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그 영화 재밌어’ 대신 할 수 있는 감상법

네 가지 접근법이 있다
네 가지 접근법이 있다

2024. 09. 03

안녕, 영화평론가 김철홍이다. 영화와 와인의 두 가지 공통점. 첫째는 (와인평론가는 아니지만) 프랑스가 최고라는 점이고, 둘째는 알면 알수록 그 맛을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도 와인도 둘 다 재밌다/재미없다, 맛있다/맛없다라는 말로만 끝내고 넘어가기엔 아쉬운 무언가라는 걸 우리 모두 알지만, 그다음 말을 섣불리 이어가기 어려운 것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일 테다.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 1960

이 글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평소에 앞서 말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친구와 좋은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눌 때 늘 비슷한 얘기가 반복되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이제부터 소개할 방법들을 차근차근 활용해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졸업>, 마이크 니콜스, 1967

이곳저곳에서 영화 모임을 진행할 때마다 제일 많이 듣게 되는 말 하나가 있다. “제가 영화를 잘 몰라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라는 말이다. 맞다. 시작이 가장 어렵다. 특히 영화는 그 안에 정말로 다양한 시청각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종합 예술이기에, 마치 고급 뷔페에 온 것처럼 그 시작점을 정하기가 매우 난처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말하고 싶은 것이 여러 개라면 더욱 그렇다.

<봄날은 간다>, 허진호, 2001

시작을 힘들어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첫 번째 질문은, ‘가장 좋았던 장면’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혹은 비슷한 의미로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을 묻기도 한다. 뷔페로 치면, 가슴이 부르는 거부할 수 없는 첫 번째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장면을 묻는 이유는 간단하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그게 어떤 장면이었는지 묘사하는 순간, 자연스레 그의 입에서 그 장면에 대한 감정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2001

처음부터 세세한 분석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화 상대와 일단 한 장면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 내가 열심히 한 장면을 묘사하면 상대가 반응을 보일 것이고, 상대가 한 장면을 또 열심히 묘사하면 내가 그 장면을 어떻게 느꼈는지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 늘려가다 모이게 되는 n개의 장면의 합이 곧 영화다. 남은 것은 그 과정에서 표현한 나의 감정들을 되돌아보는 것뿐이다.

적용 예시

A: 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카메라가 정원에 있는 꽃들을 비추는 장면이 가장 좋았어. 식물에게 험한 말을 하면서 키웠더니 칭찬받은 식물에 비해 잘 자라지 않았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고 하잖아. 벽 너머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자란 꽃이 어떻게 자라게 될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더라.

A: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가 새벽마다 문을 나서며 하늘을 볼 때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아. 너는 이 표정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영화는 정말 다양한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지만, 그중 가장 쉽고 직관적인 것이 장르다. 내가 본 영화를 일단 액션, SF,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 드라마, 호러 등의 굵직한 장르들로 분류해 보자. 그리곤 딱 한 가지만 하면 되는데, 그건 바로 각 장르를 대표하는 명작 영화 한 편을 떠올리는 것이다. 예컨대 액션이라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SF라면 <인터스텔라>를 떠올리는 거다. 그다음, 방금 본 영화를 떠올렸던 대표 영화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A라는 영화는 <인터스텔라>에 비해 상상력이 아쉬웠다고 말할 수도 있고, B라는 영화는 <매드맥스>에 비해 액션이 다소 비현실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데이터를 쌓아가는 거다.

적용 예시

A: <파묘>를 보니까 내가 왜 <곡성>을 그렇게까지 즐기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내게는 <곡성>이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졌어.

A: <외계+인>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 가혹하다고 봐. 물론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분명 한국 영화이기에 느껴지는 고유한 색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해.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

장르라는 카테고리를 가지고 이 영화 저 영화 이야기해 보는 것을 추천하는 이유는 소위 말하는 ‘문법’ 때문이다. 문법은 마치 국어 공부처럼 굳이 글로 적으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에도 문법이 있는데, 그중 그 문법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영역이 바로 장르다.

액션 영화엔 액션 영화에만의 법칙이, 호러 영화엔 호러 영화만의 법칙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영화들을 최대한 정확히 비교하기 위해선 명확한 판단 기준이 필요할 텐데, 그때 무작위로 서로 관계없는 것들을 비교하는 것보단 동일 선상에 있는 것들을 비교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의미할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두 학생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할 때, 일단은 국어 성적 하나만 놓고 비교하자는 것이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2015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한 장르에 속한 영화를 여러 편 보는 것이다. 그러면 무의식적으로 이 장르에서 익숙하게 봤던 것과 특별한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데, 바로 그 부분들을 나열해 놓고 보다 진지한 평가를 시작해 보는 것이다. 예시로 <킹스맨>에서 신체가 분리되는 피 튀기는 장면을 경쾌하게 표현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전>이 다른 호러 영화들과 달리 어떻게 영화를 끝내는지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정해진 통념을 깨부수는 영화들에 더 끌리는 사람이라면, 그럴수록 오히려 의식적으로 문법을 의식해 보려는 노력을 해보시라. 또는 한 장르의 정석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봐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지도 모른다.

적용 예시

A: <트위스터스>가 재난 영화에 사용되는 흔한 선악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눈에 들어왔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난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옮겨진 것 같아.

A: <파묘>가 오컬트 장르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우리나라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특정한 정서를 담아낸 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이라고 생각해.


<위플래쉬>, 데이미언 셔젤, 2014

마지막 네 번째는 심화 과정이다. 장르에 대한 이야기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다시 말해 눈에 잘 띄는 특징들로만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벌써 아쉽다면, 이제 당신이 느껴야 할 것은 시간이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영화는 결국 감독이 정해진 타임라인 위에 어떤 장면을 몇 분 몇 초간 보여줄 것인가가 그 본질이다. 이걸 깨닫는 순간,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 속 시간이 ‘가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2017

말하자면 영화 속 시간은 우리의 현실 시간과 다르게 간다. 그걸 조작하고 있는 것이 감독이며, 바로 거기에 감독의 의도가 있다. 한 액션 영화가 특정 장면에 슬로우 모션을 걸었다는 것은, 여기에 감독의 ‘이 순간을 길게 늘어뜨리고 싶은’ 욕망이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 <덩케르크>가 다양한 길이의 시간대를 같은 길이인 척 뒤섞어 보여주는 것을 두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각 파트 인물의 중요도를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아니면 역설적으로 어떤 영화가 아예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아예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의 시간 값이 0이라는 뜻과 같기 때문이다.

A: <파일럿>은 왜 한정우가 비행기를 비상 착륙시키는 과정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고 생략한 걸까?

A: <데드풀과 울버린>에선 데드풀이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는 과정을 너무 자주 슬로 모션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해. 2편까진 재밌게 느껴졌는데, 이번엔 과하다고 느껴졌어.

<프랭크>, 레니 에이브러햄슨, 2014

이 글에 적은 영화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사실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을 하나의 타임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들은 그 값이 0이 된다 한들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확률이 높다. 영화도 와인도 그냥 좋았으면 됐지, 뭘 자꾸 말을 덧붙이냐는 말에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무용한 말들 덕분에, 내 인생(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들을 차지한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나누고 친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와 와인의 세 번째 공통점. 다음 말을 섣불리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당신께, 이대로 대화를 끝내기엔 아쉬운 상황에 봉착한 당신께 훌륭한 대화 소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가장 좋았던 장면이 무엇이었나요?” 그렇게 또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될 것이다.

About Author
김철홍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영화 글과 평론을 쓰고 있다.