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에디터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시간이 날 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필사하기 좋은 책 5권을 골랐다.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뽑아낸 필사책 한 권, 아름다운 표현이 많다는 온다 리쿠의 소설 한 권, 여전히 아날로그의 힘을 믿는 붓글씨 장인을 그린 소설 한 권, 명언이 좋아 모으다 보니 어느새 수천 개가 쌓인 사람의 에세이 한 권, 19세기의 문장가가 쓴 통쾌한 에세이 한 권.
[1]
<필사는 도끼다>
“여러분이 외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친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읽을 책이 이렇게 많은데 필사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딨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필사 반대파였다. 필사를 하면 글솜씨가 좋아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의아했다. 남이 쓴 멋진 글을 베껴 적는다고 자동으로 내 글이 멋져지나? 글쓰기를 잘하고 싶으면 좀 서툴러도 내 생각을 더듬더듬 적어 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 필사가 워낙 핫하다 보니 이번 마감의 주제가 ‘필사하기 좋은 책’으로 정해졌다. 주제에 맞춰 한 권 정도는 대놓고 필사책을 포함시켜야지.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종류의 필사책 중 <필사는 도끼다>를 택했다. ‘필사는 OO에 좋다’고 설득하지 않고 ‘필사는 도끼다’라고 선언해버리는 단호함에 끌렸다. 인상 깊게 읽었던 인터뷰 콘텐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내용을 발췌했다는 점도 플러스였다. 다른 네 권은 몰라도 이 책만큼은 한번 필사해봐야지.
그래서 해봤다. 192쪽을 펼쳐 가수 이적의 말을 옮겨 적었다. “남의 평가와 내 평가 사이에서 갈등할 때는 ‘나만의 룰’을 따랐어요. 정신 승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만의 페이스로, 자기만의 플레이를 하는 거죠.” 느릿느릿 적다 보니 물음표들이 샘솟았다. 내가 정신 승리를 좀 잘하긴 하지… 근데 난 너무 내 룰만 따르는 거 아닌가? 자기만의 페이스도 좋지만 가끔은 페이스메이커에 기대고 싶다…!
빠르게 답을 찾는 행위, 그 반대편에 필사가 있다. 태생이 느려터진 필사는 글을 옮겨적는 동안 헤맬 시간을 벌어준다. 저자 생각도 비슷한지, 챕터가 끝날 때마다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남이 한 멋진 말들 사이에 서툰 내 생각을 들이밀어본다. 마음이 바빠질 때, 책을 펼쳐 한 장씩 옮겨 적어보면 마음이 다시 느릿느릿 한가해질 것 같다.
- <필사는 도끼다> | 김지수 | 다산북스 872 | 2만 2,000원
[2]
<먹의 흔들림>
“편지 대필이 무슨 상담 같은 느낌이네요.”
이번 달에 소개할 책 후보 리스트에는 <AI블루>라는 책도 있었다. ‘기술에 휩쓸린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들’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내 취향을 맘대로 결정해 버리는 온갖 알고리즘과 “AI 시대에 사라질 직업 1위는?” 같은 기사 제목들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날이면, 챗GPT를 붙잡고 시비를 건다. 야, 니가 요약을 그렇게 잘해? 니가 글을 쓴다고? (그럼 난 뭐 먹고 살라고) 나는 ‘넌 괜찮을 거야’ 같은 말을 듣고 싶었나 보다.
<먹의 흔들림>도 그렇게 집어든 책이다. <배를 엮다>에서 사전 만드는 사람들을 그렸던 미우라 시온은 다시 한번 시대를 역행한다. 이번엔 붓글씨. 호텔 지배인 지카는 VIP 초대장에 쓸 붓글씨를 의뢰하기 위해 서예가 도다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지카는 우연히 도다의 ‘편지 대필’을 돕게 된다.
서예가가 웬 대필? 도다는 붓글씨 장인답게 의뢰인의 글씨체를 똑같이 따라하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편지 내용에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지카가 필요하다. 주위 지인들로부터 ‘넌 왠지 만만해서 말을 걸고 싶어져’라는 평가를 받곤 했던 지카는, 발신인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수신인이 듣고 싶은 방식으로 전달해낸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서예교실 수강생 미키와 친구 쓰치야의 이야기다. 미키는 왕따를 당할 때 힘이 되어줬던 친구 쓰치야에게 느낀 고마움을 전하려 한다. “쓰치야는 나를 왕따시키던 애들을 항상 ‘불쌍한 녀석들’이라고 불렀어요. (…) 선생님도 그래. 걔네한테 왜 미키를 괴롭히냐고 물어보면 어떡하냐? 너한테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 애들한테 마음속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남을 자꾸 괴롭히는지 물어보고 생각하게 해야지.” AI가 왕따 문제에 이런 답을 내놓을 수 있겠어? 내 어깨가 괜히 으쓱해졌다.
- <먹의 흔들림> | 미우라 시온 | 하빌리스 1005 | 1만 7,000원
[3]
<스프링>
“천국도 지옥도 단어만 다를 뿐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10대 때는 가요, 20대 때는 영화, 30대가 되어서는 소설. 강박적으로 듣고 보고 읽고 있다. 창작과 예술에 대한 희미한 동경을 하나씩 구체화시키는 과정인데, 손댈 엄두가 안 나는 장르도 많다. 예를 들면 클래식, 연극, 발레 같은 것들. 관심은 있는데 딱 거기까지다. 딱 거기에서, 온다 리쿠를 만났다.
온다 리쿠.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다. 최근 출간된 <스프링>을 구경하다가 그의 작품 세 편이 ‘예술 3부작’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클래식을 다룬 <꿀벌과 천둥>, 연극을 다룬 <초콜릿 코스모스>, 그리고 발레를 다룬 <스프링>까지. 마음에 들면 나머지 두 권까지 읽을 작정으로 <스프링>을 읽기 시작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스프링>의 주인공은 천재 발레리노 ‘요로즈 할’이다. 할은 무용가로서 뛰어날 뿐 아니라 춤을 창작하는 안무가로도 두각을 드러낸다. 1부는 동료 무용수 후카츠, 2부는 삼촌 미노루, 3부는 작곡가 나나세의 시선으로 할의 탁월함을 ‘증언’한다.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 요로즈 할 본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무리 고고한 예술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 할의 안과 밖, 빛과 어둠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구성이 소설의 해상도를 높인다.
가요, 영화, 소설을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으로서 필사하고 싶은 문장은 이거였다. “연기자나 음악가,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 관객을 대신해 살아주고 있어. 모두가 무대 위에서 다시 사는 자신을 봐. 무대 위의 예술가와 함께 인생을 다시 사는 거야.” 먹고살기도 바쁜 시대에 우리는 왜 예술을 사랑하는가, 에 대한 답이다.
- <스프링> | 온다 리쿠 | 클레이하우스 810 | 1만 9,800원
[4]
<아무튼, 명언>
“이 책은 이런 경험 속에서 오랫동안 모아온 수많은 문장들에서 시작한 글이다.”
에세이는 캐릭터가 중요하다. 그래야 읽기도 전에 손이 가고, 한두 페이지 읽고 나서 서너 페이지를 더 읽게 된다. 캐릭터가 없으면 대단한 문장력에 기대야 한다. 혹은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길 바라야 한다. 안타깝지만 대단한 문장력을 가진 저자도, 대단한 인내심을 가진 독자도 드물다. 그래서 캐릭터가 중요하다. 유명인의 에세이가 많이 팔리는 이유도 저자의 캐릭터를 독자가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말을 모두 잊고 다시 써보겠다. 에세이는 캐릭터에 잡아먹히면 안 된다. 캐릭터에 잡아먹힌 에세이를 읽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 당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당신을 더 느끼고 싶었는데. 캐릭터에 가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경우다. 사람은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총천연색 인간을 온전히 담아내기에 캐릭터는 때론 너무 작고 때론 너무 크다. 그래서 유명인의 에세이는 독자들을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글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튼 시리즈’는 매우 효과적인 에세이다. 제목부터 캐릭터를 잡고 시작하니까. 캐릭터에 잡아먹힐 위험도 별로 없다. 한 주제로 책 한 권을 써낼 만큼 저자가 좋아하는 것이 곧 캐릭터니까. 그 매력에 끌려 나도 아무튼 시리즈를 여러 권 읽었고, 디에디트에서도 이미 몇 권 추천했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 작가가 선택한 캐릭터는 ‘명언’이다.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는 컨셉에 딱 맞는 주제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저자는 ‘명언’을 캐릭터 삼으면서도 ‘하지현’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드러낸다. 덕분에 좋은 저자이자 좋은 어른을 한 명 더 발견했다. 그의 전작 <어른을 키우는 어른을 위한 심리학>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 <아무튼, 명언> | 하지현 | 위고 894 | 1만 2,000원
[5]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고상함을 가장하는 태도가 많은 곳에 반드시 두 배로 많은 상스러움이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처럼 쓰지 못한다.” 강렬한 추천사다. 동시에 그가 ‘옛날’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778년에 태어난 윌리엄 해즐릿은 19세기에 주로 활동했다. 영어권에서는 조지 오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가장 위대한 문장가’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작년 여름 그의 에세이 몇 편을 묶은 전작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가 처음 출간됐다. 먼저 읽은 독자들은 그가 쏟아내는 ‘독설의 달콤함에 관하여’ 감탄했다. 몇 달 만에 나온 후속작이 궁금해졌다.
표제작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를 비롯해 제목만 봐도 읽고 싶어지는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공의 조건에 관하여.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그런데 정작 읽으면서 밑줄을 가장 많이 친 글은 ‘패션에 관하여’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전개다.
이 글이 좋았던 이유는, 저자가 패션에 관하여 늘어놓는 달콤한 독설들이 통쾌했기 때문이다. “패션은 특이성과 보편화를 가장 싫어하지만 언제나 특이성으로 시작해서 보편화로 끝난다. 취향과 맵시와 세련미의 어떤 기준을 세웠다가 부인하는 일을 쉼없이 되풀이한다. (…) 패션은 언제는 새로워서 우스꽝스러웠고 내일은 흔히 볼 수 있게 되어서 지겨워질 것이다.”
패션의 자리에 ‘트렌드’나 ‘유행’을 넣어도 말이 된다. 콘텐츠 일을 해온 10년 내내 ‘트렌드’라는 단어에 치여 살았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일은 언제나 버겁고 목적을 알 수 없었다. 200년의 세월을 건너온 해즐릿 뒤에 숨어 나는 비로소 따져 묻는다. “트렌드 니가 뭔데? 너 뭐 돼?”
-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윌리엄 해즐릿 | 아티초크 782 | 1만 6,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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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