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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시장에 가면 이모카세 안동집도 있고

스타벅스 경동1960점도 있고
스타벅스 경동1960점도 있고

2024. 12. 23

안녕, 에디터 유정이다. 요즘 회사 점심시간마다 오고 가는 대화는 이렇다.

“뭐 먹을까요?”
“뜨끈한 거요….”

뼛속까지 시린 계절이 오니 매일 뜨끈한 국물이 간절하다. 평소에는 면보다 밥을 훨씬 좋아하는 나지만, 겨울만 되면 이상하게 국수가 자꾸 생각난다. 뜨거운 국물을 머금고 노곤노곤해진 면발을 휘휘 감아 국물과 함께 들이키면 마치 보약을 먹은 듯 속까지 데워지는 기분이 든다.

국수의 매력은 자고로 소박함에 있다. 화려한 기교보다 정성스러운 손맛이 돋보이는 음식. 오늘 소개할 국수집 역시 그렇다. 아마 현시점 전국에서 가장 핫한 국수집, 경동시장의 ‘안동집’이다.

경동시장 이모카세 안동집

안동집은 <흑백요리사>에 ‘이모카세 1호’로 출연한 김미령 셰프의 국수집이다. 그는 인생 요리를 소개하는 세미파이널 미션에서 떨리는 손으로 국수 한 상을 내놨다. 가난의 상징이라 여겨 싫어했지만 결국 가족을 책임지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운명적인 요리라며 눈시울을 붉힌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인생 영화’, ‘인생 책’, ‘인생 식당’. 인생이라는 수식어가 가볍게 쓰이기도 하는 요즘이지만, 김미령 셰프의 인생 요리에서는 그 무게가 묵직하게 전해졌다.

안동집은 경동시장 신관 지하 1층에 있다. 이름만 신관이지, 1982년에 준공된 오래된 건물이라 입구부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1960년도부터 시작된 경동시장 안에서는 1982년에 태어난 건물이 ‘YB’로 통한다.

경동시장 이모카세 안동집

점심 피크 타임이 살짝 지난 월요일 오후 1시 반에 도착했지만 웨이팅은 피할 수 없었다. 내 앞에는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고, 35분 정도 기다린 끝에 입장했다. 좌석은 주방을 ‘ㄷ’자로 둘러싼 바 좌석과 식당 내부의 테이블 석으로 나뉜다. 나는 시장 분위기를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바 자리에 앉았다. 외국인 관광객, 대학생 커플, 노부부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가마솥을 가운데 두고 낡은 식탁에 빼곡히 앉은 풍경이 낯설고도 정겹다.

경동시장 이모카세 안동집

자리에 앉아 안동국시와 배추전을 주문했다. 주문과 동시에 보리차를 내어주고 알배추, 겉절이, 기장밥과 각종 양념장이 기본으로 나온다. 기장밥은 알배추에 싸 먹거나 국물에 말아 먹으면 된다.

경동시장 이모카세 안동집

국수가 나오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40년 된 가마솥에서 푹 끓여낸 멸치 육수에 얼갈이 배추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국물이 시원하면서 담백했다. 마치 슴슴한 배춧국에 면을 말아 먹는 느낌. 뇌를 번쩍 깨우는 자극적인 맛과는 거리가 멀지만, 허기를 몰아내고 온기를 채워주는 깊은 맛이다. 물릴 때쯤 시원 칼칼한 겉절이를 한 입 곁들이면 궁합이 딱 좋다.

안동국시는 면발이 독특하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은 반죽을 직접 칼로 썰어내는데, 투박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찰기가 있는 쫄깃한 면과 달리 툭툭 끊어지는 거친 면발이다. 면치기를 선호하지 않는 나에게는 오히려 잘 맞았다.

평소 자극적인 음식과 간이 센 음식이 취향이라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럴 땐 함께 제공되는 간 마늘과 간장 소스, 취향에 따라 청양고추까지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나는 담백한 국물 맛이 좋아 마지막쯤에만 소스를 살짝 넣어 얼큰하게 마무리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처음 그대로의 맛이 더 마음에 들었다.

배추전은 ‘바삭’보다는 ‘쫀득’에 가까운 식감이다. 대신 두툼한 배춧잎 줄기의 아삭함이 밸런스를 맞춰준다. 경동시장에서 ‘가장 좋은’ 신선한 배추를 쓴다더니, 은은하게 느껴지는 채소의 달큰함이 좋았다. 간장을 찍어 먹고, 겉절이에 싸 먹고, 국물로 입가심하기를 반복하면 끝도 없이 계속 들어간다. 기본 찬으로 나온 알배추, 국수에 들어간 얼갈이 배추, 겉절이 김치와 배추전까지 먹어보니 알겠다. 확신의 배추 맛집이다.

이렇게 국수에 배추전까지 배불리 먹은 값이 도합 1만 6,000원이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요리가 8,000원이고 가장 비싼 수육만 1만 2,000원이다. 외식 물가가 미친 듯이 치솟은 서울 한복판에서 이만한 인심이라니. 특별한 맛을 내는 음식은 아니지만 따숩게 속을 풀어주는 한 상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웨이팅까지 해서 먹을 만하냐고 묻는다면 한번쯤은 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식당이 실내에 있어 날씨를 크게 타지 않고, 줄이 어느 정도 줄면 앉아서 기다릴 수 있고, 회전율도 빠르니 웨이팅 난이도가 높지 않은 편이다. 예약 앱의 날짜 선택 창에 진입하기조차 어려운 다른 <흑백요리사> 맛집에 비하면 방문하기 쉬운 편이다.

혼자 가면 자리가 나는 대로 금방 앉을 수 있다. 하지만 둘이 가는 걸 더 추천한다. 나는 기사를 위해 혼자 방문한 터라 메뉴를 두 개밖에 시키지 못했는데, 듣자 하니 비빔밥과 수육도 참 맛있다더라. 손국시와 비빔밥, 수육, 배추전까지 푸짐하게 주문해 보시길 바란다. 네 메뉴를 합해도 3만 6,000원밖에 안 한다. 이곳에 다녀간 누군가는 ‘인생 국수’를 먹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기대 이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니 직접 맛보고 줏대 있게 느껴보시길! 아, 참고로 평일 낮에 방문하면 운이 좋으면 김미령 셰프가 직접 말아주는 국수를 맛 볼 수도 있다.

이왕 경동시장에 들른 김에 국수로 부른 배도 꺼트릴 겸 시장을 한 번 돌아보는 것도 추천한다. “고등어 반값!” “우리는 반의반 값!” 같은 진짜일지는 모를 홍보 멘트(?)를 경쟁하듯 부르기도 하고, 가득 쌓인 건어물 앞에서 맛보라고 손짓하는 상인도 있다. ‘말랑 복숭아 누르지 마세요. 초인종이 아닙니다.’ ‘복숭아도 뭅니다’ 같은 서울 모 마트에서 시작해 밈처럼 퍼진 안내문들과는 달리 “과일은 만져봐야 알죠.”라며 내미는 상인도 있었다. 반찬거리나 식재료를 파는 곳이 대부분이라 놀러 온 김에 살만한 물건은 많지 않지만, 걷다 보면 추억의 캔디를 파는 노점이나 인기 있는 튀김만둣집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소화가 되면 분명 디저트가 당길 테다. 그때 마지막 코스로 스타벅스 경동1960점을 들르면 완벽하다.

스타벅스 경동시장1960점은 시장 안 28년간 방치된 폐극장을 개조해 탄생했다. 높은 층고와 어둑한 조명으로 극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렸다. 좌석은 계단식으로 층층이 배치되어 시야가 탁 트인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대형 카페처럼.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조 덕분에 개방감이 느껴지고, 맨 위층에 앉으면 300평 넘는 공간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규모는 웅장하지만 은은한 조도와 적절히 분리된 좌석 덕분에 의외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주문한 음료가 준비되면 벽면에 마치 엔딩 크레딧처럼 닉네임이 스크롤 된다.

스타벅스 일부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특화 음료 ‘막걸리향 크림 콜드 브루’를 주문했다. 비알코올 막걸리 크림과 크런치한 쌀 토핑이 올라가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인데 묘하게 막걸리 향이 감돈다. 커피 맛은 강하지 않은 편.

‘밤으로 디저트를 만들면 바밤바 맛, 쌀로 디저트를 만들면 아침햇살 맛’이라는 말이 있다. 이 음료는 크리미한 아침햇살에 막걸리 한 스푼을 더한 맛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시장에 온 김에 토속적인 감성을 이어간다고 괜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게 경동시장 코스를 마무리할 수 있다.

About Author
손유정

98년생 막내 에디터. 디에디트 다니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