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뭐라도 다짐하게 만드는 책 5권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5. 01. 23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최근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디에디트 연재를 시작하고 맞는 네 번째 새해다. 매년 새롭게 다짐하고, 다짐의 대부분은 지키지 못한다. 하지만 매년 다짐하는 덕분에,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매년 읽는 덕분에,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이번 달에 고른 다섯 권을 읽으면서도 새롭게 다짐했다. 그렇게 조금,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켓3은 좀 더 오래 날겠죠?”

레인보우 맨션

나사 출신 과학자들이 캘리포니아에 큰 월셋집을 하나 구한다. 10명 이상이 같이 생활하며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일종의 “연구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서. 이 월셋집이 바로 ’레인보우 맨션’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이곳의 독특한 에너지가 실리콘밸리에서 유명해지고,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로비 싱글러와 윌 마셜은 2010년 민간위성 기업 플래닛랩스까지 만들게 된다.

로켓이나 위성은 원래 엄청 크고 비쌌다. 명색이 지구 밖으로 보낼 물건인데 대충 만들 수 없지, 라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마셜은 반대로 생각했다. 작고 싼 로켓을, 빠르게 많이 만들자. 나사에서 대학생 교육을 위해 레고로 가짜 조립식 위성을 만들면서 힌트를 얻었다. ‘어라, 이것도 꽤 쓸만한데?’ 굳이 비싼 부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젊은 우주 덕후들의 아이디어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책은 플래닛랩스 외에도 3개의 우주 기업을 더 다룬다. 아스트라와 파이어플라이에어로스페이스 챕터를 보면 우주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또 그럼에도 얼마나 시장에서 부풀려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반면 로켓랩을 다룬 두 번째 챕터는 설립자 피터 벡의 존재감으로 기억될 듯하다.

피터 벡은 어릴 때부터 늘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제작비 아끼는 게 습관이 되었다. 문제에 부닥칠 땐 이론서를 펼쳐보고 길을 찾는다. 하지만 가끔은 ‘안 이쁘고 조금 실용적인 것보다는 쓸모없어도 예쁜 게 낫다’는 고집도 품고 있다. 그는 화성 식민지 건설 같은 자극적인 슬로건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우주의 잠재력을 더 끄집어내고 싶다’고 말하는 피터 벡이 궁금하다면 책을 한 번 펼쳐보시기를 권한다.

  • <레인보우 맨션> | 애슐리 반스 | 쌤앤파커스 | 2만 5,000원

“지금부터라도 괜찮다.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걷기 시작하지.”

새왕의 방패

한 댄스강사는 집안 형편 때문에 가출한 학생을 위로한다. “꿈을 포기하지 마.” 학생은 대꾸한다. “선생님도 작가의 꿈을 포기했으면서!” 충격받은 강사는 그날로 일을 그만두고 다짐한다. “서른 넘어 시작해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난 나오키상을 받을 거야.” 그는 4년 후 쓴 소설로 나오키상을 거머쥔다. 그게 바로 이마무라 쇼고의 시대소설 <새왕의 방패>다.

<새왕의 방패>의 주인공은 석축 장인 겐사이와 후계자 교스케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드는 ‘석축’은 떼기, 나르기, 쌓기 세 단계로 나뉜다. 겐사이와 교스케는 쌓기의 달인이다. 돌의 생김새만 보고도 어디에 어떻게 쌓아야 할지 빠르게 파악한다. 석축이나 쌓기나 죄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초반부에 묘사되는 디테일한 성 쌓기 공정은 재밌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흥미롭다.

다큐를 엔터테인먼트로 전환하는 레버는 라이벌 구도다. 교스케가 전쟁을 없애겠다는 목표로 튼튼한 성을 쌓는다면, 그 맞은편에는 역시 같은 목표로 대포를 만드는 겐쿠로가 있다. 태평성대엔 만나려야 만날 수 없던 두 젊은 장인은 권력자들의 패권 다툼이 시작되면서 마침내 격돌한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중후반이 되면 페이지를 멈추기가 쉽지 않다. 블록버스터 전쟁영화를 책으로 읽는 느낌이랄까. 겐쿠로의 대포와 교스케의 성벽이 드디어 맞부딪히는 순간, 영화였다면 슬로모션으로 처리되었을 하이라이트를 저자는 담담히 묘사한다. “풍경이 천천히 흐르고 시간이 느려진다. 푸른 하늘에 떠오른 검은 점은 점점 커졌다. 실을 길게 끄는 듯 아름다운 선을 허공에 그리는 점은 넋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열을 받아 조금 둔한 붉은빛으로 변하는 모습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맥스도 4D도 크리스토퍼 놀란도 이런 문장을 써내지는 못한다.

  • <새왕의 방패> | 이마무라 쇼고 | 북스피어 | 2만 2,000원

“사람들은 참 걱정이 많은데, 걱정을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인생은 짧으니 빨리 말할게

드라마가 너무 재밌으면 뒷이야기가 궁금해 밤새 몰아보게 된다. 근데 모든 드라마가 꼭 그렇진 않다. 분명 재밌는데 왠지 아까워서 한 달에 한두 편씩 천천히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다. 작품 속 캐릭터들이랑 비슷한 속도로 늙어가길 바라기라도 하듯이. 내겐 <길모어 걸스>가 그렇다. 넷플릭스를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뒤로, 나는 초보운전자답게 매우 느린 속도로 정주행을 시작했고 2025년 1월 현재 시즌 2의 중반을 넘어서는 중이다. 아직 다섯 시즌이 쌓여있으니 시리즈 목록만 봐도 나는 배가 부르다.

<길모어 걸스>의 가장 큰 재미는 끊임없는 농담 따먹기다. 평소 진지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라 <프렌즈>도 보다 말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일상 대화가 많아서 영어공부용 미드로 자주 추천되는 모양인데, 나도 몇 번 자막 끄기를 시도했다가 번번이 포기했다. 로렐라이 모녀의 ‘하이 개그’를 이해하려면 한글자막이 필수니까.

<인생은 짧으니 빨리 말할게>는 엄마 로렐라이를 연기한 로런 그레이엄의 책이다. 역시나 드라마처럼 농담의 비중이 매우 높다. 그리고 역시나 드라마처럼 자유롭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가 갑자기 현재로 돌아와 아빠와의 통화 내용을 생중계하기 시작하는데… 지나치게 뻔뻔해서 오히려 자연스럽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막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 책인데! 크, 권력의 맛에 취한다!”

성공한 배우의 회고록답게, 첫 배역을 잡기까지의 무명시절 에피소드가 빠지지 않는다. 다소 뻔한 스토리지만 젊은이의 대책 없는 열정에는 언제나 감동이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땐 그가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다 읽고 나면 그 운은 스스로 만든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비참하고 좌절스러운 순간에도 농담하길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운을 완성했다.

  • <인생은 짧으니 빨리 말할게> | 로런 그레이엄 | 싱긋 | 1만 6,800원

“그들은 이 작품이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 해.”

이것이 새입니까?

1926년 가을 어느 날, 커다란 배가 뉴욕항에 닻을 내린다. 배 안에는 프랑스 조각가 브랑쿠시의 작품 ‘공간 속의 새’도 실려 있다. 원작자는 새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화물을 조사하는 세관원들의 눈에는 그저 기다란 금속 작대기로 보일 뿐. 일반적으로 예술품은 면세 대상이지만, 세관원들은 브랑쿠시의 조각을 ‘산업용 물품’으로 간주해 40%의 세금을 매긴다. 브랑쿠시는 곧바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나의 새는 예술품이오! 산업용 물품이 아니란 말이오!”

미국에서는 재판이 시작된다. 미국 정부 측 변호사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이 조각은 예술품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원본이라는 걸 입증할 수 없다, 설령 이게 원본이라도 누구나 쉽게 복제할 수 있다, 제작할 때 노동자의 손을 거쳤을 수 있다… 심지어는 새를 닮지 않았으니 ‘새’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논쟁은 산으로 가지만, 산으로 가는 논쟁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원본만 예술인가. 복제할 수 있으면 예술이 아닌가. 노동자가 만들면 예술이 아닌가. 예술은 생김새를 최대한 비슷하게 묘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방도 예술인가.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브랑쿠시는 프랑스에 머무르며 재판 소식을 전해 듣는다. 스트레스는 점점 커진다. 그동안 나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그건 예술이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나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내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고뇌하는 브랑쿠시에겐 좀 미안한 얘긴데, 그림도 메시지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 <이것이 새입니까?> | 아르노 네바슈 | 바람북스 | 2만 7,800원

[5]
<착한 대화 콤플렉스>

“잡초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풀들은 좀 더 귀한 존재로 대우받을까.”

착한 대화 콤플렉스

평생 발음해 본 적 없다가 최근 1~2년 사이 자주 입에 올리게 된 단어들이 많은데, 유모차도 그중 하나다. 몇 년 전 한 지인이 페이스북에서 ‘유아차’라는 표현을 썼다. 그치, 엄마만 끌라는 법은 없으니 유아차가 맞지. 그런데 막상 실생활에서는 ‘유아차’가 생각만큼 입에 잘 붙지 않더라. 내 말을 상대가 알아들을까, 유난스럽게 보진 않을까 망설여졌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자란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유모차’에 머물러 있다. 얼마 전 한 유튜브 편집자는 출연자의 ‘유모차’ 얘기에 ‘유아차’라는 자막을 붙였다가 악플에 시달렸다. ‘이게 맞나?’ 혼란스러울 때 이 책의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말실수가 두려워 말수를 줄이는 우리의 자화상.’

말실수가 두려운 사람들은 대개 비뚤어진 방식으로 문제상황을 피한다. 말수를 줄이거나, 앞질러 비꼬거나. “요즘은 말도 함부로 못해~” 한 가지 분명한 건, 함부로 말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보다는 그래도 지금이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나쁜 대화만 나쁜 것은 아니다. ‘착한 대화’만 해야 한다는 압박감 또한 나쁜 대화로 이어진다. 어쩌면 특정 순간에 주고받은 말의 겉만 보고 착하다, 나쁘다 규정하는 태도가 말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지나치게 키워버린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누가 ‘주린이’라고 하면 바로 “그건 어린이 비하하는 말이에요”라고 꼬집었고, 아빠가 ‘벙어리 장갑’이라고 하면 “요즘 누가 그런 말 해요…”라고 쏘아붙였다. 유모차와 유아차 사이를 서성이던 나는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말 한 마디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고민과 저마다의 입장이 숨어 있다는 걸. 

  • <착한 대화 콤플렉스> | 유승민 | 투래빗 | 1만 8,000원
About Author
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