는 차의 색도 예쁘다. 맥파이앤타이거의 호박차 티백은 늙은 호박을 덖어 만들었다. 설탕을 넣은 호박 음료의 단맛을 기대하기보다는, 구수한 향 뒤에 남는 은근한 단맛을 찾아 마시면 좋다. (호박차 티백 10입, 1만 6,000원)
메밀차

극강의 고소함을 원한다면 메밀차가 좋다. 메밀꽃필무렵 봉평촌의 통메밀차는 국내산 메밀 100% 제품이다. 티백도 편하지만, 내 취향에는 볶은 메밀을 직접 우렸을 때의 고소함이 더 좋다. 원하는 만큼 덜어 농도를 조절하며 마시기에도 편하다. (통메밀차 200g, 1만 5,500원)
쑥차

쌉쌀한 맛도 즐길 줄 아는 어른이라면 쑥차다. 맥파이앤타이거의 이른 봄 쑥차는 쑥 특유의 향에 고소함과 쌉쌀함이 더해진 무카페인 차다. 이름에는 봄이 들어가지만, 가을에도 잘 어울리는 맛이다. 잔을 가까이 가져갔을 때 올라오는 쑥 향부터 천천히 즐겨보자. (이른 봄 쑥차 30g, 2만 원)
[11PM]
이제 카페인은 됐고요
9시의 차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소개하는 두 잔도 카페인이 없다. 고소하고 쌉싸래한 차로 입이 심심한 밤을 달랬다면, 잠들기 전에는 가볍게 꽃향을 즐기거나 끝내 포기하지 못한 커피의 자리를 대신해보자.
캐모마일

캐모마일은 꽃향과 사과를 연상시키는 향을 즐기기 좋은 차다. 앞서 마신 구수한 차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볍게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 고른다. 흔히 잠을 돕는 차로 알려져 있지만, 수면 개선 효과를 확실하게 말할 만큼 연구 근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잠을 보장하진 않지만, 카페인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한 잔이다.
캐모마일 사기 좋은 곳 <오설록>
캐모마일만으로는 조금 심심하다면 블렌드 차도 있다. 오설록은 캐모마일에 진피·사과·레몬머틀·장미꽃잎을 블렌딩했다. 화사한 맛이 특징이다. (캐모마일 블렌드 10입, 1만 6,500원)
대체커피

밤 11시인데도 커피가 당긴다면, 카페인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원두를 쓰지 않은 대체커피를 고르자. 볶은 보리·호밀·치커리 뿌리를 섞은 무카페인 곡물 음료이면서 커피의 맛을 낸다고 해서 ‘대체커피’라고 불린다. 브랜드마다 배합은 서로 다르다.
내게는 다크하게 로스팅한 커피와 곡물차 사이쯤의 맛이 느껴졌다. 커피의 산미보다는 볶은 곡물의 구수함과 쌉싸래함을 기대하면 좋다. 완전한 커피 맛을 낸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커피의 향과 기분을 내기엔 괜찮은 선택이다.
대체커피 사기 좋은 곳 <SUPER>
말차 전문 브랜드인 SUPER에서 대체커피도 생산하고 있다. ‘슈퍼보리 포켓’이다. 대체커피가 대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다른 대체커피들도 궁금하다. (SUPER 보리 포켓 10입, 9,900원)
이 글을 마감하고 있는 시간 새벽 1시, 나는 지금 쑥차를 마시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저녁의 차에 대한 답이 됐으려나? 모두들 서로 다른 답을 가졌을테니 여러 잔을 시도해보길 바란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면 조금 더 또렷하게, 하루를 마쳤다면 느긋하게 각자의 밤을 무사히 잘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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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이롭게 쓰이길 바라며 오늘도 씁니다. 글로자 박주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