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미식 에디터 이주연이다. 봄나물이 초겨울부터 마트에 깔리는 판에 제철 음식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인지 의구심이 들지 모른다. 그렇다고 제철 음식이라는 개념을 아예 내려놓을 순 없다. 기술 발달로 좋아하는 식재료가 사시사철 난다고 철없이 먹다간 계절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의 차원이 아니다. 지구의 계절 감각까지 잃을지 모른다.
제철 음식의 지형도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지구온난화다. 기온이 오르며 식재료가 나는 장소가 뒤바뀌고, 시기가 점점 빨라졌다. 거기에 냉방이나 난방 시설을 갖춘 하우스가 등장하며 식재료가 등장하는 시점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문제는 전기를 끌어와 냉난방하는 ‘가온(加溫) 재배’가 지구온난화를 더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계절 감각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소비자가 생산자를, 생산자가 지구를 바꿀 수 있다.
3-4월
쑥, 냉이, 미더덕, 죽순
봄은 미식가에게 롤러코스터 같은 계절이다. 깜빡 정신을 놓으면 전율과 환희의 순간을 놓치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기후가 가장 크게 바뀐다. 봄의 어원 중 ‘새로 보다’가 있다. 봄에 자연의 변화가 가장 크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경이롭게 새로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미식의 차원에서 초봄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찰나에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사라지는 봄나물을 놓칠지 모른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할 때처럼 단단히 긴장해야 한다. 가장 먼저 애쑥이 나온다. 쑥 중에서도 어린잎을 ‘애쑥’이라 부른다.
애쑥 두 봉을 신문지를 깐 식탁에 쏟는다. 오랜 갈증을 해갈하듯 부러 더 과감히 쏟아붓는다. 비닐에 갇혀 있던 쑥 향이 물씬물씬 퍼진다. 괜히 손을 펄럭이며 그 싱그러운 향을 훑고 공기 중에 부풀려 움츠린 향을 깨운다. 쑥 두 봉이면 두 식구 먹기에 많은 양 같지만, 어린잎만 떼어내면 반절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도 많은 것 같지만, 열에 닿는 순간 숨이 죽으니 결국 한 줌이 되고 만다.
끓는 물에 표고, 다시마, 얇게 나박 썬 무를 넣고 끓인다. 된장을 풀고 한소끔 더 끓인다. 쑥 향을 온전히 즐기게끔 마늘은 생략한다. 애쑥은 냄비에 바로 넣지 않는다. 국을 옮겨 담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뜨거운 된장국을 붓는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까지 쑥 향이 지속된다. 또, 괜히 냄비에 바로 부었다가 제때 건지지 않으면, 다음에 다시 끓였을 때 흐물흐물 거무튀튀한 잎이 영 보기 싫다. 나는 향신채를 워낙 좋아하여 쌀국수에 고수 넣듯, 쑥을 보태가며 된장국을 먹는다.
쑥이 쑥쑥 자라면, 시장 좌판이 종으로 횡으로 점점 넓어진다. 쑥 옆에 냉이, 냉이 옆에 달래, 달래 옆에 두릅, 두릅 옆에 유채나물….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가사처럼 간단없이 이어진다. 쑥이 향은 좋으나 씹는 재미가 없다면, 냉이는 향과 식감 모두 겸비했다. 특히 대부분의 봄나물이 한 가지 부위로 이뤄진 반면, 냉이는 잎과 뿌리 두 부위로 구성돼 맛과 식감이 주는 즐거움이 더욱 풍성하다.
냉이는 다듬는 과정이 다소 번거롭긴 하다. 나 또한 장 볼 때는 호기롭게 사놓고 손질할 생각에 괜히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그런데 막상 결심하고 다듬으면 귀찮은 마음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온몸이 설렘으로 출렁인다. 줄기와 뿌리가 이어진 부위에 들러붙은 흙과 뿌리의 잔털을 과도로 살살 긁으면 쌉싸래하고 향긋한 향이 몽실몽실 살아난다. 그 그윽한 향은 냉이를 다듬는 사람만이 맡는다. 노동하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이랄까.
깨끗이 세척한 냉이를 팔팔 끓는 소금물에 잠시 넣었다 꺼낸 후 채반에 받쳐 물기를 날리며 식힌다. 냉이가 마지막 열기를 뱉어낼 즈음 도마로 옮겨 듬성듬성 썬 후 볶아서 간 깨와 가는소금을 뿌리고 손아귀에 힘을 실어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한다. 이때 코를 강타하는 고소하고 향긋한 향에 다리가 풀릴 지경. 깨소금 옷을 입은 냉이가 고소하고 향긋하고 쌉싸래하고 짭짤하더니 씹을수록 뿌리에서 구수한 풍미가 올라오며 맛의 뫼비우스 띠를 이룬다. 무기력한 사람도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그런 강렬한 맛.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생명의 기운’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이맘때 미더덕도 참 맛있다. 멍게나 성게 같은 해산물을 좋아한다면, 미더덕 회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미더덕 회는 단독으로 먹어도 좋지만, 밥에 비벼 먹으면 기막히게 맛있다. 멍게가 조직이 치밀하여 잘게 다지고 꼼꼼히 비벼도 밥알과 따로 노는 느낌이 든다면, 미더덕 회는 살이 훨씬 더 잘 뭉그러져 밥알에 착착 감기며 혼연일체를 이룬다.
미더덕 회가 맛있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본연의 바다 향과 쫀득한 식감, 단맛에도 있지만, 손톱만 한 미더덕을 일일이 까는 어촌 사람들의 노동에도 있다. 미더덕은 마산의 진동면이 가장 큰 생산지다. 요즘은 보관과 유통 기술이 발달하여 까자마자 얼린 미더덕 회를 인터넷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먹어본 사람은 안다. 흔하디흔한 미더덕이 얼마나 요망하게 맛있는지. 미더덕과 같은 시기에 산에서 나는 죽순 넣고 미더덕 죽순 들깨찜을 하면 온몸에 훈기가 감도는 것이 어려운 일도 가뿐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5-6월
감자, 오이, 참외
‘Cool as a cucumber’라는 영어 관용구가 있다. 직역하면 ‘오이처럼 차가운’이지만, 실제론 곤란한 상황에서 냉정함을 유지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음양오행을 모르는 서양에서 오이가 차가운 성질을 가진 음식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실제로 오이는 겉보다 속 온도가 더 낮다. 짙은 색 껍질에 찬 성질을 가두고 있다. 더울 때 오이가 당기고,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오이를 올리는 행위는 본능에 가깝다.
오이는 햇볕을 충분히 쬐어야 잘 자란다. 무더운 여름에 더위를 식혀줄 오이가 잘 자라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여름이면 전국의 밭에서 오이가 나지만, 특히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서 자라는 오이가 맛있기로 이름났다. 배방읍이 특히 오이 재배로 유명한 이유는, 일조량과 수량이 풍부하면서 배수가 잘돼서. 특히 배방은 요즘처럼 지구온난화로 비가림 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작물을 키우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여전히 노지 오이를 재배한다.
필터링 없이 자연에 노출된 채 자란 오이는 확실히 육질이 단단하고 단맛이 강하며 오이 향이 짙다. 물비린내 때문에 오이를 극혐하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을 만큼 단단하고 아삭하고 맛있으며, 잡내나 잡맛 없이 시원하고 향긋하다. 조직이 치밀한 만큼 더 오래 보관할 수도 있다.
‘하지 감자’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게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며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에 캔 감자가 가장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하다. 감자는 크게 분질과 점질로 나뉜다. 점질 감자는 수분 함량이 높아 익혀도 잘 부서지지 않는 대신, 튀기면 수분이 빠져나와 금세 눅눅해진다. 외국에선 주로 수프 재료로 활용하거나 깍뚝썬 것을 데치거나 구워 다른 채소와 함께 버무려 샐러드로 낸다. 한편, 전분 함량이 높은 분질 감자는 익히면 전분 세포가 부풀어 분리되면서 특유의 파근파근한 형태와 식감으로 변한다. 튀겼을 때 식감이 바삭하고 가벼워 튀김용으로 적합하다.
흔히 감자에는 ‘솔라닌’이라는 독이 있어 생으로 먹으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카스텔라 감자’라고 불리는 홍감자에는 솔라닌이 없어 생으로 먹어도 된다고도 한다. 그런데 아워플래닛 장민영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모든 감자는 신선한 상태에서는 솔라닌이 없다고 한다. 보관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감자와 관련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상수동에 위치한 ‘브렛피자’에서 문어 샐러드를 먹었을 때다. 생감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삭한 식감과 저작 과정에서 슬며시 감도는 단맛에 깜짝 놀랐다. 특히 문어의 쫄깃한 식감과 겹치지 않아 다양한 씹는 재미를 선사했다.
진짜 생감자인지 궁금하여 브렛피자 서기원 셰프에게 물으니, 아니라고. “보통 충분히 호화되지 않은 전분은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인식하는데, 사실 별문제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문어 샐러드의 감자는 “중국식 감자채볶음의 식감에서 착안하여 아삭한 감자의 텍스처를 살리기 위해 데침과 삶기 중간 정도로 감자를 익힌 것”이라고 귀띔했다. 감자의 익힘 정도와 그로 인한 새로운 식감을 경험하고 싶다면, 브렛피자에 들러 문어 샐러드를 맛볼 것.
봄부터 마트에서 참외 향이 나면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참외는 원래 여름작물이었다. 오랫동안 참외의 달큰하고 시원한 향은 무더위를 이기는 하나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이제는 지구온난화에, 하우스 재배를 선호하다 보니 거의 모든 작물의 출하 시기가 당겨졌다. 수박 또한 ‘봄수박’이라는 생소한 표현을 앞세우며 대대적인 마케팅을 통해 봄부터 출하한다. 묘목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수박이 가장 많은 영양분을 흡수해 더 달고 향이 진하다고도 한다. 딸기가 여름작물에서 봄작물을 거쳐 겨울작물로 변한 것을 생각하면, 참외와 수박은 그래도 귀여운 수준이라고 하겠다.
7-8월
복숭아, 보리, 밀, 열무
‘밀과 보리가 자라네’라는 동요를 누구보다 열심히 부르면서 밀과 보리가 같은 때 나는 작물임을 몰랐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이처럼 생태 감수성이 떨어진다. 밀과 보리는 벼를 수확한 후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하는 늦가을에 파종한다. 한겨울의 맹렬한 추위를 견딘 후 늦봄에 수확하는 밀과 보리는 찬 성질을 지닌 냉성 작물이다. 메밀도 마찬가지다. 여름에 밀이나 메밀로 만든 국수를, 보리밥을 많이 먹는 데는 식재료 자체의 찬 성질이 열을 식혀주기 때문이다.
여름에 굳이 물을 뜨겁게 끓였다가 식히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보리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도 그것이 몸의 열을 식혀줘서. 여름이면 보리밥 혹은 밀이나 메밀 면에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는 이유도 열무가 찬 성질을 가져 열을 식히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입맛이라는 것이 생존 본능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또 여름은 역시 핵과 과일의 계절이다. 겨울엔 인스타그램이 딸기로 붉게 물들었다면, 여름엔 복숭아색으로 도배된다. 복숭아는 딸기와 달리 대부분 노지에서 자란다. 기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므로 시기에 따라 수확하는 품종이 확확 달라진다. 여기에 복숭아는 잘 무르는 만큼 장기 보관할 수 없어 판매하는 주기가 더 짧다. 잠시 한눈팔면 사라지는 복숭아 중에서도 인기 있는 신품종은 재배하는 농가가 적어 수량이 더 제한된다. 소비자들이 특정 복숭아를 구매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다 보니 ‘복숭아’와 ‘티켓팅’을 합친 ‘복켓팅’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 유행하는 신품종 복숭아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벗기고 버리는 수고로움은 물론,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껍질이 없는 천도 위주이며, 혼자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동시에 써는 등의 번거로움이 없을 정도로 작고 쥐기 편한 형태로 개량되었다. 풍미 측면에서는 신맛보다 단맛을 강조하며, (이것은 복숭아가 아닌 모든 과일이 그렇지만) 망고 맛에 유사한 동시에 SNS에 올렸을 때 이목을 끄는 독특한 형태를 선호한다. 한국판 납작이 복숭아인 대극천, 신비, 그린황도 등이 대표적 예다. 지구온난화로 여름은 점점 더 길고 더워질 것이다. 복숭아는 더울수록 달고 맛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꼭 특정 품종이 아니더라도 더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을 터. 기후변화 시대에 한 가닥 위로라고 할까. 물론 이 속도로 기온이 계속 오른다면 20년 후에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복숭아를 볼 수 없겠지만.
9-10월
대두, 수수, 버섯, 무화과
버섯은 중용을 모른다. 가을이면 송이버섯 한 점 맛보는 게 자신의 처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가 하면, 트러플처럼 이국의 귀한 버섯은 레스토랑에서 큰 대가를 지불해야 겨우 맛볼 수 있다. 그 외 버섯들은 ‘국민 식재료’라 하여 시시하게 여긴다. 그런데 최근 이 양극화된 버섯 시장의 간극을 좁혀줄 이색 버섯들이 등장했다. 꽃송이, 잎새, 노루엉덩이를 닮은 버섯은 별난 생김새만큼 식감이 독특하다. 이들을 통해 식감이 맛을 결정하는 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새삼 깨닫는다.
하얗고 고운 주름을 가진 꽃송이버섯은 아삭하고 사각사각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그대로 향을 맡았을 때는 별다른 향이 감지되지 않지만, 입에 넣고 씹으면 마지막에 새침한 버섯 향이 입안에 남는다. 살짝 데쳐 샐러드나 콜드파스타, 냉우동 등에 올려 먹으면 아삭한 식감과 섬세한 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기특한 건 데쳐도 청순한 색이나 어여쁜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
잎새버섯은 향취가 느타리버섯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훨씬 더 강렬하며, 언뜻 진득한 꽃향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름 없이 센불에 달달 볶거나 기름에 튀겼을 때 특유의 하늘하늘한 식감이 잘 유지되는 동시에 군내가 수그러들고 구수한 향만 남는다. 강한 향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국을 끓일 때 마지막에 소량 넣는 것. 진한 향이 국물에 스며들면서 맛이 한결 근사해진다.
대두나 녹두, 검은콩 등의 콩류는 주로 말려서 유통하기 때문에 제철이 크게 상관없다. 그럼에도 가을에 나는 다양한 잡곡류 중에서도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가 요즘 많이 먹는 렌틸콩이나 병아리콩 못지않게 단백질 함량이 높기 때문이다.
저속노화를 주창하는 이들이 밥을 지을 때 렌틸콩이나 병아리콩 등의 이국의 콩을 넣으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백질과 식이섬유 등의 함량이 높고, 그만큼 탄수화물의 함량이 낮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식품과학연구원에 따르면, 렌틸콩 100g에 단백질 27g, 식이섬유 12g이 함유돼 있는 한편, 대두 100g에는 단백질 40g, 식이섬유 10g이 함유돼 있다고 한다. 칼슘과 칼륨 등의 미네랄 함량도 대두가 더 높다.
검은콩 또한 100g에 단백질 24g이 들어 있으며, 식이섬유는 17g으로 오히려 더 많다. 녹두 역시 병아리콩보다 단백질 함량이 더 높고, 칼슘도 풍부하다. 가까이에 이미 유익한 식재료가 많으니, 굳이 해외에서 탄소 발자국을 찍으며 물 건너온 식재료를 선택할 이유가 없겠다.
언젠가부터 무화과가 한반도의 제철 과일로 등극했다. 우리 문화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무화과를 이토록 기다리고, 다양하게 즐기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무화과는 맛있고, 보관성이 떨어져 1년을 꼬박 기다려야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적어도 우리 땅에서 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망고와 비교했을 때 아무래도 무화과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물론 망고의 일부 수량은 제주도에서 나지만).
무화과 최대 산지인 전남 영암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겨울이 따뜻하며 해풍이 발달한 것이 무화과의 원산지인 지중해와 비슷한 기후를 자랑한다고 한다. 부드러운 과육에 씨 씹는 재미가 있는 무화과는 라운드한 단맛과 신맛이 조화롭다. 과일로서도 매력적이지만, 식재료로서의 효용도 높다. 식재료로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무화과 제철에 서촌에 위치한 타케리아 ‘팔마’의 무화과 케사디아, ‘브렛피자’의 하몽과 무화과 피자, ‘abc옥수’의 피그(fig)를 맛보기를.
11-12월
뿌리채소, 굴, 삼치, 해조류
찬 바람 불면 잎과 열매에 있던 영양이 뿌리로 내려간다. 겨울에 뿌리채소가 많이 나고, 맛있는 이유다. 뿌리채소에는 식물성 올리고당이 많이 들어 있어 장내 유익균의 먹이를 공급해주어 장 건강에 특히 좋다. 그중에서도 구조가 복잡한 이눌린은 소장과 대장의 앞선 부위에서 흡수되지 않고 직장까지 전달되어 직장에 있는 유익균들의 먹이가 되어 준다. 이눌린이 풍부한 뿌리채소로는 우엉, 도라지, 더덕 등이 있다. 채소의 뿌리가 닿기 힘든 장의 뿌리까지 이른다고 생각하니 뿌리채소라는 식재료가 더 귀하고 흥미롭게 여겨진다.
바다는 계절이 늦다. 겨울도 마찬가지다. 고로 11월과 12월은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수온이 점점 내려가며 바다 생물들은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부지런히 몸집을 키운다. 이맘때 살과 기름이 보동보동 오른 바다 생물은 크림보다 부드럽고 버터보다 고소하다. 특히 겨울의 문턱에서는 삼치가 회로 맛보기 좋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많이 표현하지만, 그보다 뭉그러지는 느낌에 더 가깝다. 평소 활어회를 즐겨 먹는 사람에겐 식감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며, 지방이 적어 혀와 뇌를 압도하는 매력은 없으나 그 맛이 담백하여 먹고 돌아서면 또 생각난다. 슴슴한 냉면 같은 생선이라고 할까.
겨울이면 굴 무덤을 만들 각으로 굴을 수북이 쌓아놓고 먹을 만큼 우리나라는 굴이 흔하다. 서해의 갯벌과 남해의 작은 섬에서 굴이 술술 자란다. 흔하니 귀한 줄 모르고 먹고, 그래서 마땅한 조리법도 없다. 그냥 너나없이 초장 찍어 소주랑 먹는다. 굴이 귀한 줄 아는 서양에서는 굴 조리법이 굴 품종만큼 다양하다. 해외에서 굴을 근사하게 즐겨본 사람이 늘며, 근래에는 위스키 바에서 굴을 내는가 하면 아예 오이스터 바도 생겼다.
사람들은 굴에서 정말 다양한 풍미를 찾는다. 우유, 버터, 고기, 견과류, 멜론, 오이, 미네랄에서 금속 맛까지. 이토록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굴은 품종과 지역에 따라 맛이 다르다. 따라서 굴을 구매했다면, 적어도 첫 굴은 아무것도 뿌리지 말고 순수하게 맛보는 것이 좋다. 미끌거리며 술술 넘어간다고 꿀떡 삼키지 말고 입에 넣고 꼭꼭 씹어보자. 그래야 굴의 복합적인 풍미와 내전근, 아가미 등 부위별로 다른 식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오늘 즐길 굴의 맛을 가늠했다면, 다음 순서는 취향에 따라 곁들일 부재료와 술을 고르는 일이다. 세계적으로 굴을 먹는 방법은 수백 가지지만,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바로 산미가 도드라지는 소스 혹은 술을 곁들인다는 점. 새콤한 풍미가 굴의 짠맛과 비린내를 끊어내는 동시에 단맛을 강조해준다. 우리는 굴에 초장을, 일본은 초간장을 뿌리는 배경에도 ‘초’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겨울에 뿌리채소가 있긴 하나, 사시사철 나물을 즐기는 우리 민족으로서 버무리고 무칠 만한 채소가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 이때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바다의 채소, 해조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는 정말 다양한 해조류가 존재하며, 주로 배를 곯은 우리 선조들은 이 해조류를 놓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종류의 해조류를 활용하여 배를 불렸다.
다시마, 미역, 매생이 등의 흔한 해조류도 좋지만, 그 외 발견하지 못한 독특한 식감과 풍미의 해조류가 넘쳐난다. 바다는 지구 면적의 71%를 차지한다. 육지의 식물 이상으로 해조류가 풍부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대황, 검둥감태, 모자반, 곰피, 꼬시래기 등 더 많은 해조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식재료를 알고 맛볼수록 미식의 경험이 넓어지고, 삶이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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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미식 기자 겸 ‘시네밋터블(cinemeetable)’ 운영자. 쓰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쓰는 숙명에 충실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