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여러분. 에디터H다. 내가 간만에 마음먹고 영업 나왔다. 각오 하시길. 오늘 리뷰의 주인공은 아이패드 프로 10.5.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면, 그냥 굴복하고 사는 게 좋겠다.
솔직히 재수없다. 재수 털릴 만큼 흠잡을 곳이 없다. 어떤 느낌이냐면 전교 1등 하는 애가 기초가 중요하다며 초등수학부터 다시 파기 시작한 거다. 그래서 수(數)의 지배자가 되어 돌아온 거지. 그래.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 라인업은 딱 그런 느낌이다.
아이패드 프로가 처음 나왔을 때를 추억해보자. 노트북 뺨치는 도발적인 가격, 12.9인치의 대문짝만 한 크기. 애플펜슬과 스마트 키보드라는 값비싼 액세서리. 모두(는 아니겠지만)가 괴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이 세상에 아이패드 프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팀 쿡과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확실히 타이밍이 묘하긴 했다. 태블릿은 저물어가는 카테고리였다. 스마트폰이 점점 커지고, 노트북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통에 태블릿이 살아남을 자리는 비좁아 보였다. 20~30만 원 대의 저가 태블릿도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에, 애플은 100만 원짜리 아이패드를 내놓은 것이다. 패기와 용기는 이 브랜드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아닐까.
말 많던 아이패드 프로가 결국 새로운 카테고리로서 자리 잡았다. ‘화면이 큰 스마트폰’ 정도의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하던 태블릿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 덕이다. 비싼 가격만큼 넉넉한 생산성을 담보했다. 아이패드가 ‘보는 기기’에서 ‘만드는 기기’로 진화한 순간이다.
[요즘 이효리 코스프레에 맛 들린 에디터M의 가운 패션]
아이패드 프로의 생산성은 맥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PC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PC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PC는 꼭 필요하다. 스마트폰도 꼭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패드는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니다. 사치품이란 얘기다(실제로 사치품의 사전적 정의는 생활의 필요 정도에 넘치는 물건이다). 규모와 상관없이 사치를 한다는 건 유희의 영역이다. 이 제품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이 제품을 구입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는 얘기다.
꼭 필요한 것만 사는 인생은 재미없다. 그래서 나는 애플의 제품군 중 아이패드 프로를 가장 좋아한다. 즐거우니까. 애플펜슬을 들고 작업을 하면 해피하다.
애플이 나처럼 아이패드 프로를 사치품이라고 정의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치스러운 경험’을 주기 위해 작정한 건 틀림없다. 내가 서두부터 말했지. 재수 없을 만큼 좋다고. 99%가 디스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패드 프로는 매번 ‘어제의 능력을 뛰어넘는’ 업그레이드를 감행해왔다. 기존 모델의 디스플레이도 이미 훌륭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퀄리티를 논하는 건 방망이 깎는 노인의 영역이다. 어쩌면 사용자들은 한 눈에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좋은건 원래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난 1년 동안 9.7인치 아이패드 프로를 사용했다. 애플의 진한 편애가 느껴지는 제품이었다. 앞으로 몇 년간 새로운 아이패드는 필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 새로 나왔다. 뭐가 달라졌을까.
일단 크기. 10.5인치. 전작인 9.7인치와 비교했을 때 미묘한 차이다. 다들 처음에 보면 “베젤이 진짜 얇아졌다”고 감탄하던데, 난 솔직히 처음에 별 감흥 없었다. 뭐, 9.7인치나 10.5인치나 그놈이 그놈이지. 호들갑떨만한 차이는 아니잖아?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넷플릭스를 보기 위해 아이패드를 들고 누웠는데, 묘한 이질감이 든다. 매일 보던 화면이지만 낯설게 다가온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화면 이쪽 저쪽을 살핀다. 그제서야 느낌이 온다. 아, 이거 확실히 더 커졌구나. 작은 차이인데 화면에 대한 몰입도는 훨씬 높아졌다.
[왼쪽이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 10.5, 오른쪽이 오래된(?) 애]
9.7인치와 나란히 포개놓으니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9.7인치에 비해 화면은 약 20% 더 넓혔지만, 휴대성은 거의 비슷한 수준.
난 사실 요즘 업계에 불고 있는 ‘베젤리스’ 디자인 열풍을 추종하지 않는다.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막상 손으로 잡고 사용할 땐 불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태블릿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전작에 비해 베젤이 많이 줄어든 아이패드 10.5도 마찬가지다. 세로로 들었을 땐, 신경 써서 잡아도 화면을 많이 가리게 된다. 조금 거슬린다. 조작하지 않을 때도 화면의 일정 부분이 계속 손바닥에 닿아있는 상태다.
다행히 똑똑한 아이패드 프로는 멀티터치와 베젤 그립을 정확히 구분해낸다. 몇 세대 동안 쌓아온 팜리젝션 기술 덕분이다. 이 순간을 위해 그간 두꺼운 베젤을 고수해온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진천재 에디터M이 아이폰7으로 남기신 명작 “토마토는 붉다”]
사진에서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좋은 디스플레이가 주는 느낌은 기묘하다. 화면 속에 존재하는 컬러와 현실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 당장이라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리얼함은 거듭 경탄을 자아낸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는 세상의 컬러는 어마어마하게 정교하고 섬세하다. 모든 디스플레이는 기술적인 진화를 통해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다양한 컬러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에는 P3 와이드 컬러 디스플레이가 적용됐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더 많은 컬러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단 얘기다. 특히 녹색과 빨간색을 더 다양하게 표현해낸다. 눈으로 보는 것처럼 풍성하게.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들이 만져질 것처럼 선명하게 말이다. 깜빡 속아 넘어가 주고 싶을 정도다. 거짓말에 능한 디스플레이라 칭하고 싶다.
아, 에디터M은 이걸 자신의 사진 실력이라고 믿는다. 사진 출처를 명시해달라고 보채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밝힌다. 사진 천재 에디터M이 아이폰7으로 찍은 토마토 사진이다.
화면은 정말 밝다. 해가 가장 잘 들어오는 시간에 창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태양빛에도 기죽는 일 없는 화사한 디스플레이다.
즐거운 상상을 해보자. 여름휴가를 떠나 태양이 자글자글 끓는 해변가에서 나태하게 누워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내 모습을 말이다. 선베드에 누워서 아이패드 프로 10.5를 꺼내는 거다. 선글라스 없인 세상을 마주보기 힘든 상황에서도 웹툰을 볼 수 있을 만한 야외 시인 성이다.
밝기를 수치로 설명하자면 최대 600니트. 1니트는 촛불 1개의 밝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패드 프로 10.5의 화면은 600개의 촛불이 반짝거리는 셈이다. 실내에서 최대 밝기로 해두면 눈이 시릴 정도다. 참고로 전작인 아이패드 프로 9.7의 최대 밝기는 500니트.
이제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의 하이라이트인 120Hz의 혁신을 이야기해볼 차례. 꺄아. 화면 주사율(scan rate)이라고도 표현하지만, 나는 재생률(refresh rate)이라고 말하겠다. 애플은 프로모션(ProMotion) 기술이라 부르더라.
자, 화면 재생률이란 무엇일까. 화면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표시될 때, 초당 몇 개의 이미지가 뿌려지는지를 뜻하는 말이다. 어렵다고? 어린 시절 교과서에 낙서했던 기억을 더듬어보자. 책장 한쪽 모서리마다 조금씩 움직이는 그림을 그려놓고, 한꺼번에 페이지를 넘기면 어설픈 애니메이션처럼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이것이 모든 애니메이션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이때 10컷의 그림을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20컷의 그림을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게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준다.
화면 재생률도 마찬가지다. 120Hz는 초당 120개의 프레임이 재생된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프레임수다.
아이패드 홈화면을 쓸어 넘기는 단순한 조작도 120Hz의 혜택을 입으면 완전히 달라진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진짜 같다. 손끝에서 앱 아이콘이 왼쪽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애니메이션이 너무나 부드럽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화면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가짜다. 내가 손으로 아이콘을 터치했다고 해서 실제로 만지는 것이 아니고, 화면을 오른쪽으로 넘겼다고 해서 실제로 아이콘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저 픽셀들이 빠른 속도로 모양을 바꾸며 ‘이동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120Hz의 속도로 이루어지다 보면 진짜처럼 느껴진다. 아이패드 홈화면이 프린트된 종이를 실제로 옆으로 넘기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상하고, 놀랍다. 소셜 미디어의 피드를 위 아래로 스크롤링 할 때도 훨씬 부드럽고 빠르게 손에 감긴다.
화면 재생률의 변화는 아이패드 프로의 여러 가지 면모를 한꺼번에 평가할 수 있는 요소다. 이토록 빠른 화면 재생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래픽 성능이 진화했고, 배터리 효율이 담보됐다는 뜻이다. 더 재밌는 건, 아이패드 프로가 항상 120Hz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이패드에서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24Hz에서 120Hz의 엄청난 폭을 오가는 가변 재생률을 보여준다. 애플 제품을 리뷰할 때마다 나오는 상투적인 멘트를 던질 타이밍이다. 프로세서의 처리 능력과 소프트웨어의 최적화가 보여준 결과물이다.
당연히 애플펜슬의 사용감도 더 좋아졌다. 애플펜슬은 계속해서 ‘진짜 펜슬’로 진화 중이다. 필압은 물론 펜슬의 기울기까지 더 예민하게 캐치해낼 수 있게 됐다. 요즘 내가 열심히 공부 중인 <Affinity Photo>라는 앱을 예로 들어보자. 본래 맥용 포토샵이라 불리는 전문가용 사진 편집 앱인데, 아이패드 버전으로도 나왔다. 고용량 사진 파일도 가볍게 다룰 수 있으며, 사진 위에 조명 효과를 넣을 땐 애플 펜슬의 기울기 만으로 밝기나 각도를 조정할 수 있다. 기능이 너무 많아서 열심히 공부 중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상으로 소개하고 싶다.
너무 화면 얘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아이패드 프로 10.5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 ‘지구 최고의 디스플레이’인걸. 마지막으로 반사율까지 살펴보자. 전작에도 적용됐던 아이패드 프로의 반사 방지 코팅이 더욱 견고해졌다. 앞서 언급했던 훌륭한 야외 시인성은 화면 밝기는 물론이고 반사 방지 코팅의 덕도 크다.
반사율 1.8%로 스트레스 없는 화면 감상 환경을 만들었다. 원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의 기기는 사진 촬영하기가 어렵다. 조금만 각도를 바꿔도 반사가 심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아이패드 프로는 다른 제품보다 훨씬 수월했다. 어떤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화면만 합성한 것처럼 선명하게 나온다.
아이패드 프로의 모든 것들은 사치스럽다. 가격도, 디스플레이도, 사용하는 경험마저도. 모든 것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사용자가 이 제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갈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오버스펙의 넷플릭스 머신으로 쓸 것이고, 누군가는 스케치북으로, 누군가는 악기로 사용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애플이 ‘아이패드 프로’라는 호사스러운 물건을 통해 ‘아날로그의 감각을 표현하라’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컬러, 손으로 책장을 넘길 때와 비슷한 반응 속도, 종이 위에 진짜 연필로 글씨를 쓸 때와 다를 바 없는 필기감. 디지털의 도구로 가장 아날로그와 닮은 경험을 만든다는 것. 흥미롭다.
우리는 언젠가 가장 진화한 아날로그가 될 거야.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도 짬짬이 풀어보겠다. 곧 업데이트를 앞둔 iOS11만 해도 아이패드 프로에게 바치는 선물 같은 기능이 즐비하니까.
10.5인치용 스마트 키보드는 9.7인치 버전보다 키보드 간격이나 크기가 여유로워졌다. 한/영 버튼이 생겼다는 점이 의미 있는 변화. 나는 원래 저 버튼으로 한영 전환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별 감흥 없지만, 조금 더 한국 사용자의 편의를 챙겼다는 점에서 바라보기로 한다.
마지막 짤은 아이패드 프로보다 더 사치스러운 가죽 슬리브. 뭐랄까. 특별한 날을 위해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 같은 느낌. 손에 닿는 느낌부터 가죽 특유의 향기까지 너무 좋다. 스마트 키보드까지 결합한 상태에서 거치해도 (약간 끼지만)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건 맨날 온 세상을 함부로 굴러다니던 애플펜슬에게 몸 둘 곳이 생겼다는 사실. 가죽 슬리브의 가격은 16만 9,000원, 스마트 키보드는 19만 9,000원. 아, 물론 비쌉니다. 네, 비싸요. 아시잖아요?
오늘 리뷰는 여기까지. 이 글을 다 읽은 분들이라면 아이패드 프로 사러 갈 시간. 같이 망합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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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