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이불 속에서 읽기 좋은 책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베스트셀러보다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시리즈

2024. 12. 27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최근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겨울인데 겨울답지 않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하지만 겨울은 겨울이다. 며칠 사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추운 겨울 거리로 나갔던 사람들 모두 화이팅을 전하며,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서 몸 녹일 때 읽기 좋은 책을 다섯 권 골랐다.


[1]
<음과 음 사이에서>

“우리 머릿속엔 모든 걸 통제하는 일종의 경찰이 있대요.”

책 추천

<음과 음 사이에서>는 에스토니아 국적의 현대음악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일생을 다룬 그래픽 노블이다. 현대음악에 무지한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라, 책을 읽기 전에 유튜브에서 검색해봤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Spiegel Im Spiegel(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연주곡이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도 삽입되었다고 한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아기 때부터 엄마 품에서 듣던 노래를 똑같이 따라 불러 엄마를 기쁘게 했다. 라디오와 피아노만 있으면 하루종일 심심하지 않았다. 나라가 폭격을 당해 뒤숭숭하던 시기에도 음악을 듣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광장에 나갔다. 음악학교에 진학해서는 여러 악기를 동시에 배웠고, 틈날 때마다 곡을 썼다. 탈린 음대 교수는 입학시험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 연주는… 참 순수하군.”

너무 순수해서였을까. 그는 겉돌았다. 1960년대 에스토니아 음악계는 경직되어 있었다.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그의 작곡 기법은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건강도 좋지 않아 젊은 나이에 신장을 하나 떼어냈다. 연주회를 찾은 관객들은 그의 음악을 좋아했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곧 다시 외로워졌다. 그럴수록 더 고지식하게 음악에 매달렸다. 책을 덮을 때까지, 그가 웃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책을 덮고 ‘Spiegel Im Spiegel’을 다시 들었다. 평온을 필요로 할 때마다 이 음악을 찾는다는 유튜브 댓글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적혀 있다. 그의 끝없는 방황 덕분에 지금 우리는 잠시나마 평온할 수 있다.

  • <음과 음 사이에서> | 요나스 실드레 | 마르코폴로 | 2만 5,000원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며 꿈꾸는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반대 지점에 있지.”

소설의 배경은 정치적으로 분열되다 못해 아예 둘로 쪼개져버린 2036년의 미국이다. 보수는 공화국연맹으로, 진보는 연방공화국으로 쪼개졌다. 기독교가 국민 위에 있는 공화국연맹에서는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면 화형당한다. 연방공화국은 이러한 공화국연맹의 폭정을 비판하지만, 국민들의 체내에 칩을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점에서 징그럽긴 마찬가지다. 실제 정치 현실을 적극 반영한 설정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마치 예언서를 읽는 듯 흥미롭다.

주인공 샘 스텐글은 연방공화국 국정원 요원이다. 어느 날 샘에게 공화국연맹 핵심 인사를 암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는데, 알고 보니 그 인사는 존재조차 몰랐던 동생 케이틀린 스텐글이다. 샘은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을까, 잔혹한 미션을 샘에게 준 연방공화국의 속내는 무엇일까. 갑자기 알게 된 동생의 존재, 그 동생을 죽여야 한다는 압박감은 유능한 샘마저도 혼란에 빠뜨린다. 문제는 독자들까지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촘촘한 설정만큼 인물들의 관계나 내면도 충분히 묘사되었다면 더 좋았겠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대표작 <빅 픽처>처럼 재밌는 소설 쓰기로 유명한 작가다. <원더풀 랜드>에서도 현실에 상상을 더해 ‘진짜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서늘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책을 고르고 읽는 몇 주 사이 현실이 픽션을 능가할 기세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또 한 번 대통령이 됐고 한국에서는 45년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2024년 12월 현재 이 소설을 재미로 읽을 수 있을까. 추천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 <원더풀 랜드> | 더글라스 케네디 | 밝은세상 | 1만 9,800원

“합리적인 세법으로는 도무지 취합되지 않는 자료들이 정현의 마음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재미있는 제목이다. 왜 끝난 사랑,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망한 사랑일까. 요즘 ‘망하다’는 ‘식당이 망하다’, ‘사업이 망하다’처럼 경제적 파산을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랑이 망할 수 있나? yes. 사랑에 돈이 얽혀버리면 그 사랑은 망해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사랑처럼. 근데 사랑이란 건 폭삭 망하거나 아예 안 망하는 거지 조금만 망할 수가 있나? 역시 yes. 돈 때문에 오만정이 떨어진 후에도 시간이 지나 문득 그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아픈 덴 없는지 궁금해진다면 ‘완전 망한 사랑’은 아니지 않을까. 첫 단편 ‘포기’의 주인공이 민재를 생각할 때 그랬듯이.

헤어진 사람에게 빌려준 돈. 돈 때문에 헤어진 사람. 돈이 없을 때 만난 사람. 떠난 사람이 나에게 남긴 돈. 돈 때문에 돌아오겠다는 사람. 예쁜 일러스트 표지가 무색하게도 아홉 편의 이야기엔 돈 얘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 단편은 아예 제목부터 ‘반려빚’이다. 그래서 싫냐면, 아니 너무 좋다. 2024년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것을 딱 2개만 꼽으라면 역시 돈과 사랑이기 때문에. 그리고 돈과 사랑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복잡하지 않은 대사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 때문에.

사실 솜씨는 진작부터 인정받은 작가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반려빚’, ‘포기’, ‘좋아하는 마음 없이’가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근데 내 취향은 오히려 아직 상을 못 받은 ‘경기지역 밖에서 사망’과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로 기운다. 달다 싶으면 쓰고 쓰다 싶으면 단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 어느 날 갑자기 망하더라도 조금만 망하자.

  • <조금 망한 사랑> | 김지연 | 문학동네 | 1만 7,000원

[4]
<무지의 즐거움>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해야 근원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인생책’하면 떠오르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 하나가 5년 전 출간된 얇은 책 <거리의 현대사상>이다. 거리감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우리 주위에 만연한 허위 사상 뒤집기’라는 부제 그대로 마음과 머리가 동시에 상쾌해진다. 이 책 이후 우치다 다쓰루의 책이라면 일단 장바구니에 넣고 본다.

지난달엔 그가 쓴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를 읽었다. 솔직히 난 사람이 많아져야 도서관이 더 좋아진다는 쪽이지만, 크게 공감한 부분도 있었다. “도서관은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가르쳐주는 장소다.” 서가에 꽂힌 수천 수만 권의 책을 보며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 자체가 배움이라는 얘기다. 이어 나온 책 제목이 <무지의 즐거움>이길래 바로 사서 읽었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번역서가 아니라 ‘오리지널 한국판 책’이라는 점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팬을 자처하는 박동섭 번역가와 출판사가 저자와 직접 소통해 만들었다. 한국 독자들이 던진 질문 25개에 우치다 다쓰루가 답하는 구성이다. 독창적인 것을 구하려다 편협해지지 말아라, ‘이미 아는 것’의 함정을 경계하라, 이해하는 것 못지 않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주목하라 등 곱씹을 이야기가 많다.

특히 시의적절한 몇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교사의 일은 아이가 점점 복잡화해 가는 것, 표정과 어휘와 발성이 바뀌어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기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결코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이지요.” 교사는 아니지만 아이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말이다. 책 후반부에 나오는 다음 대목도 요즘 같은 시국에 필요한 말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손을 뗀 사람들은 더는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 <무지의 즐거움> | 우치다 다쓰루 | 유유 | 1만 8,000원

“잘된 것은 잘돼서 좋고, 별로인 것은 나중에 다시 잘해보면 된다.”

10년 전 웹툰 <미쳐 날뛰는 생활툰>을 봤다. 본인 일상을 웹툰으로 그리던 작가가 아이디어 고갈, 작품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점차 망가져간다는 스토리다. 그때까지 나에게 일상툰이란, 귀여운 그림체와 명랑한 캐릭터로 승부하는 가벼운 장르였기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후로 다른 일상툰을 재밌게 보면서도, 마음 한켠에 오지랖이 남았다. 이 사람은 괜찮을까. 만화에 못 담을 정도로 삶이 힘들 땐 어찌 견딜까.

몇 년 전부터 개인 뉴스레터를 발행하면서 <미쳐 날뛰는 생활툰>의 충격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뉴스레터 도입부에 인사말과 함께 근황을 알리곤 했는데, 내 일상이 우울할 땐 별 내용 없는 인사 한줄도 쉽게 써지지 않았다. 우울하게 쓰자니 구독자들이 싫어할 것 같고, 밝게 쓰자니 거짓말하는 것 같고. 내 삶을 담아 뭔가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다.

<일상이 장르>는 인스타그램에서 만화를 연재하는 작가 네 사람의 글을 묶은 책이다. 인스타툰의 등장으로 가뜩이나 레드오션이었던 일상툰 업계는 한층 더 비좁아졌다. 창작자에게 인스타그램은 장점도 많지만, 그 어느 채널보다 피드백이 빠르고 수시로 바뀌는 알고리즘에 조회수 관리도 어려운 ‘험지’다. 김그래, 쑥, 작가1, 펀자이씨는 여기서 살아남은 고수다. 고수의 내공은 만화 아닌 글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일상툰을 그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이었다.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을 인정하고 차분히 나아갈 방향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나의 하루 돌아보기, 그 속에서 의미 찾기, 재미있게 전달하기 모두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면서 그들의 일상은 더욱 튼튼해졌을 것이다. 책 표지는 귀엽지만 다 읽고 나면 존경심이 생긴다.

  • <일상이 장르> | 김그래&쑥&작가1&펀자이씨 | 자음과모음 | 1만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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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