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시간이 날 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망가진 세계에서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책 5권을 골랐다. 나를 돌아봐라, 타인을 관찰해라, 기술의 힘을 빌려라, 소설을 읽어라, 다 관두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라… 마음에 드는 것부터 하나씩 골라잡아 보자.
[1]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역시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7년쯤 전이었나. 이직한 회사의 매니저에게, 요즘 맡은 일이 이래저래 쉽지 않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은 뒤였다. 뜻밖에 칭찬이 돌아왔다. “명균님은 메타인지를 정말 잘하시네요.” 메타인지? 내가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처음엔 그게 뭐 어렵나 싶었지만 이내 남들은 어려워하는구나 하고 우쭐해졌다. 그후로 메타인지를 계속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건 중요하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아야 좋아하는 걸 더 하고 싫어하는 걸 덜 할 수 있다. 내가 뭘 못하고 뭘 잘하는지 알아야 못할 때 덜 자책하고 잘할 때 더 신날 수 있다. 하지만 뭐든지 ‘적당히’가 중요하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에만 집착하면 남을 들여다보는 일에 게을러진다. 지금의 나처럼.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누가 물으면 ‘나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라고 답하곤 했다. 징그럽다. 그만 좀 돌아보자 쫌.
이젠 남을 좀 들여다보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른다. 어떻게 남을 보지? 관심이 없는데?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도입부에 나오는 미더운 문장들을 지팡이 삼아 하나씩 배워보자. “관찰하면 관심이 생긴다. 관심이 생기면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내가 존재하는 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고 싶다.”
저자는 들여다보기에 그치지 않고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남긴다.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면 대상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린다. 몰랐는데, 그림이란 것이 참 훌륭한 거구나. 글은 어떤가. 글을 쓰면 대상을 더 잘 볼 수 있나? 글도 글 나름일 텐데, 내가 써온 글은 대부분 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끝나는 ‘기-승-전-나’의 반복이었다. 괜찮다. 지금부터라도 “글을 쓰면 대상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에”의 정신으로 글을 쓰면 된다.
-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 이다 | 반비 | 1만 9,500원
[2]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우리가 스스로의 변화를 관찰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물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일 테다.”
쉼과 휴식에 관심이 많다. 쉼과 휴식은 어려워졌다. 그 일이 얼마나 가치 있냐, 당장 생계가 얼마나 급한가와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하던 일을 멈출 수 없다.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야 겨우 쉴 수 있으려나. 아니, 이제 사람들은 물 속에서도 핸드폰을 워터프루프 케이스 안에 넣어 들고 들어간다. 내가 봤다. 절반 이상이 물 속에서 스마트폰을 하더라. 나는 스마트폰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물에 안 들어갔다. 못 쉬는 건 똑같다.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뛰어들 기세였지만 저자도 쉴 줄 모른다. 인트로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 중증이네.”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쉬던 중에 ‘그냥 쉬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썼단다. 쉼에도 의미가 필요한 사람, 휴식에도 결과물이 필요한 사람. 몇 년 전, 입사 3년 차 직원에게 주어진 한 달간의 ‘안식월’을 앞두고 “이번 휴가는 안식월이 아니라 도약월로 삼겠다”라고 다짐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뭐 대단한 도약을 할 것도 아니면서, 우린 그렇게 마음이 급하다.
다행히 저자의 글은 빡빡하지 않다. 나른하다. 물론 나른해 보이는 글을 쓰려면 편집을 열심히 해야 한다. 혼자 있을 때건, 가족과 있을 때건 그는 자주 ‘불안’에 대해 얘기한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하는 그를 보며 가족들은 안쓰러워한다. 기르는 식물에 대해 얘기할 때만큼은 불안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인가. 나도 나를 좀 잊어야 한다. 남이 쓴 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항상 나를 생각한다. 나도 중증이다.
책을 읽으면서, 좀 쉬고 싶어졌다. 쉰다고 가만히 누워 있진 못하겠지만,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쓰고 싶어졌다. 저자의 엄마가 그랬단다. “옛날에 넌 참 행복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안 행복해 보인단 소리다. 나도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 또 나를 생각하네. 내 생각은 관두고, 나처럼 바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 조니 선 | 비채 | 1만 7,500원
[3]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세상이 망해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미스터리는 계속되는구나!”
제목은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이다. 부제는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다. 표지 우측에는 세로로 문장이 하나 더 적혀 있다. ‘무너진 세상을 상상으로 구할 수 있을까.’ 펼치기도 전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뭔가 심하게 망가지고 무너졌고, 결국 파국이 왔다. 상상력이 압축된 SF소설을 통해 탈출구를 모색해보자. 비장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 번도 비장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저자는 국내외 작가들의 SF 소설 중 열여덟 편을 골라 근사한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한다. 세계가 망가지든 세상이 무너지든 그건 잘 모르겠고, 일단 읽고 싶은 SF 소설 리스트가 또 하나 생겨 기쁘다.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은 <쌀과 소금의 시대>다. 흑사병이 돌았을 때 유럽 인구 3분의 1이 아니라 모두가 죽었다면, 그래서 ‘서구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를 그린 ‘대체역사물’이다. 두 권짜리 두꺼운 책의 분량이 부담스럽기보다 든든하다. 그다음 끌리는 책은 <크로스토크>와 <백년법>이다.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면 우린 과연 행복할까? 저자의 말대로라면 행복은커녕 그곳 역시 ‘망가진 세계’가 될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비교하며 다시 한 번 묻는다. 무엇이 세계를 망가뜨리는가. 조지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릴 망가뜨린다고 봤고, 올더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릴 망가뜨린다고 봤다. 누구 말에 동의하는가. 나는 올더스 헉슬리의 손을 들겠다. 내 고요한 세계를 흔드는 쇼츠와 릴스를 떠올리며.
-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강양구 | 북트리거 | 1만 7,800원
[4]
<세이프 시티>
“기억이 흐르는 방식이야말로 한 인간이 존재하는 특정한 방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2025년의 나는 이제 아이폰과 맥북과 챗GPT와 기타 등등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이라는 것에 고맙기는커녕 점점 정이 떨어진다. 지금의 인류는 이렇게 기억되지 않을까. ‘너무 많은 편리함을 원한 나머지 불편해져버린 사람들.’ SF 소설 <세이프 시티>에도 2개의 기술이 등장하고, 그 결과 사람들은 너무 많은 안전함을 원한 나머지 위험해져버린다.
첫 번째 기술 ‘세이프 시티’는 도시 곳곳의 위험 수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표시해주는 지도 앱이다. 매우 안전한 구역은 1단계로 표시되고 숫자가 높아질수록 폐건물이나 부랑자의 수가 많다는 뜻이다. 5단계를 넘어선 구역은 숫자 대신 X로 표시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지역을 ‘X구역’이라 부른다. 그리고 X구역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실적 좋은 경찰이었지만 한 번의 실수를 피하지 못한 ‘그녀’는 원치 않는 휴직을 하게 된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X구역을 서성이던 그녀와, 그녀를 걱정하며 따라 나온 남편. 어느 폐건물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맞닥뜨린 두 사람은 불운한 일에 휘말리고, 지우고 싶은 기억을 하나 갖게 된다.
두 번째 기술은 어느 한순간의 기억만 골라 지우는 ‘기억 교정술’이다. 그녀처럼 끔찍한 기억을 갖게 된 피해자의 기억을 지우는 데 쓰일 수 있다. 아니면 죄 지은 사람을 처벌 및 교화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이 기술은 분명 인간의 고통을 줄여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묻는다. 고통을 완전히 제거한 삶은 삶인가. 위험을 완전히 제거한 도시는 도시인가.
- <세이프 시티> | 손보미 | 창비 | 1만 7,000원
[5]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묻는다.”
며칠 전 출간되자마자 산 책이 있다. 10년간 퍼블리를 이끈 박소령 대표가 쓴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다. 퍼블리는 나의 전 직장이다. 당연히 내가 퍼블리에 다니던 시기도 책에 담겼다. 예전부터 소령님이 인스타그램에 쓰는 글을 좋아했다. 책, 드라마, 영화, 팟캐스트, 스포츠 경기까지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낸다. 자신의 지난 10년에서도 수많은 의미를 발견해 책에 담았을 것이다. 아, 아직 읽진 못했다. 디에디트 마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마감을 위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다. 택배기사, 물류센터, 옷가게, 자전거 가게까지 여러 일터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성장 스토리도 아니고, 까놓고 말해 ‘고된 일자리를 전전한 기록’에 불과한데 계속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 반향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데, 수긍이 간다.
사두고 훑어보기만 한 <실패를 통과하는 일>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단 두께가 비슷하고, 수식어를 최소화해 건조하게 써내려간 문체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회고하는 얘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패>가 화이트칼라 창업자 버전이라면 <북경>은 블루칼라 노동자 버전이다. 두 책 모두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걸 보면, 사람들이 의외로 ‘솔직담백한 회고’를 좋아하는구나 싶다.
소령님은 회고를 중시하는 리더였다. 연말이면 하루 날 잡고 팀원 전원이 한 해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나도 지난 일을 회고하는 버릇이 생겼다. 회고에서 그치지 말고 글로 남기는 버릇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마감을 끝내고, <실패>까지 읽고 나면 내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글도 써보고 싶다. 제목은 <위기를 통과하는 일> 정도로 붙여두고.
-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 후안옌 | 윌북 | 1만 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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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