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시계에 대한 글을 쓰는 객원 에디터 지우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계는 애플워치다. 스마트워치 하나만 있으면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는 건 물론 운동 기록까지 측정할 수 있으니 많이 팔린 만도 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시계를 찾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스마트 워치가 대체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브랜드마다의 감성과 브랜드 스토리, 개성 있는 디자인 등, 이건 애플워치가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 아닐까.
예전부터 좋은 시계를 하나쯤 사고 싶었지만, 30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눈독 들이게 됐다. 20대에는 좋은 제품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인 뒤에야 나만의 시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계 하나 장만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내가 소개할 시계는 세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한국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 한 달 치 월급(약 300만 원)을 넘지 않을 것, 독자적인 디자인을 갖추고 있을 것. 특히 가격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올해 2월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직장인의 월평균 소득은 363만 원이라고 한다. 만약 단 하나의 시계만 구입해야 한다면, 한 달 월급 안에서 살 수 있거나 돈을 조금 모아서 살 수 있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기준을 300만 원으로 잡았다. 남성 시계에 초점을 맞췄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착용할 수 있는 시계도 있다. 단, 시계는 취향의 영역이라 나의 주관이 많이 섞여있으니 참고해주시길.
1. 해밀턴 카키 필드 머피

적당한 가격대에 세련된 디자인까지 갖춘 해밀턴은 입문용으로 좋은 브랜드다. 해밀턴을 대표하는 시계를 단 하나만 뽑는다면, 단연 ‘카키 필드 머피'(이하 머피). 이 시계는 영화에 정말 자주 등장하는 시계이기도 한데, 미국에서 탄생한 브랜드답게 일찍부터 할리우드와 활발하게 교류해왔기 때문이다. 1932년 영화 <상하이 익스프레스>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무려 500편이 넘는 영화에 등장했다.

해밀턴은 2014년에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공상과학(SF) 영화 <인터스텔라>를 위해 특별한 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주인공 쿠퍼가 그의 딸 머피에게 선물하는 시계가 바로 그것.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아이템이자,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메시지도 담은 상징적인 시계였다. 영화가 개봉한 뒤 팬들은 해밀턴에 영화 속 시계를 출시해달라 끊임없이 요청했고, 5년 뒤 지름 42mm 크기의 카키 필드 머피가 등장한다. 검은색 다이얼에 베이지 컬러 인덱스와 핸즈, 검정색 가죽 스트랩을 매치한 머피는 영화 속 시계를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었다.
머피는 출시되자마자 해밀턴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고, 기대에 부응하듯 컬렉션을 확장했다. 이제 머피는 지름 38mm 버전은 물론 화이트 다이얼과 브레이슬릿 모델 등 다양한 스타일로 만나볼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시계는 지름 38mm의 검은색 다이얼, 브레이슬릿을 매치한 버전이다. 지름 42mm 버전과 같은 비율을 공유하면서도 크기가 작아진 덕분에 손목이 가는 남성과 여성까지도 무난하게 착용할 수 있다. 매끈한 블랙 컬러 다이얼 위에 베이지색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가 더해진 클래식한 모습은 영화 속 시계를 충실하게 구현하면서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뱀의 머리를 닮은 커시드럴 시침과 주사기 모양 분침은 다이얼 위에서 은은하게 흘러간다.

스트랩을 매치한 버전도 우아하지만, 브레이슬릿을 더하면 시계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진다. 드레시한 룩은 물론 캐주얼한 룩에도 잘 어우러진다. 정장을 입어야할 중요한 자리는 물론, 반팔티와 청바지를 입은 룩에도 잘 어울린다. 시스루 케이스백을 통해 해밀턴의 오토매틱 무브먼트 H-10의 움직임을 감상할 수 있다. 80시간 파워 리저브를 제공해 금요일 퇴근 후 시계를 풀어놓고, 월요일 아침 다시 착용해도 거뜬하다. 154만 원.
1. 세이코 SPB453

합리적인 가격대에 좋은 성능을 갖춘 시계 브랜드를 언급할 때면 세이코를 빼놓을 수 없다. 세이코는 쿼츠 무브먼트로 유명하지만 기계식 시계에서도 높은 명성을 쌓아왔다. 지금 소개하는 세이코 SPB453은 1960년대에 등장한 세이코 최초의 다이버 워치인 62MAS에서 영감을 받은 툴 다이버 워치. 300m라는 높은 방수 성능을 갖췄고, 디자인이 깔끔해 데일리 워치로도 손색이 없다.
오리지널 62MAS 모델은 얇은 단방향 회전 베젤과 깔끔한 블랙 컬러 다이얼, 날카로운 바 인덱스가 돋보인 제품.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으로 이후 수십 년간 세이코 다이버 워치의 기준점이 되기도 했다. 2020년 세이코는 오리지널 워치의 감성을 살려 1세대 62MAS 복각 시계인 ‘SPB143’을 선보였고, 지난해엔 2세대 복각 시계인 SPB453을 공개했다. 케이스는 지름 40mm, 두께 13mm로 손목에 올렸을 때 약간은 두툼하게 느껴진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뀐 단방향 회전 베젤에는 알루미늄 인서트가 탑재됐고, 다이빙 스케일은 레이저로 정교하게 각인됐다. 스크류 다운 크라운은 케이스 안으로 살짝 들어간 형태다. 4시와 5시 사이에 배치된 날짜창은 배경색도 검정색으로 맞춰 다이얼과 조화를 이룬다. 직선적인 바 인덱스는 오리지널 워치보다 부드러워졌다. 케이스백은 솔리드 타입으로 단단히 닫혀 있으며, 그 위에는 세이코의 상징인 웨이브 엠블럼을 장식했다. 내부에는 72시간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오토매틱 칼리버 6R55를 담았다. 세이코는 3연 브레이슬릿도 새롭게 디자인했다. 러그와 링크가 전작에 비해 짧아져 보다 편안한 착용감을 보장한다. 222만 원.
3. 오리스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트

오리스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브랜드는 아니다. 스와치그룹이나 LVMH, 리치몬트그룹으로 대표되는 거대 시계 그룹에 속한 브랜드도 아니다. 하지만 1904년부터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오직 기계식 시계만 생산해 온 뚝심 있는 독립 브랜드다.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계식 시계를 제작한다는 브랜드 비전처럼, 컬러감이 돋보이는 위트 있는 시계를 주로 선보인다.

빅 크라운 포인터 데이트는 193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조종사가 쉽게 읽고 조작할 수 있도록 큼직한 다이얼을 갖췄고,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도 조작할 수 있도록 특대형 크라운을 탑재했다.
오리스는 오리지널 워치의 감성을 갖추면서도 보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컬렉션을 꾸준히 재편했다. 지름 40mm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로 만들어진 신제품은 다이얼 위에 돔형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가 올라가 있어 ,각도에 따라 다이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다. 글라스에는 무반사 코팅이 더해져 가독성도 좋은 편. 실제 손목 위에 올렸을 때 시계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고 남성은 물론 약간 큼직한 시계를 원하는 여성도 부담 없이 착용할 수 있다.

반짝이는 잉키 블루 컬러 다이얼은 초록색처럼 보이기도, 짙은 남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컬러감을 자랑한다. 언뜻 무난하게 보이면서도 독특한 다이얼 컬러 덕분에 시계를 다양한 스타일의 옷과 매치하기도 편하다. 다이얼에는 큼직한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와 레트로한 미니트 트랙이 올라갔다. 미니트 트랙 바깥쪽에는 1부터 31까지 날짜가 새겨져 있는데, 붉은색 팁을 갖춘 핸드가 매일 밤 12시가 지나면 움직이며 날짜를 알려준다. 커시드럴 시침과 주사기 모양 분침도 시계와 빈티지하게 어우러진다. 브레이슬릿 버전으로도 구입할 수 있지만, 갈색 레더 스트랩은 시계의 고전적인 인상을 완성한다.
시스루 케이스백을 통해 오토매틱 무브먼트 오리스 754의 움직임을 감상할 수 있다. 스위스의 무브먼트 제조기업인 셀리타의 SW200-1을 기반으로 한다. 로터에는 오리스의 시그니처인 붉은색 장식이 칠해져 있는데, 범용 무브먼트를 사용하면서도 품질 체크를 완료했음을 의미한다. 255만 원.
4. 티쏘 PR516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티쏘는 무려 1853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브랜드다. 오랜 시간 시계를 만들어온 만큼 다양한 노하우를 쌓아 합리적인 가격대에 질 좋은 시계를 선보이고 있다. 최근 티쏘는 브랜드 역사상 중요했던 모델을 복각하는 데 열정적이다. PR516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티쏘를 대표하는 크로노그래프 워치다.
영화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손목을 장식한 시계로는 롤렉스 서브마리너와 오메가 씨마스터 컬렉션이 유명하다. 그런데 티쏘 PR516도 한때 제임스 본드 시계였다. 1973년에 개봉한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에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로저 무어는 스피드 보트 추격 장면에서 정장 아래에 PR516을 착용하고 멋지게 등장한다. 로저 무어의 개인 시계라는 설도 있지만, 당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제임스 본드의 손목에 올릴 정도로 PR516 시리즈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계였던 셈이다.

지난해 티쏘는 1970년대 스타일을 그대로 담은 복각 시계를 선보였고 올해는 스포티한 화이트와 블루 컬러로 컬렉션을 구성했다. 시계는 지름 41mm로 여성에게 조금 클 수 있지만 남성에게 잘 어우러지는 사이즈다. 가운데가 뭉툭하고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테이퍼드 케이스는 제임스 본드가 착용한 PR516을 떠오르게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베젤에는 시원한 블루 컬러 미네랄 글라스 인서트를 적용했다. 다이얼과 인덱스, 핸즈 모두 화이트 컬러로 꾸려 통일감을 줬고 3시와 6시, 9시 방향에 올라간 카운터 테두리만 블루 컬러를 적용해 포인트를 줬다. 여기에 5연 브레이슬릿까지 장착해 빈티지한 분위기를 더한다. 100m 방수 성능을 갖춰 일상에서 착용하기도 좋다.
시스루 케이스백을 통해 오토매틱 무브먼트 A05.231을 감상할 수 있다. 스위스의 유명 무브먼트 제조사 밸주가 제작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인 밸주 7750을 티쏘에 맞춰 수정한 것이다. 항자성 성능을 갖춘 니바크론 밸런스 스프링과 68시간 파워 리저브를 갖췄다. 272만 원.
5. 태그호이어 포뮬러 1 솔라그래프

사실 이번 원고를 작성하며 쿼츠 시계는 최대한 소개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포뮬러 1 솔라그래프는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해 출시된 시계 중 가장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면서도 풍부한 헤리티지를 갖췄고, 심지어 가격대도 적당하다.
태그호이어게 올해는 중요한 해다. 태그호이어는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1969년 포뮬러 1 머신에 브랜드 로고를 더한 최초의 시계 브랜드였고, 1971년에는 포뮬러 1 팀을 직접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다만, 오랜 기간 포뮬러 1의 공식 타임키퍼 자리는 롤렉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레이싱 스포츠에서 공식 타임키퍼는 단순한 계측을 넘어 브랜드의 정밀도와 신뢰도, 상징성까지 보여주는 자리다. 태그호이어 입장에서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위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3월, 태그호이어는 포뮬러 1의 공식 타임키퍼 자리에 새롭게 올라섰다.

태그호이어는 포뮬러 1 솔라그래프로 공식 타임키퍼 등극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올해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 선보인 포뮬러 1 솔라그래프는 1986년에 등장한 포뮬러 1 오리지널 워치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모습이다. 오리지널 워치는 레드, 그린, 블루 등 대담한 컬러와 플라스틱 베젤이라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 시계였다. 신제품도 볼드한 컬러감을 그대로 가져왔다. 케이스 크기는 지름 38mm로 지름 35mm였던 오리지널 시계보다 살짝 커졌고, 베젤은 TH-폴리라이트로 만들었다. 재생섬유를 기반으로 만든 신소재로 가볍고 단단하면서도 깨질 위험이 적다. 마치 톱니바퀴를 연상시키는 12각면 베젤 디자인 역시 오리지널 워치를 닮았다.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는 샌드 블라스트 마감해 베젤과 깔끔하게 어우러진다.

화이트 컬러 인덱스를 감싸는 붉은색 링은 오리지널 워치를 떠오르게 한다. 인덱스와 핸즈, 3시 방향에 위치한 날짜창 테두리에는 검은색 라인을 더해 시계에 키치한 느낌을 더한다. 시계는 하이 퍼포먼스 솔라 쿼츠 TH50-00으로 구동한다. 자연광뿐 아니라 실내 인공광 아래에서도 솔라 파워 배터리가 충전된다. 40시간 미만의 빛 노출만으로도 최대 10개월간 작동이 가능하며, 직사광선에 단 2분만 노출해도 하루 동안 구동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277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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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우
IT 기자를 거쳐 시계 전문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여행처럼 흥미로운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