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숏폼 중독자를 위한 처방전 같은 책 5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5. 03. 11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시간이 날 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이제 뭐든 눈에 띄려면 ‘슥’ 봐도 ‘와’ 하게 만들어야 한다. 포털 메인에 뜨는 뉴스 기사는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마저도 슥 봐도 와 하는 정책으로만 승부한다. 그러니 분명 슥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인데도 다들 슥 보고 욕하거나 슥 보고 환호한다. 슥 보고 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이번 달에는 오래 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저자들의 책을 골랐다.


“무슨 일을 하든 같은 월급을 받는 공무원 입장에서 이 모든 역경을 뚫고 얻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저자 이름은 생소한데 제목이 솔깃하다. 띠지 문구도 자극적이다. “나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10년 동안 일했고, 그 무의미한 일을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공무원을 그만뒀다고? 왜? 부제가 힌트다. ‘한국 공직사회는 왜 그토록 무능해졌는가.’ 공무원 아닌 사람들이 공무원에 대해 갖고 있던 삐딱한 편견을 확신으로 바꿔버리는 한 줄이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얼마나 무능한지 한번 구경해볼까?’

제목, 부제, 띠지 조합이 시너지를 냈는지 포항 내려가는 KTX에서도, 출근길 지하철에도 이 책을 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여간해서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무원 조직 내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조직의 비효율과 거기 적응하며 함께 무능해지는 구성원들을 보며 ‘나는 어땠나’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아쉬움도 있다. 사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공직사회의 문제는 바깥에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높으신 분 의전에 조직의 에너지가 절반 이상 소모되고, 내용보다 형식에 신경 쓴 보고서들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고, 전문성이 쌓일 만하면 직무가 바뀌고… 나는 조금 더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를테면 뻑뻑할 대로 뻑뻑해진 조직을 그래도 돌아가게 만드는 유능한 동료라든지, 민간기업에 비해 조금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공직사회가 갖고 있는 미덕이라든지. 그러니 퇴사로 몸이 가벼워진 저자가 후속편을 빨리 써주면 좋겠다. 물론 “없는데 어떻게 써요?”라고 되물으신다면 할 말 없지만.

  •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 노한동 | 사이드웨이 | 1만 8,000원

“이 게임은 따로 설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의 이름은 ‘현실 온라인’입니다.”

현실 온라인 게임

이야기꾼 김동식 작가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그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주물공장에서 10년을 일했다.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올린 짧은 소설에는 맞춤법을 지적하는 댓글이 몇 개 달렸지만, 추천 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의 이야기는 평소 책을 읽지 않던 사람들까지 끌어당겼다. 등단도 하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 <회색 인간>은 출간 6년 만에 100쇄를 찍었다. 그는 쉬지도 않는다. <현실 온라인 게임>은 그의 18번째 책이다.

현실 온라인 게임, 이세계 과몰입 파티, 내일을 부르는 키스. 이 책에 실린 짧은 소설들의 제목이다. 세 편의 공통점은 현실에서 게임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세계 과몰입 파티’를 가장 재밌게 읽었다. 읽는 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해 스포일러 없이 내용을 요약하자면, 현실을 온라인 게임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니, 착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심정은 첫 소설 ‘현실 온라인 게임’의 대사와도 통한다. “현실의 나는 별 볼 일 없지만, 게임 속 나는 되게 멋있거든.” 등장인물들이 우스꽝스러워 피식피식 웃다가도 어느 대목에 이르면 웃음을 거두고 읽게 된다. 마냥 남 일 같지만은 않아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 미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게임, 스마트폰, 디지털, 인공지능 등의 소재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서늘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 물론 김동식 작가 같은 이야기꾼에게는 넷플릭스의 막대한 제작비가 필요하지 않다. 그가 들려줄 다른 이야기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 <현실 온라인 게임> | 김동식 | 허블 | 1만 5,000원

“마음이 못과 같다면 전대등님의 못엔 흙탕물만 가득해 그림자도 비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설자은, 불꽃을 쫓다

읽지도 않으면서 한 권씩 사 모으는 역사추리소설이 있다. 중세 영국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다.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에 넘어가 버렸다. “소박하고 담백하게 시작해 역사의 큰 톱니바퀴와 힘 있게 맞물려 들어가는 이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 말할 때 한없이 행복하다.” 개정판의 아름다운 표지는 소유욕을 자극한다. 궁금한 분은 첫 작품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을 검색해보시길.

사자마자 읽어버리는 역사추리소설도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수도 금성을 배경으로 하는 ‘설자은 시리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사 모으게 만들었던 추천사의 주인공, 정세랑 작가가 썼다. 대선배에게 보낸 찬사는 본인의 소설에도 적용된다. 스마트폰, CCTV, DNA 감식 없는 시대에 두뇌 하나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 쾌감! 역사추리소설의 매력이다. <설자은, 불꽃을 쫓다>는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유머다. 통일신라의 셜록&왓슨, 설자은과 목인곤은 서로를 아끼는 만큼 디스 또한 아끼지 않는 관계다. 하지만 21세기가 아니다 보니 디스를 하더라도 직설적이지 않고 에둘러 표현하는데, 거기서 오는 우아한 재미가 있다. 자은의 형 호은과 동생 도은, 자꾸 부담스러운 미션을 주는 신라의 왕, 말 못 할 사연으로 얽힌 산아 등의 주변 인물들의 관계성도 흥미롭다.

그렇다고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재미가 모자란 것은 아니다. 작가는 역사교육과 출신답게 통일신라의 실제 사회상을 이야기에 녹여낸다. 이렇게 배웠다면 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을 것이다. 잘 쓰는 사람은 뭘 써도 잘 쓰는구나. 정세랑 작가의 팬이거나, 추리물을 좋아하거나,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재밌는 책을 찾고 있거나. 좋아할 이유가 많은 책이다.

  • <설자은, 불꽃을 쫓다> | 정세랑 | 문학동네 | 1만 6,800원

“읽는 것만으로 주위 사람도, 자기 자신도 조금 더 좋아지게 됩니다.”

좋은 사람 도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못됐어?”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사이 나는 또 얼마나 못돼지고 있는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좋은 사람 도감>을 읽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식당이나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는 좋은 사람의 100가지 유형을 정리한 작고 귀여운 책이다. 대충 그린 듯 리얼한 일러스트와 옆에 붙은 짤막한 주석이 호감도를 높인다. ‘저자 당신들도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가벼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46쪽에서 놀라 멈췄다. 거기 적힌 좋은 사람 유형은 ‘모두가 1차의 흥겨움 속에서 담소를 나눌 때 2차 장소를 물색해주는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2차는 OO로 옮기겠습니다”라고 말해주던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항상 아니었고. 1차의 흥겨움에 취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살짝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그다음 페이지를 읽으며 죄책감을 조금 덜었다. 47쪽에 소개된 유형은 ‘영화관에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팝콘을 먹는 사람’이었다. 저요! 이거 나예요!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날까 봐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팝콘을 하나씩 집고, 입에 놓은 팝콘은 절반 이상 녹여 먹는다. 중요한 순간에 영화 사운드가 작아지면 잠시 팝콘 먹기를 중단했다가 시끄러운 BGM이 나오면 이때다 하고 털어 넣는다. 나의 소심함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라 딱히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는데, ‘좋은 사람’이라 불러주니 어깨가 조금 올라갔다.

이번 독서도 여러모로 좋은 시간이었다. 주변에서 만난 좋은 사람을 떠올리는 흐뭇한 시간. 내가 좋은 사람이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뿌듯한 시간. 난 언제 좋은 사람이었고 언제 그러지 못했나를 돌이켜보며 새삼 나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유익한 시간.

  • <좋은 사람 도감> | 묘엔 스구루 외 2인 | 서교책방 | 1만 6,800원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증명과 변명

읽고 나면 마음이 아픈 책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그 아픈 마음은 결국 나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책을 통해 나의 아픔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기-승-전-자기연민으로 빠지는 내가 싫지만 그냥 받아들인다. 그저 나의 아픔을 바라보게 해준 저자에게 고마울 뿐이다. <증명과 변명>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고 저자에게 고마웠다.

저자는 10년지기 친구 ‘우진’의 10대 후반 이후 생활과 당시 마음상태에 대해 듣는다. 연애-수능-주식 등 80~90년대에 태어난 한국사회 구성원이 겪는 K-타임라인을 지나오면서 우진을 가장 많이 괴롭힌 건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해내야 한다, 못하면 내 탓이다,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해낸 누군가가 있으니까, 나도 할 수 있다. 결국 할 수 없을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낙관은 잔인하다.

“너무 힘들게 살아왔네. 마음이 정말 힘들었겠네.” 읽으면서 중얼거린 말은 우진을 향한 것이었지만,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힘든지도 모른 채 힘든 삶을 살아왔구나. “증명해야 살아남고 실패해도 변명할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정말 고생하고 있구나. 한 발 잘못 디디면 굴러떨어질 외줄 위에 서 있구나.

이 책은 저자가 우진과의 대화를 정리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해석이란 것이 원래 대상을 납작하게, 자기가 짠 틀에 끼워맞추는 식으로 규정하기 쉽다. 거침없이 자신의 논리를 펼수록 그럴듯하고, 솔직히 그게 더 잘 읽힌다. 저자는 자기가 짠 틀에 친구를 끼워맞추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친구의 눈치를 살핀다.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들어가며’와 ‘나가며’ 앞에 ‘망설이며’와 ‘더듬거리며’를 굳이 넣은 이유다. 망설이고 더듬거리는 저자의 태도가 나에겐 참 감동적이었다.

  • <증명과 변명> | 안희제 | 다다서재 | 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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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