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가장 뜨거웠던 키워드는 겨뤄볼 것도 없이 ‘흑백요리사’였다. 다이닝이나 미식에 심드렁하던 친구들 조차도 ‘미쉐린’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안성재 오너 셰프의 레스토랑 ‘모수’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국내 유일한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인데다가, 휴업 중인 상황까지 맞물려 신비로움은 배가 됐다. 저토록 깐깐하게 ‘채소의 익힘 정도’를 논하는 완벽주의자 셰프의 음식은 대체 어떤 맛이란 말인가.
흑백요리사가 넷플릭스에 공개된 직후에, 나답지 않게 민첩한 결단을 내렸다. 모수 홍콩으로 가는 거다!
모수는 본래 20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됐다. 오픈 첫 해에 바로 미쉐린 원스타를 받았고, 안성재 셰프는 한식의 범주를 확장해보고자 모수를 서울로 옮기게 된다. 모수 홍콩을 오픈한 건 2022년. 모수 서울의 시그니처 메뉴를 홍콩에서도 맛볼 수 있다는 말에 잽싸게 비행기 티켓부터 끊었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 내가 모수 홍콩의 런치를 예약한 뒤로 흑백요리사가 어마어마한 히트를 쳤고, 그 뒤로는 내년 초까지 예약이 꽉 차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이번 홍콩 여행은 오직 모수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는 얘기다.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점을 나누는 기준에 딱 들어맞는 동기다. 3스타는 요리가 매우 훌륭해서 맛을 보기 위해 특별한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을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이 평가가 미쉐린 가이드의 권위 따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말해두고 싶다.
나는 많은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방문했었지만, 그 경험이 언제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접시를 다 비우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지나치게 비싸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두 달 전에 힘들게 예약하고 방문한 3스타 레스토랑에서 “나는 파인다이닝은 안 맞는 것 같아…”라고 풀죽어서 나왔던 게 최근이다.
모수는 달랐다. 예민하게 미각을 곤두세우고 맛보지 않아도, 직관적이고, 친절한 요리였다.
홍콩 구룡반도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M+ 3층에 위치해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루프 가든이 근사하다. 고요하면서도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입구에는 커다란 달항아리를 배치하고, 홀 가운데는 북 4개를 설치해두었다.
런치에 방문했기 때문에 가볍게 세 잔으로 구성된 와인 페어링을 주문했다. 여기서 디테일에 감탄한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메뉴판. 매일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코스 메뉴를 반투명한 트레이싱지에 인쇄해서 준비해주는데, 와인 페어링을 주문하면 와인 리스트가 적힌 종이를 한 장 더 갖다준다. 두 장의 메뉴를 겹쳐보면 어떤 코스에 어떤 와인이 페어링되는지를 알 수 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재밌는 디테일이다.
배와 페퍼콘, 생강이 들어간 차가운 웰컴 드링크가 준비된다. 알싸한 끝 맛이 혀에 남에 입 맛을 다시게 된다.
첫 번째 한 입 거리는 단새우 요리. 바삭한 김으로 그릇처럼 감싸 부드럽게 으깬 감자를 넣고 단새우를 올렸다. 가볍게 ‘아그작’ 부서지는 첫 식감이 즐겁다. 감자와 단새우의 밸런스가 좋다. 특별히 강렬한 맛이라기 보다는 식재료 자체의 신선함에 감탄했다.
두 번째 한 입 거리는 풋콩으로 만든 타르트. 밀가루가 아니라 아몬드로 만든 쉘이라서, 입에 넣자마자 금새 녹아버린다. 가볍고 여리여리하고 신선한 맛. 이 요리는 그냥 먹었다면 조금 심심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어링된 첫 번째 와인과의 마리아주가 기가 막혔다.
첫 번째 와인은 로제 샴페인. 오크에서 3년 정도 숙성해서 딸기, 크랜베리 류의 붉은 과실 향과 흰색 꽃향이 느껴지고 마지막에는 살짝 버섯같은 뉘앙스도 있다. 개인적으로 즐겨 마시는 스타일의 샴페인은 아니었음에도 최고의 페어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설명한 단새우, 풋콩 요리와의 조화가 훌륭했다. 입 안에서 향이 배가 되는 느낌. 게다가 컬러가 정말 선명한 핑크빛이라 아름답다. 런치에는 이렇게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와인을 서브하는 것도 센스가 아닐까.
다음으로는 그 유명한 모수의 시그니처 ‘전복 타코’다. 곁들여지는 라임을 짜서 한 입에 먹으면 된다. 타코 쉘은 유바라고 부르는 두유 껍질을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정말 얇고 가볍다. 첫 입에는 바삭하지만 막상 몇 번 씹어보면 입에 걸리는 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의 가벼움이다. 전복은 분명 씹는 맛이 있는데도 말도 안될 만큼 부드럽다. 위에는 곱게 썬 시소가 잔뜩 올라가 있다. 그리고 은은한 숯불향. 여러 가지 식재료가 ‘타코의 형태’로 하나가 되어 있는데, 입에 넣고 씹을 때는 하나도 튀거나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 놀라울 정도의 밸런스다. 이게 모든 요리에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안성재 쉐프의 스타일인걸까?
다음은 물회. 홍콩 사람들에게 물회를 소개하려고 재해석한 메뉴라고. 위에는 콜라비를 실처럼 가늘게 채썰어 올렸는데, 이게 씹히는 맛이 절묘하다. 매콤한 뉘앙스는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맵지 않아서, 물회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오히려 신선했던 요리.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조금 아쉬울지도.
잣과 블랙 트러플, 새우가 들어간 요리. 잣이라는 게 굉장히 기름지고 향이 강한 재료이지 않나. 제일 밑에는 잣의 풍미가 엄청 진하게 느껴지는 계란찜같은 게 깔려있고, 그 위에 새우와 은행 등의 식감이 더해진다. 그리고 블랙 트러플도 아낌없이 들어갔다. 잣향이 너무 좋아서 “맛있다”를 연발하며 싹싹 긁어 먹었다. 재밌는 사실은 블랙 트러플에 잣향이 전혀 묻히지 않는다는 거. 오히려 주인공은 잣이고, 트러플이 풍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향이 강한 재료들이 만나도 거슬리지 않게 밸런스를 잡는 테크닉을 계속 느낄 수 있다.
기다리던 생선 코스. 병어를 사용했는데 정말 촉촉하다. 소스의 정체가 충격적이었는데, 멜젓을 부드러운 폼으로 만들었다고. 비리거나 튀지 않을까 싶었는데, 크리미하고 복합적인 감칠맛만 남아있다. 특정 재료를 사용할 때 원하는 맛을 구현하기 위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멜젓 소스 밑에 있는 자두가 산미를 잡아주고, 병어 위에 올린 튀긴 방아잎이 식감과 향을 더해준다. 정말 조화로웠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만족했던 요리이기도 한데, 와인과 페어링이 좋아서 더 그랬을지도.
두 번째 와인은 슈냉블랑. 갈변된 사과의 뉘앙스에 꿀향도 느껴지고, 살짝 짭짤한 미네랄리티도 있다. 복합적인 맛이라 곁들이는 음식에 따라 변주가 다양했다. 특히 방금 설명한 병어 요리와 함께 마셨을 때 머리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진다. 슈냉블랑과 멜젓이라니. 상상도 못한 최고의 페어링.
코스 중간에 무쇠솥을 가져와서 밥을 보여주는데, 마지막 메인 코스에 갈비와 밥을 먹게 된다. 이 밥맛이 그렇게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탄수화물 중독자로서 이미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조선향미, 백세미를 비롯해 세 가지 품종의 쌀을 블렌딩해서 짓는 밥이다. 쌀알이 하나하나 살아있음은 물론 기름기가 상당하다. 밥에서 ‘잣’ 맛이 난다고 느껴질 정도.
나중에 한 그릇에 차려지는 갈비와 반찬들도 정말 훌륭했지만, 밥이 너무 맛있어서 이 요리들은 기억이 희미하다. 밥알이 탱글탱글하고 살짝 씹으면 단맛과 짠말, 고소한 맛까지 느껴져서 정말 음미하며 먹었다. 일행이 남긴 밥 한 숟갈까지 뺏어와서 먹었을 정도.
이제 정말 배가 부르지만 추가 메뉴가 있다. 예약하면서 미리 시켜둔 ‘잉걸불에 태운 도토리 국수’. 흑백요리사에서 에드워드 리 셰프가 그릇을 핥아먹는 걸 보고 얼마나 궁금했던지.
성주 도토리를 강한 불에 볶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에 직접 제면을 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엄청 들어간다고. 소스는 버터와 파마산 치즈 베이스. 그리고 참나물이 같이 들어가있다. 마지막으로 수북히 쌓인 트러플까지. 이 터프하게(?) 생긴 면요리를 젓가락으로 먹는 건 아주 묘한 경험이었다. 한국적인 식재료를 사용했지만, 굉장히 이탈리안스러운 맛이기도 하고, 식감이나 고소한 향에서 막국수의 정취도 있다. 솔직히 이 요리를 먹고 맛이 없다고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녹진하고 버터리한 소스가 면에 완벽하게 엉겨서 감칠맛을 자아낸다. 괜히 그릇을 핥는 게 아니다. 게다가 가장 좋았던 건 ‘트러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나는 트러플이라는 값비싼 식재료를 요리에 너무 남용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데, 트러플 향을 가득 머금고 있지만 그렇다고 트러플 향만 나는 요리는 아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빨리 모수 서울이 오픈해서 디에디트 독자 여러분도 도토리 국수를 맛보셨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전복 타코보다는 더 강렬하게 내 마음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레드 와인을 페어링했다.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가장 유명한 생산자중 하나인 쥬세페 퀸타렐리의 발폴리첼라다. 소믈리에 분이 코스 초반 부터 디캔팅을 해놓았기 때문에 완벽한 상태로 마실 수 있었다. 디너를 경험하지 못한 게 애석할 만큼 근사한 와인 페어링이었다.
디저트는 가벼운 자스민 소르베와 다시마로 만든 치즈케이크, 약과. 우리는 치즈케이크에 캐비어를 곁들였는데 충격적인 조합이지만 맛있어서 더 충격이었다. 약간 아쉬웠던 것은 의도가 없다면 꽃장식도 배제하는 셰프의 신념(?) 때문인지 디저트까지 플레이팅이 너무 투박했던 것.
보통 2~3시간 가까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약간의 피로감이 있기 마련인데 모수 홍콩의 런치가 끝난 뒤에는 섭섭한 마음 마저 들었다. 이제 이 요리를 먹기 힘들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서울에선 다시 오픈하더라도 예약은 요원해보이고, 홍콩에 다시 가야 하는 게 아닐까.
모수는 맛있었다. 아주 힘들고, 섬세하고, 복잡한 요리 과정을 거쳐서 심플한 맛을 낸다. 튀는 게 없고, 거슬리는 게 없고, 아찔할 만큼 밸런스를 유지한다. 엄격할 만큼 통제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미식가로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모수가 궁금한 여러분에게 이 글이 대리만족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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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